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orial

마틴 로즈가 좋아하는 것

2019.10.22GQ

남성복을 만드는 마틴 로즈는 1990년대 런던의 광적인 레이브 파티와 레게 음악을 좋아하며 세상 무엇보다 가족을 사랑한다.

노스 런던 크라우치 힐에 있는 마틴 로즈의 스튜디오에서 오전 9시 반, 그녀를 만났다. 큰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한층 더 밝고 따뜻했다. 헐렁한 회색 그래픽 티셔츠에 물이 빠진 청바지를 입은 그녀가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상당히 과격한 런던 악센트. 하지만 그녀의 어법은 친근하고 소탈했다. 손엔 ‘MUM’이란 글자를 새긴 큼지막한 골드 링을 끼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직원들이 하나둘씩 들어왔고, 마틴은 그들을 ‘달링’이라 불렀다.

얼마 전 휴가를 다녀왔죠? 네. 한 달도 채 안 됐는데 벌써 몇 년 전 일 같아요. 기차를 타고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가서 일주일을 지냈어요. 그다음엔 배를 타고 코르시카섬으로 들어갔고요. 그곳에서 엄마, 아빠, 형제, 자매들을 만났어요. 물론 애들도 다 같이. 대가족이 움직였죠. 코르시카는 정말 궁금한 곳 중 하나였는데 기대만큼 만족스러웠어요. 지나치게 북적대지 않고, 무엇보다 풍경이 아름다웠어요.

당신의 옷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독특한 구석이 있어요. 청바지의 밑위 길이가 상당히 길고, 트러커 재킷은 곧 벗겨질 것처럼 어깨 라인을 뒤로 빼는 식이죠. 어떤 것에서 주로 영감을 얻나요? 늘 비슷한 주제에 빠져 있어요. 유스 컬처와 음악, 특히 성이나 인종에 대한 정치적 이슈에 관심이 많아요. ‘레지스탕스’라는 단어도 참 좋아하고요. 그렇다고 정치적 메시지를 강하게 내세우진 않지만.

좀 더 자세히 얘기해줄 수 있나요? 1990년대 런던의 서브 컬처와 음악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당시 런던은 지금과 아주 달랐어요. 버려진 빌딩이 많았고, 온통 회색빛이었죠. 중요한 건 그 아래에서 시작된 서브 컬처 신이에요. 솔 보이, 애시드 하우스, 레이브 파티 등. 퀴어 문화도 크게 발달했고요. 음악과 패션, 클럽, 매거진 등 문화적인 소스가 정말 풍부했어요. 저는 사촌들과 레이브 파티에 자주 갔고, 그 문화에 흠뻑 빠져 지냈죠. 인터넷, 스마트폰 같은 건 상상도 못 하던 시절, 오프라인에서 순수하게 형성된 런던 서브 컬처가 제 영감의 원천이에요.

레이브 파티가 정확히 뭐죠? 버려진 창고나 건물 같은 곳에서 밤새 음악을 틀고 무아지경에 빠져 춤을 추는 거예요. 밤에 공원에서 천막을 치고 하기도 하고, 클럽에서도 하죠. 주로 테크노 음악을 틀지만 사실 정해진 룰은 없어요. 각자가 도취되어 미친 듯이 흔들어댄다는 것이 포인트죠.

시끄러운 음악을 즐기나 봐요? 꼭 그렇진 않아요. 전 모든 음악을 좋아하거든요. 얼마 전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듀크 엘링턴의 로열 알버트 홀 콘서트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거기서 그가 이렇게 말해요. “세상엔 두 가지 음악이 있다.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 이 말에 누구보다 동의해요. 레이브 댄스, 레게, 솔, 펑크, 클래식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좋은 음악은 다 들어요.

