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지금 이 전시

2019.10.23GQ

멈춰 서게 만들고, 소리 없이 말을 걸어오고, 두 눈과 귀를 열게 한다. 익숙한 현실을 뚫고 다시 들여다보며 사유하고 싶은 어떤 세계.

공교롭게 궤를 같이하는 일들이 있다. 요즘에는 안무가와 가까이 지낸다. 한국무용을 전공하던 그가 1990년대 말 홍대 클럽 스카의 문을 열고 들어가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던 때의 모습을 이따금 상상해보곤 한다. 그곳에 출근하듯 드나들던 그는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지는 않았다고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무용 연습을 하고, 자기 전에도 머릿속으로 안무를 복기하던 그가 클럽 음악에 춤을 추기까지는 어떤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음악을 몸으로 듣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요즘 다시 되묻고 있다. ‘음악을 몸으로 듣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 질문은 다시 내게 ‘음악적 경험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것으로 치환되었다. 안무가가 음악을 몸으로 듣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을 눈으로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천 가좌동, 무려 2만 평의 대지에 45동의 공장을 갖고 있던 코스모화학이 이사를 가자 공장 건물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중 남아 있던 40동 한 곳을 재생 건축한 곳이 바로 코스모40이다. ‘경계 없는 영감의 공간’을 지향하는 이곳 코스모40에서 국내의 오디오 비주얼 아티스트를 다각도로 조망하는 <노 라이브 No Live>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전시 언어를 사랑하지만 전시만큼 어떤 역동성을 탈각시키거나, ‘문학적 순간’을 놓치기 쉬운 장르도 없다. 그러나 주변에서 손꼽는 ‘전시사람’ 신은진 큐레이터의 접근은 역시 좀 달랐다. 이 전시는 크게 몇 가지 카테고리로 구분된다. 국내 오디오 비주얼 아트 신의 개척자로 활동해온 태싯그룹의 2008~2019년을 조망하는 <Tacit Group: Anthology>, Damie, 신혜진, L.F.O 등 주로 남성들에 의해 점유되었던 언더그라운드 컬처와 사운드 신에서 독자적인 행보를 밟고 있는 11명의 여성 뮤지션을 소개하는 <Noisy Women>, 창작자와 관객을 ‘스냅’으로 포착한 리플렉타의 사진을 볼 수 있는 <Reflecta: Sound of Seoul>, Ivaaiu City, 박천욱 등 공간과 조응하며 저마다의 개념적 접근을 구축한 라이트닝 인스톨레이션 작품을 볼 수 있는 <Bulb>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 전시는 사운드-비주얼 사이의 관계와 그것을 향유하는 다른 창작자와 관객까지를 다루며 사운드 아트 신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일전에 ‘삶것’ 건축사사무소의 양수인 소장이 코스모40의 설계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만의 ‘건축적 순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기존 옛 공장 건물의 기둥이 심겨진 바닥 면에 새로 생겨나는 건물의 기둥이 함께 꽂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건축적 순간’은 현실화되지 못하고 안전 문제로 인해 증축한 바닥면에 새로운 기둥을 심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건축적 순간’이 바뀌는 건 아니다. 한국무용으로 트레이닝된 안무가의 몸이 경험한 ‘음악적 순간’이 끊임없이 바뀌는 스스로의 몸을 통해 재구축되듯, 어떠한 신을 형성한 오디오 비주얼의 흐름과 유동성이 전시장 안에서 재구성되는 ‘시각적 순간’ 또한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과 공간의 내력이 음악적 경험으로 다가가게 하는 순간이 된다는 사실이야말로 내게 ‘문학적 순간’이 된다. 박수지(큐레이터)

