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호정 "더 많이 자유로워졌어요" | 지큐 코리아 (GQ Korea)

배우 이호정 "더 많이 자유로워졌어요"

2019-09-27T13:15:12+00:00 |interview|

솔직하고 담대한 배우 이호정이 말한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블랙 롱 코트, 프라다.

그레이 수트 셋업, 제이백쿠튀르. 아이보리 스니커즈, 컨버스.

가죽 퍼프 소매 드레스, YCH.

블랙 시스루 블라우스, 퍼 스커트, 롱 부츠,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유심히 봤어요. 지난주에 제주도에 다녀왔죠? (아이처럼 손을 번쩍 들며) 네! 삼일 내내 비가 내렸어요.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요. 날씨가 뒤죽박죽이었는데 비가 잠깐 그친 틈에 백약이 오름까지 미친 듯이 차를 몰고 올라갔어요. 사실 거기에 가려던 건 아니었는데 지나가는 길에 방향을 틀었어요. 한참 동안 풍경을 바라보다 내려왔어요. 내려와서는 딱새우 회에 한라산 한잔 마셨죠.

여행지에서 헐겁게 시간을 보내는 편인가요? 옛날에는 하루를 꽉 채워서 수학여행처럼 여기저기 다니는 스타일이었는데 이제 안 그래요. 어릴 때는 다 신기하고 재미있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냥 자연 보면서 가만히 쉬는 게 제일 좋아요.

오늘 촬영장에 머리카락에 물기가 촉촉한 채로 등장했어요. 필라테스 하고 왔거든요. 매일 체육인처럼 살고 있어요. 모델 시절에는 독하게 살을 많이 뺐어요. 셀러드 하나 먹고 하루에 2~3시간씩 운동하고. 독하게 관리하는 삶에 질려버린 순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그렇게까지는 못 하고 한강 주변을 자주 뛰어요. 반포대교 아래 제가 좋아하는 공간이 있어서 자주 가요. 사람도 별로 없고 갑자기 고요해지는 구간이 있거든요.

에너지가 많은 사람 같아요. 한동안 춤을 열심히 배웠다고 들었어요. 제가 평소에 좀 흐느적거려요. 손 발이 크고 팔다리도 기니까 더 그렇게 보이나 봐요. 흐느적거리는 몸에 뭔가 리듬감을 갖고 있으면 괜찮겠다 싶었어요. 춤을 잘 추고 싶은 욕심도 있어서 겸사겸사 배운 거죠. 춤도 배우면 늘더라고요. 춤도 기술이에요. 기술은 잘 배워놓으면 언제든 적재적소에 쓸 수 있잖아요. 여러모로 춤 기술을 유용하게 쓰고 있어요.

타고난 흥이 많은가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음악을 흥얼거리던데요. 뭐 하나에 꽂히면 계속 그것만 들어요. 가사를 흥얼거릴 수 있을 때까지요. 보통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음악을 듣잖아요. 화가 나면 힙합을 듣고 차분하고 싶은 날은 다운템포 음악을 듣는다든지. 제주도 여행에도 그 장소와 어울리는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갔어요.

비 내리는 제주도와 가장 어울리는 음악은 뭐였나요? 가장 좋았던 음악 하나 알려드릴게요. Ondi Vil & Neoplasma의 ‘Let Me Know’.

들을 때마다 베스트 곡이 바뀌는 명반이 있나요? 위켄드 2집 <Beauty Behind The Madness>이 그래요. 앨범 전곡이 다 좋아서 베스트를 뽑기 어려워요. 그래도 3곡만 뽑으라면 1번 트랙 ‘Real Life’, 4번 ‘Often’, 6번 ‘Acquainted’! 작년 12월에 내한 공연장에도 갔어요. 라이브, 음향, 조명, 퍼포먼스 모든 것이 완벽했어요.

영어도 여전히 열심히 배우고 있나요? 영어로 인터뷰 가능해요? NO!(웃음) 원어민처럼 영어를 잘하는 친구에게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을 받고 있어요. 예전과 비교하면 엄청 많이 늘긴 했어요.

무엇이든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큰 사람처럼 보여요. 그만큼 호기심도 열정도 많다는 거겠죠.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은 어떻게 생기기 시작했어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시작이 자연스럽지도 않았고 제 길이 아닌 것 같았어요. 처음에는 온 맘 다해 거부했어요. 그러다 어떤 계기로 인해 연기를 열심히 하고 싶다는 감정이 어느 순간 확 찾아왔어요. 그때부터 생각이 좀 달라졌죠.

그 순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요? 한동안 집에 콕 박혀서 영화랑 드라마만 보던 시기가 있었어요. 영화 속 배우들이 부러웠어요. 그 사람들 부럽지 않으세요? 저는 진짜 부러웠어요. 생각의 시작은 단순했어요. 나도 저런 작품에 나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요.

주야장천 본 작품 중에 좋았던 것만 속사포로 나열해주세요. <플로리다 프로젝트>, 뒤늦게 봤는데 최고예요. 웨스 앤더슨 감독님의 <로얄 테넌바움>도 최근에 봤는데 너무 좋았어요. 프랑스 드라마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도 킬링 타임용으로 유쾌하게 볼 수 있어요. 주식 드라마 <빌리언스> 시리즈도 처음에는 조금 어려운데 시즌 1에서 4화까지만 꾹 참고 보면 신세계가 열려요.