옷을 만드는 과정은 어때요? 다른 디자이너들과는 좀 다를 것 같아서요. 좀 흔한 표현이지만 느낌 가는 대로 만들어요. 어떤 분야에 ‘꽂히면’ 시작인 거죠. 그때부터 저만의 리서치를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제가 느낀 감정이나 느낌을 이미지와 연결시켜요. 펜을 들고 스케치하기보단 옷이랑 같이 일하는 편이에요. 옷과 소통한다고 해야 하나. 빈티지 피스들을 모아서 옷의 구조를 바꿔보기도 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옷감을 잘라 붙여보기도 해요. 이런 과정에서 점점 테마가 뚜렷해져요. “이번 시즌의 주제는 ‘로커빌리’야!”라는 식으로 정하고 시작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제 방식이 아니에요.

처음 만든 옷 기억나요? 대학교에 다닐 때 과제로 만든 시퀸 드레스. 학기 중에 경연 대회가 있었거든요. 디바 여가수인 다이애나 로스가 ‘체인 리액션’으로 활동할 당시 입었던 피시 테일 드레스랑 비슷한 것이었죠. 그전엔 옷을 만들어본 적이 없어요. 내 옷은 내가 만들어 입겠다는 예민한 꼬마는 아니었거든요. 반면 제 사촌 동생인 프랭키와 올리버는 뭔가 만드는 걸 참 좋아했어요. 특히 올리버는 자기 여동생의 인형에게 입힐 옷들을 직접 만들어주곤 했어요. 전 옆에서 구경만 했고요. 그 애야말로 타고난 디자이너였죠. 솔직히 전 뭘 만드는 것 자체에 크게 흥미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패션 디자이너가 된 거예요? 패션에 관심이 생긴 건 어찌 보면 옷 자체보단 스타일 때문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음악이나 아트 신을 동경했어요. 사촌을 따라 레이브 파티에 자주 갔고요. 본격적으로 옷을 만들고 싶단 마음이 든 건 캠버웰 칼리지 오브 아트(Camberwell College of Art)의 파운데이션 프로그램(대학 전공 전 2년간 기초 교육을 거치는 영국의 교육 과정)이 끝난 다음부터예요. 열아홉, 스무살 쯤. 그 전까진 제가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맞아요. 처음부터 패션을 전공한 건 아니었죠? 네. 파운데이션 프로그램에서 조각을 공부했어요. 예전부터 어떤 폼을 만드는 것에 흥미가 있었거든요. 넓게 보면 옷도 어떤 폼의 하나잖아요. 재료와 방식이 다를 뿐.

왜 여성복이 아닌 남성복을 택했어요? 사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대런이 제겐 큰 인물이었어요. 레이브 뮤직과 춤의 세계로 저를 이끈 게 대런이거든요. 그가 놀러 나갈 때 입는 옷이나 스타일링이 정말 특별해 보였어요. 아름다움의 기준이 그때 생긴 것 같아요. 파티에 가면 여자들도 비슷한 옷을 입어요. 스포츠웨어, 편한 신발, 크롭트 톱 같은 것. 치장이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 문화를 즐기려는 옷이죠. 그러니 남성복을 택한 게 당연했죠. 후에 알게 된 점이지만 남성복에 룰이 많다는 것도 매력적이에요. 그만큼 틀을 깰 수 있는 여지가 크니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 타마라 로스테인과 ‘LMNOP’란 작은 레이블을 만들었는데, 이때도 초점은 남성복이었어요. 여자가 입어도 좋은 남자 블레이저와 진 같은 걸 주로 소개했거든요.

마틴 로즈의 시작은 어땠나요? ‘LMNOP’를 하면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죠. 결국 해결하지 못했고요. 그래서 제 이름을 딴 브랜드를 시작할 땐 딱 셔츠 10장만 만들었어요. 돈이 부족했거든요. 셔츠 시리즈로 몇 시즌이 잘 흘러가면 그때 좀 더 범위를 넓히자고 생각했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즌이 있어요? 2014 F/W 시즌이에요. 이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마침내 저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했거든요. 저는 뭔가 어긋난 듯한 느낌, 어색하고 낯설고, 심지어 피팅이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실루엣을 좋아해요. 고전적인 남성복에 이런 독특한 시각을 투영해 어떤 부분을 툭 무너뜨리는 거죠. 여전히 그 컬렉션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새로운 시즌의 디테일에 적용하기도 해요.