2019년은 네덜란드 작가 어윈 올라프에게 특별한 해다. 네덜란드 곳곳에서 그의 60번째 생일을 기념한 전시가 진행 중이다. 특히 네덜란드 국립미술관에서는 9월 말까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 거장들의 작품과 함께 올라프의 사진이 전시된다. 올라프가 빛을 다뤘던 렘브란트와 베르메르 같은 작가들을 잇고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셈이다. 올라프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몇 년 전, 해외 아트 페어에서였다. 무수하고 화려한 작가들의 작품들 사이에서 <The Room(2004)> 연작 중 하나인 <The Boardroom>이 계속 눈에 밟혔다. 에드워드 호퍼의 명작 <Office at Night>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호퍼의 작품처럼 발설되지 않은 여러 감정이 쌓인 순간을 묘사하고 있었다. 올라프의 작품 속 인물들은 주로 복합적인 감정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감정은 그가 구현한 디테일의 완벽한 컨트롤로 표현된다. 작가는 이를 ‘감정의 안무’ 작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원래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행복이란 감정을 전하고자 했던 올라프는 2011년 9·11 테러 이후 정지해버린 시간의 공허함을 강하게 느끼고 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많은 현대미술 작가가 고전 회화에서 레퍼런스를 찾아 작업을 이어오고 있지만, 올라프는 다른 사진작가보다 더욱 회화적인 요소를 선명하게 전달한다. 그건 마치 네덜란드의 고전 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그의 작품이 가진 선명한 색채감과, 빛과 색의 대조를 통한 명암 처리 등 완벽한 구성 요소 배치가 회화적인 전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올라프는 정교하게 연출된 실내와 인물로 고전 회화에 버금가는 구성과 디테일을 추구한다. 그는 네덜란드 고전 회화, 바로크나 벨 에포크의 예술과 디자인, 할리우드 영화, 19세기 초기 사진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인용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시각적 보석’이라 평가되기까지 한 독창적인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사실 그의 회화적인 사진은 완벽한 구성을 통해 동시대의 내러티브를 전달한다. 10월 6일까지 공근혜 갤러리에서 열리는 어윈 올라프의 <팜 스프링스 Palm Springs>전은 대도시의 변화를 담은 로케이션 시리즈 <베를린(2012)>과 <상하이(2017)>에 이은 도시 풍경 연작의 제목이다. 올라프의 <팜 스프링스> 연작은 유명 브랜드의 화보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더군다나 주로 실내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작업했던 그의 전작과는 달리 밖으로 향한 <팜 스프링스> 연작은 미국 문화와 건축 그리고 와일드한 미국 서부 특유의 풍경이 더해져 더 규모가 커졌다. 미국 자연이 가진 광활함 속에 배치된 인물들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그러나 올라프는 그의 행보가 그러했듯, 표면적으로 완벽한 천국과 같은 팜 스프링스를 배경으로 삼아, 인종 차별과 종교적 학대, 부의 양극화와 같은 정치적 갈등이 초래하는 사회적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더불어 인공적인 지상낙원에 내포된 균열과 불일치,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실제로 완벽해 보이는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작가가 담은 ‘완벽한 세계가 내포하고 있는 균열 찾기’는 관객으로서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황유경(미술 칼럼니스트)

