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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1 이제는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해"

2019.10.01GQ

“이제는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해. 전의 내 모습 천천히 바꿔가야 해.” 불투명한 목표에 밤잠을 설칠 때면 pH-1은 오래전 써내려간 노래를 꺼내 듣는다.

셔츠, 이스트쿤스트. 팬츠, 로렘입숨. 슈즈, 발렌시아가. 선글라스, 아크네 스튜디오. 버킷 햇은 스타일리스트의 것.

재킷과 팬츠, 모두 캘빈클라인 진, 슈즈, 요위. 비니, 노스 프로젝트.

가죽 재킷, 윈도우 00. 캡과 선글라스, 모두 프라다.

집업 재킷과 팬츠, 모두 로렘입숨. 페니 로퍼, 요위.

재킷과 팬츠, 모두 이스트쿤스트. 셔츠와 슈즈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평가와 반응에 민감해 댓글을 항상 모니터링한다고 들었다. 인터뷰에 대한 반응도 일일이 확인하나? 그러진 않는다. 말은 음악이 아니니까. 음악에 대한 피드백만 신경 쓴다. 그리고 이제껏 말하고 나서 후회한 적은 없다.

무슨 얘기를 해볼까? 글쎄다. 아티스트로서 느끼는 고민 같은 거? 요즘 나의 화두다.

그것부터 시작해볼까? 다음 단계에 대한 고민이다. 인지도가 어느 정도 되는데 여기서 더 올라가고 싶다. 그러려면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나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가 더 커질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정확히 어떤 방향이길래? 크게 두 가지다. 오롯이 음악에 집중하고 음악만으로 인정받는 아티스트가 되거나,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 음악 외적으로 대중과 가까운 아티스트가 되거나. 방향이 다를 뿐 무엇이 옳다 그르다 말하기 어렵다.

하이어뮤직 동료들과 함께한 유튜브 영상들을 보고 왔다. 예능이나 리얼리티 프로그램 같은 포맷도 있던데 해보니 어떤가? 재미는 있다. 사람들도 재밌게 봐주는 것 같고. 소속사와 개인 유튜브 채널을 논의하고 있는데 이것도 고민이다. 아티스트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작품을 냈을 때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근데 유튜브에서 우당탕 까불고 장난 치다가 멋진 음악을 낸다? 리스너들이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성향 중 많이 알려진 ‘주황색’, ‘집돌이’ 말고 음악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게 있나? 종종 하는 얘기인데, 시니컬한 면이 있다. 살면서 느끼는 괴리감이나 회의적인 감정을 가사에 풀기도 한다.

그런데 가사에 자극적인 표현이나 욕설을 넣진 않는다. 바르고 착한 래퍼라는 이미지를 깨고 싶은 마음도 있나? 전혀. 깰 필요도 없다. 나에겐 플러스 요소다. 실제로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봐주니 감사하다. 그보다는 순둥순둥하고 만만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게 싫다.

아티스트로서 이기적인 성향도 있을까? 경쟁심이 강하다. 동료와 친구들을 아끼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중요하다. 그들보다 멋있어야 하고 잘되어야 한다는 마인드가 마음속에 늘 있다. 지는 게 가장 싫다.

누구에게 가장 인정받고 싶나? 내가 리스펙하는 아티스트들. 늘 그래왔다. 아마추어나 실력 없는 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멋지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거기에는 하이어뮤직 동료들도 포함되겠지? 음악이란 공통분모가 아니더라도 잘 어울렸을까? 아마도 어렵지 않을까. 일단 나이차가 있고 음악 말고는 접점이 거의 없다. 라이프스타일도 굉장히 다르다. 다들 활동적이고 잘 노는 반면 나는 폐쇄적인 편이다. 사교성이 없진 않지만 사람 많은 자리를 꺼린다. 소수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마음 편하고 집에 있는 걸 좋아한다.

런 동료들 사이에서 어떤 포지션이라고 생각하나? 원하는 역할도 있을 텐데. 앞에 나서는 프런트맨보단 복병이랄까. 묵묵히 내 일을 하면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인 것 같다. 회사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라면 뭐든 열심히 하려고 한다. 유튜브 영상도 많이 찍고 싶지 않지만 회사를 위해 하는 거다.

박재범이 하이어뮤직을 구상할 때부터 pH-1을 염두에 뒀다고 들었다. 뭘 바라던가? 재범이 형은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하게끔 지원할 뿐,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이런 대화를 나누긴 했다. 내가 싱잉 스타일의 멜로디컬한 음악을 하니까 재범이 형이 “옛날처럼 랩을 세게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형한테 앞으로는 노래를 활용한 힙합이 트렌드가 될 거라고 했는데 요즘 <쇼미더머니>만 봐도 싱잉 랩을 하는 뮤지션이 많아졌다.