어떤 옷들이 있었죠? 레이-백 실루엣의 트러커 재킷, 그래픽 패치워크 셔츠, 구조를 뒤틀어버린 트랙 팬츠, 와이드 팬츠 같은 것. 애시드 하우스의 루즈-핏 룩에 디스코 신의 반짝거리는 소재를 섞었고, 클럽과 레이브 파티의 전단지, 포스터 그래픽을 곳곳에 활용했어요. 그러고 보니 오버사이즈 와이드 팬츠는 2013 S/S 시즌에 처음 선보였네요. 업계의 평은 좋았는데 진짜 안 팔렸어요. 하하.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실루엣이라 계속 재가공하고 있죠.

뎀나 바잘리아와 버질 아블로가 당신의 팬이라고 들었어요. 특히 뎀나 바잘리아와는 발렌시아가에서 같이 일했죠? 원래 친한 사이예요? 아니요. 전혀 모르는 사이였어요. 그가 제 컬렉션이 좋다며 먼저 만나자고 연락했어요. 뎀나가 발렌시아가의 디자인을 맡게 된 시기였죠. 같이 커피를 마셨는데, 정말 잘 통하더군요. 아름다움에 대한 시각이 비슷했고, 저의 비전을 존중해줬어요. 대화의 마지막에 그가 발렌시아가의 남성복 라인을 다시 구성한다며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죠. 당시 개인적으로 제 형편이 좋지 않았어요. 첫아이를 막 낳았고,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죠. 그는 당연히 그런 것까지 알진 못했어요. 고민을 좀 하다가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파리로 이사할 수는 없고, 외부에서 컨설팅만 하기로 했죠.

지금은 하지 않죠? 네. 제 레이블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서 그만뒀어요. 3년간 많은 걸 배웠어요. 특히 자신감을 크게 얻었죠. 뎀나가 제 옷이 마음에 들어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했어요. 그의 제안이 없었다면 발렌시아가 같은 큰 브랜드에서 일할 수 없었을 거예요. 다른 하나는 여러 사람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익혔다는 것. 늘 혼자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다가 어떤 시스템 안에 들어간 건 처음이었거든요. 이 프로세스를 덩치가 커진 마틴 로즈에 적용할 수도 있고요.

2020년 S/S 시즌 쇼엔 모델들에게 인위적인 가발을 씌웠더군요. 심지어 어떤 모델에겐 두 개의 가발을 레이어링했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캐릭터 만드는 걸 즐겨요. 그런 면에서 가발은 아주 드라마틱하고 유용한 소품이죠. 가발을 활용한 건 비단 그 쇼만이 아니에요. 여러 시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썼어요. 얼굴 반쪽을 가린 적도 있고, 얼굴을 아예 머리카락으로 가린 적도 있어요. 헤어만 바꿔도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되잖아요. 그런 게 흥미로워요.

2019 F/W

마틴 로즈가 그리는 매력적인 남자는 어떤 캐릭터예요? 섹시한 남자. 하하. 근데 보편적인 이미지와는 다를 거예요. 저는 여성용 톱을 딱 붙게 입고 거기에 하이 웨이스트 데님을 매치한 남자가 정말 섹시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당신이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가 궁금해요. 영화를 너무 좋아해요. 어떤 걸 두고두고 꺼내보기보단 새로운 것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 개봉을 앞둔 <조커>를 매우 기대하고 있어요. 최근에 본 것 중 기억에 남는 건 . 제 친구가 제작자라 시사회에 초대받았거든요. 동료 디자이너인 샤우니의 친구들이 영화에 출연하는데, 정말 레이브를 해요.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요. 주인공 남자도 너무 매력적이고요. 정말 흥미로운 영화니까 꼭 보세요. 한국에 개봉한다면요. 아, 얼마 전엔 아레사 프랭클린의 생애를 다룬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봤어요. 내내 눈물을 훔치면서요.

