'뉴트로'로 다시 태어난 복고 열풍 | 지큐 코리아 (GQ Korea)

‘뉴트로’로 다시 태어난 복고 열풍

2019-09-04T14:51:21+00:00 |culture|

뉴트로는 단순히 수년째 이어지는 복고 열풍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1970~1980년대를 겪지 못한 세기말, 혹은 새로운 세기에 태어난 세대가 과거를 하나의 새로운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왜 미래는 과거가 될까?

느지막한 토요일 오후, 을지로 한 다방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목욕탕처럼 자잘한 타일로 마감된 바닥에선 세월의 때가 묻어난다. 여러 군데 흠집이 난 투박한 나무 탁자에 앉아 와인 한 잔을 마신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면 1970년대 부유한 가정집 거실에 있었을 법한 호박색 조명등이 있다. 이곳은 60여 년 전 다방의 모습을 간직한 서울 을지로의 한 와인 바로, 최근 젊은 세대가 즐겨 찾는 장소 중 하나다. 밀레니얼 세대는 옛 정취가 묻어나는 와인 바와 카페에서 약속을 잡고 1970~198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 당시 유행한 시티팝을 다시 찾아 듣고 미국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에 푹 빠지는가 하면, 나날이 실사에 가깝게 발전하는 3D 애니메이션보다도 과거 수작업으로 그린 셀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를 모은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생활에 파고든 복고 유행은 좀처럼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 각 분야의 문화평론가들은 레트로의 등장을 두고, 과거 스타일이 돌고 돌아 회귀한 일시적 유행이거나 디지털 시대의 피로감에서 시작된 ‘아날로그 감성’쯤으로 해석했다. 고대 로마의 시인 마르쿠스 마르티알리스가 일찍이 말했듯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이니, 인간이란 언제나 현재보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진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현상이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새로움과 결합된 복고는 다시 뉴트로(New-tro)로 탄생했다. 옛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신기술을 접목한 것이 뉴트로다. 그리고 동시에 밀레니얼 세대, 실제로 1970~1980년대를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과거의 양식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발생한 것이 뉴트로다. 그러니까 이것은 겪어보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향수라는, 역설적인 현상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불투명한 미래의 전망 속에 낯선 과거라는 새로움을 가져와 동시대적으로 해석하고 경험하려는 이들의 탐구심이 이 뉴트로 열풍의 중심인 것이다.

