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계의 큰손이 들려준 엄청난 이야기 | 지큐 코리아 (GQ Korea)

현대 미술계의 큰손이 들려준 엄청난 이야기

2019-11-25T15:36:19+00:00 |interview|

가고시안 갤러리의 대표이자 현대 미술계의 큰손, 래리 가고시안이 들려준 엄청난 것들.

<포브스>지에 따르면 당신이 미술계 최초의 억만장자 딜러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진실과 상관없이 내겐 과분한 칭호다.

당신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면서 여전히 재미를 좇는 사람처럼 보인다. 사는 게 재미없어서 그렇다. 일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아야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훌륭한 아트 딜러의 역량은? 열정, 집중력, 근면함, 적절한 안목을 말할 수 있다. 또 경쟁 본능을 가져야 한다. 모든 비즈니스는 경쟁을 전제로 한다. 만약 치열하지 않은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면, 그 분야는 곧 망한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래리 가고시안의 하루 일과는? 굉장히 지루하다. 오전 8시, 9시 사이에 일어나서 뉴스 채널인 CNN과 경제 전문 채널인 CNBC를 시청하면서 신문을 훑어본다. 그다음 홍콩 갤러리에 전화를 걸어 그들을 귀찮게 한다. 유럽의 갤러리들도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시각이라 전화를 돌리고 이메일 회신도 한다. 이 일을 다 마치면 물을 데워 커피를 내려 마시고 운동을 하러 헬스장으로 향한다.

호사가들은 당신의 유산에 대한 관심이 크다. 자녀가 없으니 누가 상속을 받을지 궁금해한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비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살면서 아이를 갖고 싶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래 전 주차장에서 포스터를 팔았던 시절부터 내 이름의 갤러리를 열 때까지 사업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또 내가 원하면 언제나, 어느 곳이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잃고 싶지 않다.

결혼을 한 번 했다면서. 프러포즈는 어떻게 했나? 스무 살 때 저지른 일이라 함께 살아달라는 제안이었는지 유괴였는지 헷갈린다.

그럼 결혼식은 어디서? 라스베이거스였다. 예배당이 문을 열기도 전에 도착한 뒤 건너편에 위치한 수영장에서 해가 뜰 때까지 수영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예배당에 입장했을 땐 별로 로맨틱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삶을 몇 개의 챕터로 나눈다면? 여성 로커 제니스 조플린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는데 그녀의 답변이 진짜 멋지다. “어제도 내일도 없다. 단지 오늘 하루만 산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오래전 수영장 인명구조요원으로 일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UCLA 재학 시절 수영을 하면서 안전요원을 겸했다. 서핑도 즐겼는데 마지막 서핑은 화가이자 영화감독인 줄리언 슈나벨과 함께 했다.

1960년대 후반의 당신도 히피 기질이 다분했나? 히피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대마초를 잔뜩 피우고 머리를 제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부류라면, 맞다. 나도 히피였다.

텐트나 거리 생활을 한 경험은? LA 베니스 비치에 있던 어느 집의 벽장을 빌려 생활한 적이 있다. 월세는 20달러였다.

20세기의 전설적인 아트 딜러로 칭송받는 레오 카스텔리와의 관계는? 현대 미술계의 거대한 영향력 그 자체였던 레오는 나를 위해 많은 문을 열어줬다. 이를테면, 맨해튼 소호 지역을 걷다가 만난 그는 내게 사업가이자 미디어계의 거물인 새무얼 어빙 뉴하우스를 소개해줬고, 그의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 레오와 달리 요즘 딜러들에게선 동료 의식을 찾아볼 수 없어 씁쓸하다.

앤디 워홀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1978년으로 기억한다. 가수 프레드 휴즈가 나를 그의 작업실로 데려갔다.

당신이 기획한 최초의 앤디 워홀 전시는? 프레드와 함께 앤디의 작업실에서 점심을 먹다가 플라스틱에 싸여 있는 몇 개의 그림을 발견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색의 뭔가가 덧칠된 작품이었는데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게 바로 앤디가 캔버스에 금속성 물감을 칠한 후 오줌을 갈겨 완성한 ‘산화’ 페인팅이었다. 곧바로 우리는 전시를 진행했고 오줌 그림들을 모두 팔아치웠다.