음악에 정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스튜디오로 오는 길엔 어떤 음악을 들었어요? 코피(Koffee)의 ‘Toast’라는 노래. 코피는 자메이카의 여가수이자 래퍼인데 나이가 열아홉 살밖에 안 돼요. 음악의 멜로디가 너무 좋고, 가사 내용도 훌륭해요. 감사를 주제로 한 내용인데 그녀가 직접 썼다더군요. 한번 듣기 시작하면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요.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있어요? 마음의 평화가 필요할 때 가는 곳. 전 육아나 일 같은 일상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고 싶다는 감정이 별로 없어요. 그렇다고 휴가까지 반납하며 일만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삶이 좋아요. 스스로를 엄청나게 소모하고 있거나 무엇에 시달린다는 느낌이 없거든요. 많은 사람이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데, 저는 딱히 그런 성격이 아닌가 봐요. 지금 제가 있는 곳이 가장 편안하고 안정적이에요.

요리를 잘해요? 어떤 음식을 좋아해요? 못 먹는 음식은 없어요. 골라 먹는 타입은 전혀 아니에요. 요리하는 걸 정말 좋아하지만 아이가 있으면 사실 컨트롤이 힘들어요. 아이들이 아무거나 안 먹을 것 같죠? 천만의 말씀이에요.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나 손에 닿는 건 다 입에 넣고 우물거리죠.

아이들이 어리죠? 컬렉션 피날레에 아기를 안고 나온 걸 봤어요. 네. 큰아이는 네 살, 작은 아이는 두 살이에요. 어쨌든 이 사랑스러운 요물들이 집 안에 있는 이상 요리는 마음대로 하지 못해요. 예전처럼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요. 전엔 음식이나 메뉴에 관해 모험심이 가득했거든요. 얘기하다 보니 스스로에게 좀 실망스러워요. 스시 같은 일본 요리는 어렵지 않게 제가 직접 만들어줄 수 있는데 안 하니까요. 조만간 해봐야겠어요.

당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예요? 가족들요.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다 같이 지낸 기억밖에 없어요. 주말마다 할머니 집에 가서 사촌들과 삼촌, 고모와 어울렸죠. 아까 말했던 대런 같은 사촌들이 제게 큰 영향을 줬지만 삼촌이나 고모도 빼놓을 수 없어요. 아기를 일찍 낳아서 제가 어렸을 때 그들 역시 꽤 젊은 편이었고, 같이 자주 나가 놀았거든요. 같이 파티에도 많이 다녔어요. 늘 대가족에 둘러싸여 살아서 그런지 엄마로서의 삶도 그리 어렵지 않아요. 커리어와의 밸런스를 잡기도 쉽고요.

자, 그럼 마지막으로 심오한 질문 하나 던질게요. 당신은 왜 옷을 디자인하나요? 옷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에요. 정치색도 나타낼 수 있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을 수도 있죠. 사람들이 입는 옷을 통해 그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기도 하잖아요. 이런 모든 요소가 참 매력적이에요. 제가 만든 옷이 특정 시대의 지표가 된다면 그만큼 멋진 일이 또 있을까요? 말하고 나니 좀 거창하네요. 작게는 어떤 사람이 자신을 표현하는 과정에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래서 전 완성이 덜 된 듯한 옷을 만들어요. 옷에 주인이 들어갈 틈이 있잖아요. 그런 요소가 옷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 같아요.

2014 F/W

    에디터
    안주현, 권진혁
    특파원
    Florie Har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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