뉴트로가 자주 언급되면서 함께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브랜드도 있다. 중년 세대나 찾는 한물간 브랜드로 취급되던 휠라는 뉴트로와 함께 1020세대 사이에서 브랜드 이미지를 다시금 포지셔닝했다. 아버지 신발처럼 커다랗고 투박한 복고풍의 ‘어글리 슈즈’ 등이 큰 성공을 거뒀다. 덕분에 휠라 매장은 2007년 이후 최근 12년 만에 패션의 중심지인 명동에 재입성했다. 시대의 유행을 가장 빨리 읽어낼 수 있는 CF에서도 과거의 풍경과 의상, 태도를 가져와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것이 흔하다. 버거킹은 1990년대 초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야인시대>에 출연했던 배우 김영철을 모델로 기용하며 당시 유행어였던 ‘사딸라’로 마케팅에 성공했다. 극장가에선 1994년, 라디오를 매개로 한 멜로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이 곧 개봉 대기 중이다. 뉴트로는 단순히 패션, 디자인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왜 요즘 사람들은 과거를 소환해 과거와 현재,
더 나아가 미래와 함께 동거하는 것일까. 아날로그에 열광하는 현상에 대한 통상적인 진단으로 시작하자면, <미세유행 2019> (안성민)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지녔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모든 과거의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의 현실에 꼭 필요한 과거의 어떤 모습을 끌어당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잘 어필하려면 이들의 결핍을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 이제부터 더욱 커져갈 밀레니얼 세대의 결핍은 물질성이다.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간 존재의 유일성이 위협받고, 증강현실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체온이 담긴 손으로 느끼는 감각마저 무용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실체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색스는 아날로그가 대중들을 매혹하는 까닭으로 ‘물질성’과 ‘희소성’을 꼽는다. “디지털 사진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실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진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더 이상 가족 앨범은 없고 인화된 사진도 없어요. 손으로 만지거나 흔들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그리워하기 시작했죠.”(<아날로그의 반격> 중.) 한편 작가 한강은 어느 인터뷰에서 책의 물질성에 대해 말했다. “유튜브 다음은 뭐지? 다시 종이책이 아닐까? 사람들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에 배고파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모니터 속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총합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고 크기와 무게가 있고 감촉이 있는 매체를 그리워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밀레니얼 세대가 느끼는 또 다른 결핍은 ‘자기 관여성’이다. ‘자기 관여성’은 어떤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실감에서 얻어지는 만족도를 말하는 것으로, 마케팅 전문가 마우라 아쓰시는 ‘자기 관여성’이 점차 사라지면서 이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IT 기술의 발달로 한 번의 클릭이나 음성 지시로 어지간한 시스템이 돌아가는 시대다. 음악 듣기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LP의 부활을 예로 든다. LP를 재킷에서 꺼내고, 턴테이블에 올리고 조심히 바늘을 내리는 그 행위 자체가 “내가 주체적으로 음악을 감상한다는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자율주행차의 상용화를 앞두고 있는 이때, 오토매틱이 아닌 수동변속기에 사람들이 새로이 관심을 갖는 것도 비슷한 사례다.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모든 이유에 앞서, 뉴트로의 인기에는 불확실성이 커진 현시대의 저성장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1970~198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가 한창이던 당시 인기를 끌었던 시티팝의 부활은 경제적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시티팝은 도회적이면서도 세련된 분위기가 특징으로 재즈, 펑크, 디스코 등 미국에서 영향받은 음악들이 일본에서 하나의 장르처럼 유행한 스타일을 말한다. 덕분에 몇 년 전부터 한국의 시티팝도 다시금 급부상하며 다양한 콘텐츠로 재생산되고 있다. 지난 12년간 앨범을 내지 않았던 가수 김현철의 노래가 카페며 바에서 자주 들리곤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가수 태연은 ‘춘천 가는 기차’를 다시 불렀고, 가수 죠지는 ‘오랜만에’를 리메이크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반 내놓은 김현철의 노래들이 젊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줄줄이 리메이크되는 중이다.

시티팝의 향유에는 음악이 갖고 있는 매력에 덧붙여 버블경제로 불릴 만큼 호황기였던 1970~1980년대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 있다. 성장 동력을 상실하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N포 세대’ 등이 유행어로 자리한 사회에서 겪어보지 못한, 풍요로운 옛 번성기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은 욕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부모의 세대보다 더 가난한 첫 세대인 밀레니얼 세대는 부모 세대의 거품을 동경만 해야 하는 이른바 ‘숨겨진 거품’ 세대다. 이를 ‘므두셀라 증후군’으로 보는 분석도 있다. 현실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과거의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추억만으로 보정하려는 기억왜곡 심리 현상이 일부 결합돼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자.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을지언정, 그 시대는 정말 유토피아였던가? ‘대망의 80년대’라는 구호 아래 1970~1980년대는 성장주의가 제일의 우선 가치가 되면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는 묵살되고 노동자와 시민들은 자유와 권리를 찾아 지난한 싸움을 거쳐야만 했다. 그 시대에 명암 중 어둠은 고스란히 사라지고 어떤 양식만이, 눈부신 영광만이 소환되고 있는 셈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작의 제목은 <레트로토피아>이다. 레트로토피아는 레트로와 유토피아의 결합어로, 바우만은 현시대의 과거로의 다양한 회귀를 설명하며 레트로토피아는 “분통 터질 정도로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현재에 내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그 원천”이라고 진단했다. 정일준 서울대 교수는 이 책의 해제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신념이 무너진 빈터에 레트로토피아에 대한 열망이 스며들고 있는 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하지만 노스탤지어는 결국 유토피아를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이 바우만이 <레트로토피아>를 쓴 이유”라고 강조하고 있다. 노학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닌 희망적인 미래가 아니었을까. 과거의 호황을 겪어보지 못한 밀레니얼 세대가 찾고 있는 이질적인 향수 속에 어쩌면 그 단서와 함정이 공존할 수도 있겠다. 글 / 김희연(경향신문 오피니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