너무 좋아서 여러 번 돌려본 영화도 있나요? <브이 포 벤데타>. 거기서 나탈리 포트만 너무 아름답고 멋있고 잘하고. 생각해보니 그분도 이 영화에서 삭발을 하셨었네요.

호정 씨도 영화의 배역을 위해 작년에 삭발을 했죠? 지금은 꽤 자랐어요. 오늘 삭발하는 꿈을 또 꿨어요. 소리를 ‘악’ 지르다 일어났는데 머리를 만져보니까 머리카락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다 안심하고 다시 잠들었어요. 연기할 당시에는 역할에 집중하느라 괜찮았는데 촬영이 끝나고 나서는 조금 힘들었어요.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삭발한 모습을 숨겨야 했으니까요. 어디를 가든 가발을 꼭 써야 하니까 답답하더라고요. 차라리 삭발한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은데 자꾸 감추니까 어느 순간 제가 누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나를 보여주는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인데 그런 것이 막혀버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좀 막막했어요.

반면에 기묘한 해방감이 생기지는 않던가요? 머리카락이 나를 보호하고 방어해주는 매개체였구나 싶었어요. 무의 상태로 살아보니까 가식이 없어졌어요. 사람들을 만날 때도 예전보다 덜 방어적이고 편해졌어요. 굳이 감추지 않게 되고 더 많이 자유로워졌어요.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서 성별을 숨기고 입대를 자원하는 학도병 역할을 맡았어요. 남자처럼 보여야 한다는 설정이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 같아요. 여자인데 남자인 척하는 게 아니라 본투비 남자처럼 보여야 했어요. 다른 전쟁 영화를 참고하며 남자들의 표정을 유심히 분석했어요. 일부러 얼굴 근육을 더 많이 써보기도 했고요. 촬영장에서도 일부러 더 열심히 놀았어요. 배우들과 서먹하면 촬영 자체가 힘들 것 같더라고요.

무엇을 하며 놀았어요? 컵 하나를 두고 솔방울을 줄기차게 던졌어요. 땅따먹기도 하고. 그 시대 아이들처럼 배우들끼리 진짜 놀았어요. 그러면서 서로 마음을 열고 엄청 친해졌죠.

곽경택 감독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오디션 볼 때 처음 뵈었어요. 감독님의 영화 중에 <똥개>의 대사를 준비해갔어요. 영화 속에서 엄지원 선배님이 정우성 선배에게 드세게 쏘아붙이는 장면이 있거든요.

어떤 대사인지 혹시 기억나요? 두 분이 투닥투닥 싸우는 장면인데, 이런 대사가 있어요. “가시나라고 부르지 마라 이 머시마야. 니 한 번만 더 가시나 소리 하면 사망이다.”

센 대사네요. 반응은 어땠나요? 앞에 있던 영화 관계자들이 어디에서 나온 대사냐고 궁금해했어요. 그러자 감독님이 이거 내 영화라고 똥개! 똥개! 외치며 웃었어요. 나중에 듣기로 예쁜 척하지 않는 모습이 맘에 드셨다고 하더라고요.

목소리도, 평소 입는 옷 스타일도 중성적인 느낌이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가죽 재킷, 크고 흰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다녔어요. <룩티크>라고 혹시 아세요? 스트리트 잡지인데 거기에 찍힌 사진 보면 다 그런 옷만 입고 있어요.

열여섯 살에 모델로 데뷔해서 사회생활이 빠른 편이었죠. 첫 월급을 모아서 산 옷이 있나요? 2012년 당시 알록달록하고 동그란 도트 간판이 튀어나온 ‘보이 플러스’라는 편집 숍이 있었어요. 이제 막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 정말 기본적인 검은색 롱 코트를 샀어요. 80만원 정도 했는데 엄청 큰 금액이었죠. 손을 덜덜덜 떨면서 결제했던 기억이 나요. 지금 봐도 예쁘고 아직까지 잘 입고 있어요. 10년, 20년 뒤에 입어도 어색하지 않을 옷이에요.

일하면서 꼭 지키려고 하는 신조 같은 것도 있어요? 뒷담화하지 않기. 사실 쉽지 않죠. 그래도 최대한 조심하려고 해요. 일을 일찍 시작해서 그런지 다른 사람에 대해 너무 말을 많이 하는 모습에 질려버렸어요. 어느 정도 초월하기도 했고요.

언제 행복하다고 느껴요? 친구들과 있을 때요. 그때 가장 저다운 모습이 나와요. 친구들이랑 집에서 음식 배달시켜서 먹고, 해 지는 거 보고, 그러다 아이스크림 또 먹고 그럴 때가 제일 행복하죠.

요즘도 사진 많이 찍나요? 친구들, 풍경, 일상, 이것 저것 열심히 찍어서 강화도에서 작은 사진 전시도 했잖아요. 사진을 보면 그때 그 순간, 공기까지 다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그래서 많이 찍고 막 찍고 자주 찍어요. 카메라 고장도 잘 나요. 최대 수명이 3개월 정도? 최근에는 콘탁스 T3로 바꿨어요. 5년 정도 필름 사진을 찍었는데 언젠가 저만 간직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어요.

앞으로 어떤 역할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다 해보고 싶어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그래도 굳이 꼽자면 귀엽고 풋풋한 로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