추상표현주의 작가인 사이 톰블리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를 말한다면? 그는 유머 감각이 무척 뛰어났고 가십거리를 좋아했다. 비행기를 탈 때면 여러 권의 잡지를 챙겨갔는데 <아트포럼>과 <뉴요커> 사이에 타블로이드 잡지인 <내셔널 인콰이어러>가 끼어 있었다.

절친한 사이인 코미디언 스티븐 마틴과의 에피소드는? 스티븐이 LA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미니멀리즘으로 유명한 엘스워스 켈리의 작품이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2개의 이미지가 한 쌍을 이룬 것으로 이를 본 스티븐이 대뜸 농담을 했다. “이런 종류의 그림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쌍둥이 빌딩!” 스티븐은 웃음을 터뜨리며 사무실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가 뛰어난 슬랩스틱 코미디언이란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당신의 초상화를 여러 작가가 그렸다고 들었다. 누구인가?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살을 빼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엘리자베스 페이튼이 그린 그림은 뉴욕의 투 팜스 갤러리에서 몇 장을 프린트해갔다. 1985년에 장 미셸 바스키아가 전신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당시에는 그다지 잘 그린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그 그림을 판매했는데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는지 아직도 후회한다.

제일 좋아하는 19세기 이전의 화가가 있나? 있다면 이유는? 카라바조. 수염이 마음에 든다.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앤디 워홀의 뒤를 이을 작가를 꼽는다면?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작품이 탄생하고 50년이 지나기 전에는 그것이 걸작인지 알 수 없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주장에 동의하나? 시대적 취향은 변하기 마련이다. 콘라드 마르카 랠리라는 이름을 들어봤나? 아마 없을 거다. 1950년대에 거의 모든 미술관이 열광했던 작가다. 이게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답이다.

성공을 거둔 예술가에게 가장 큰 위험 요소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예술가가 상업적 압박에 떠밀려 작품을 찍어내듯 만드는 경우가 있다. 피카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뉴욕의 메이저 갤러리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앞둔 그는 새로 그린 작품들을 선박으로 배송했다. 그림들을 확인한 갤러리는 크게 실망했고 그에게 “미국에서 열리는 당신의 첫 전시에서 이 그림들을 공개하기 어렵다”는 편지를 썼다. 어떻게 됐을까? 천하의 피카소도 다시 작업을 해야 했다. 소설가에게 편집자가 있고, 음악가에게 프로듀서가 있듯이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 하더라도 피드백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경매가 미술계에 끼치는 영향은 뭐라 생각하나? 딜러의 입장에서 말하면 경매는 필요악이다. 미술 시장을 키우고 활기를 불어넣지만, 판매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문이 드는 작품도 많다.

현대 미술에서 유머와 미적인 감각 중 무엇이 더 중요한 요소일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헨리 겔트잘러가 바스키아를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의 마지막 부분을 잊지 못한다. 겔트잘러는 바스키아에게 “당신의 작품에는 분노가 잔뜩 담겨 있으면서 유머가 공존한다”고 말했고, 이에 바스키아는 “사람들은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비로소 웃음을 터뜨린다”고 답했다. 아름다움을 목표로 한 작업은 결코 대단한 작품이 되지 못한다. 미적인 가치는 작업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되기 마련이다.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특별한 작품은? 내가 소유하길 원하는 작품들을 판매하기 때문에 굉장히 많다. 그것들을 내놓으면서 괴롭진 않았다. 갖고 싶다고 다 가질 수는 없으니까.

애착을 느끼는 미술관은? 3년간의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2016년 재개관한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정말 멋진 곳이다. 그렇지만 가장 사랑하는 곳은 여전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다. 시설은 불편하지만 그 안에서 길을 잃고 서너 시간을 보내는 건 오후를 보내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다.

제프 쿤스가 제일 좋아하는 숫자는 무한대라고 한다. 당신은? 남들처럼 내게도 7이 행운의 숫자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다가 다리가 풀리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스탕달 증후군을 겪은 적이 있나? 없다.

살면서 거의 죽을 뻔했던 경험은? 런던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다가 충분히 씹지 않고 삼켜 기도가 막혔다. 다행히 맞은편 테이블의 남자가 컥컥거리는 나를 발견하고 재빠르게 하임리히 요법으로 응급처치를 했다. 몇 차례 복부를 압박한 끝에 스테이크 조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목숨을 구해준 남자에게 어떻게 보답을 했나? 미술품 할인이라든가. 와인 한 상자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