초가을의 태풍을 뚫고 가서 볼 정도로 마음이 기운 전시가 있다. 금호미술관 개관 30주년과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 기념으로 열린 <바우하우스와 현대 생활>전이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부터 약 14년 동안 독일에서 지속됐던 예술학교로 세계 최초의 디자인 교육 기관으로 산업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미적 형식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나치 세력의 확대로 1933년 폐교했지만 이후 세계 각지로 망명하거나 이주한 바우하우스의 예술가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바우하우스 이념을 계승해 나갔다. 이 전시는 ‘바.우.하.우.스’라는 다섯 글자만으로도 사람들에게 큰 신뢰감을 준다. 한편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다. 바우하우스에는 의외로 많은 여성 아티스트가 존재했다. 실제로 바우하우스가 문을 연 1919년 여름 학기는 남학생 79명, 여학생 84명이었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대부분 직조공방 쪽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우하우스는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제품과 디자인을 판매함으로써 학교 재정을 공공 보조금의 의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는데, 여러 공방 중 한동안 가장 많은 수익을 창출한 곳이 바로 직조 공방이었다. 그녀들은 미술사적으로 아직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 전시에서 바우하우스의 여성 아티스트들의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남학생들이 주를 이루던 금속 공방에서 가장 잘나가는 제품 디자이너였던 아티스트가 바로 마리안느 브랜트다. 도형의 기하학적 비율들을 조화롭게 활용한 그녀의 소품들은 1930년대에 만들어져 대중에게 판매되었다. 전시장에서 그녀가 만든 냅킨 홀더와 재떨이를 지나치지 말길. 또한 샬로트 페리앙이 만든 맞춤형 주방을 볼 수 있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주방에서 요리가 완성되면 작은 미닫이 형식의 문을 열고 그 음식을 가족들에게 바로 전달할 수 있는 형태로 완성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나무 끝 모서리는 둥글게 닳았지만 특유의 가족적인 디자인은 여전하다. 그녀의 인테리어 파트너는 세기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였다. 바우하우스에 대해 전혀 몰라도 겁낼 것 없다. 친절하게도 전시장 입구에 대표적인 9명의 아티스트에 대한 간략한 카드가 배치되어 있다. 얇고 긴 이 카드를 한 장씩 뽑아 들고 전시를 본다면 아주 요긴한 내비게이션이 될 것이다. 이소영(소통하는 그림연구소 & 빅피쉬 아트 대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애쓰던 라이카의 심장 박동 수가 무중력 상태에서 안정을 되찾은 짧은 순간, 라이카는 대기권 밖에서 지구와 별들을 바라보았다. 초속 8킬로미터의 속도로 어둠을 가로지르며, 이제 이 개는 고요한 우주에 홀로 떠오른다. 누구에게라도 낯설 교교한 풍경, 시각과 후각, 청각으로 감지했던 자신의 좌표가 사라진 이 세계에서 느꼈을 절대 고독을 인간인 우리는 헤아릴 수 있을까? 감히 나는 이 전시장에 서서 그 고독을 상상해본다.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난민들처럼, 쓰나미를 마주한 무기력한 문명처럼, 아무도 읽지 못할 모스 부호를 타전하는 우주선처럼 소멸 이전의 고독을, 그리고 이 상상의 자리에는 연민과 비애가 동석한다.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든 이 자리, 혹은 저 자리에 서게 될 수 있기에, 이 모든 자리는 개인적이면서도 복수적이며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이다. 페리지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최대진 작가의 개인전 <개의 자리>는 우리가 내몰려서 서게 될지 모를 다양한 자리에 대한 변주이며, 그 사건들의 의미를, 절망적인 반복성의 이유를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하려는 시도다. 최대진의 열 점의 드로잉은 버려진 우주선 발사 구역처럼 쓸쓸하고 황량한 전시장에 걸려 있다. 입구에서 시선을 가로막는 나무 구조물을 지나면, 그 뒤로 중앙에 자리 잡은 비계에 별 다른 시간적, 공간적 개연성 없이 이 전시 공간으로 호출된 세 점의 조형물이 보인다. 하지만 아예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니, 세 작품 모두 막다른 길에 몰린 절망적이고 고독한 봉기와 흡사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이런 예술적인 호전성을 좋아한다. 그는 오랜 응시와 성찰을 제안하기보다 의심과 불확실을, 불온함과 직감을, 찬란한 날보다는 치욕적인 실패를 제시한다. 결국 최대진이 그려내는 것은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쩌면 우리 “역사의 절망적인 연대기”일지 모른다. 수많은 생명과 라이카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우주에 더 가까워졌는지 몰라도, 이곳은 여전히 유토피아가 아니며 우리는 적당히 자전과 공전을 반복할 뿐이다. 나는 희미하게 밤벌레 소리가 들리는 전시장에 서서 긴 서사시의 시작을 알리는 일리아드의 첫 문장을 모스 부호로 타전 받으며 리베카 솔닛의 이 문장을 떠올린다. “하나의 장소가 곧 하나의 이야기이며, 이야기는 지형을 이루고, 감정이입은 그 안에서 상상하는 행위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타자의 자리에 서서 그 타자에게 도래하는 고통을 그들이 홀로 고독하지 않도록 함께 살아내는 것, 이를 공감하고 연민하는 상상력, 그리고 다시는 그 자리로 그와 그들을 내모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동요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구 궤도를 돌던 스푸트니크 2호는 오래전 심장이 뛰기를 멈춘 라이카를 태운 채 2천5백여 바퀴의 어느 시점에서 대기권에 재돌입해 유성처럼 지구에 흩뿌려졌다. 하얗게 빛을 내며 떨어진 조각난 선체나 라이카 중 지상에 닿은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가장 높이 나는 철새들이 지구에서 가장 먼저, 어쩌면 유일하게 라이카를 반겨주었다. 1958년 4월 14일, 우주만큼의 고독이 축복처럼 지구에 내려앉았다. 강영희(보안책방 운영자)

    에디터
    김영재
    포토그래퍼
    설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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