지금껏 해온 게 헛되진 않았구나 하는 기분이겠네. 그렇지. 내 생각이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안도감이 들진 않는다. 나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다. 남들 시선을 의식하고 스스로에 대한 평가도 짜다. 칭찬 백 개를 듣더라도 한 사람이 싫다고 하면 그것만 생각한다. 무대에서도 핸드폰을 만지거나 딴 짓을 하는 관객을 보면 ‘아, 나는 이들이 원하는 아티스트가 아니구나’라며 좌절한다.

듣기만 해도 피곤하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아무것도 못 한다.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런 무드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겠지? 그렇게 해서 나온 곡이 ‘비싸’, ‘DVD’다. 자존감 낮은 사람의 입장에서 가사를 썼다. 그 당시 유난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자신의 노래를 들으며 위로를 받기도 하나? ‘Christ’라는 곡이 있는데 지금 들어도 너무 좋다. 나의 힘든 처지와 그런 나를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 만들었다. 그때의 진심이 느껴져 위로가 된다.

올해 발표한 첫 정규 앨범 <HALO>에 대한 반응은 어떻게 받아들였나? 발매 2주 전부터 잠을 못 잤다. ‘사람들이 별로라고 하면 어쩌지?’, ‘창피해서 동료들을 어떻게 봐?’ 이런 생각뿐이었다. 근데 앨범이 나온 뒤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뮤지션들이 내 음악을 공유하거나 잘 듣고 있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때 자존감이 확 높아졌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는 앨범을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맘이 들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어떤 점에서? 내 좌우명이 ‘완벽함이라는 이상을 좇다가 매우 좋음을 놓치지 말자’다. 미국에서 IT 회사 다닐 때 상사가 알려준 말인데, 무슨 일이든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느끼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으면 결실 없이 계속 매달리게 된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정규 앨범을 다시 만든다 해도 똑같이 낼 것이다.

딱 2년만 음악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미국에서 한국에 온 것도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한다는 결단이었을까? 어려서부터 해온 음악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다른 진로를 택했지만 도저히 음악에 대한 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어차피 내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됐나? 2016년 9월 5일에 왔으니 3년을 꽉 채웠다.

그날 어땠나? 배웅을 나온 가족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꾹 참다가 공항 들어가서 터져버렸다. 앞날이 기대되면서 두렵기도 했고, 내 사람들과의 작별이 너무 괴로웠다. 한국에 도착해서는 길 잃은 아이 같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몰랐다.

여전히 한국은 낯선 곳인가? 많이 적응했지만 아직까지 내 집이라고 느껴지진 않는다. 집은 내가 사랑하는 공동체가 있는 곳인데 나만 똑 떼서 이곳에 내놓은 것 같다. 아무래도 한국에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한국 나이로 서른한 살인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마음을 깊게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게 어렵게 느껴진다.

귀 뒤의 ‘516’이란 타투는 롱아일랜드의 지역 번호를 새긴 거라고 들었다. 그곳에 대해 쓴 노래도 있나? EP 앨범 <The Island Kid>의 수록곡 ‘’15’에 가족과 미국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정규 앨범의 ‘Alright’에도 롱아일랜드에 대한 내용이 있다.

서울에 대한 노래도 있을까? 음, 서울이란 도시에 대해 쓴 건 아니지만 ‘Penthouse’를 꼽을 수 있다. 자기 꿈을 위해서 달려왔고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룬 사람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담았다.

pH-1도 그렇고 박준원이란 사람에겐 무엇이 가장 절실할까? 엄청나게 큰 행복. 음악적인 성과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어 불안하다. 반년, 일 년 뒤엔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도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다. 지금 행복한 가사를 쓰라고 하면 못 쓸 것 같다. 메마르고 쓸쓸한 감정을 많이 느낀다.

물론 소소하게 재미를 느끼는 건 있겠지? 테크에 관심이 많다. 신제품이 나오면 언박싱, 리뷰 영상을 쭉 찾아본다. 넷플릭스로 미드와 영화도 많이 보는데 한글 자막을 같이 본다. 사실 없어도 되지만 어떻게 번역했는지 비교한다. 어설픈 번역 때문에 작품성이나 재미를 깎아먹는 작품이 꽤 많다. 만약 나중에 음악을 그만두게 되면 영화 번역 작업을 한번 해보고 싶다.

아무래도 경험에서 가사가 나올 텐데 당장 해보고 싶은 게 있나? 여행을 하며 시야를 넓히고 싶다. 가끔 내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느껴진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만 갇혀 있다. 살면서 여행을 할 여력이 없었다. 상황도, 능력도 안 됐다. 지금은 혼자 여행을 못 가는 게 문제다. “재밌지?”, “맛있어?”하며 다른 사람과 공감을 주고받아야지, 혼자서는 재미를 못 느낀다.

그래서 제일 가고 싶은 여행지는? 유럽. 왠지 낭만적일 것 같고 다녀오면 쓸 수 있는 얘기가 더 생길 것 같다. 마침 맛보기로 유럽을 갈 기회가 생겼다. 재범이 형이 유럽에서 월드 투어를 하는데 같이 간다. 엄청 재밌을 것 같다. 혼자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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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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