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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권의 책과 열 개의 향

2019.11.25GQ

깊어가는 가을밤을 위한 열 권의 책과 열 개의 향.

블랙 오드 인센스 스틱, 황동 인센스 홀더, 모두 아포데케 at 바시몽트.

<뱀과 물> 배수아
먼 꿈에서 부르는 소리를 따라가면, 오래도록 살아온 내가 태어나지 않은 나를 만나는 순간이 있고, 방문자와 주인이 치환되는 세계가 있으며, 뱀과 물이 있다. 관능적이고 기이한 것 간의 이상한 만남. “이 비밀스러운 결속이 나는 기쁘다.” 꿈과 시공간을 이어가는 배수아의 소설은 끊임없는 데자뷔 같다. 이 불가해한 세계 속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 이미 본 것을 다르게 만나는 기시감, 오인 혹은 착각에 대해 해명하지 않음으로 이루어진 길고 긴 노래가 있다. 듣기를 그만둔다 하여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글은 끝나도 끝나지 않고 꿈 너머에 영속적으로 펼쳐져 있을 것만 같다. 아포데케의 블랙 오드 인센스 스틱을 피운다. 배수아의 목소리는 이런 검은 침향에 가깝다. 침향나무는 외부에서 해충이 침입하거나 상처를 입으면 검은 진액을 분비한다. 이 진액은 수백, 수천 년 동안 굳어져 침향이 된다. 중국에서는 불로장생의 묘약이라 믿었고, 인도의 고대 의학자 스슈르타는 외상을 치료할 때 침향을 피웠다. 침향엔 신경을 이완시키는 아가스피롤 성분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잊도록 향을 피웠으리라. 불에 태우면 쓰고 진득한 송진 냄새가 감돌고, 시간이 흐르면 달콤한 베갯잇 같은 향기가 올라온다. 꿈에서 깨도 여전히 꿈인 꿈에서 깬 아침처럼.

후고, 씨흐트루동.

<이민자들> W.G.제발트
누구에게나 각자의 영혼이 돌아가야만 할 집이 있다면, 그곳은 어디인가. W.G. 제발트의 <이민자들>은 고향을 타의적으로 혹은 자의적으로 떠나야 했거나 떠나지 못한 이민자들의 삶을 그린다. 영국에 이주해 정체를 숨기고 살아온 동유럽계 유대인 쎌윈 박사, 유대인으로서 독일을 떠나왔으나 끝내 고향을 등질 수 없었던 파울, 미국으로 이주한 동성애자 아델바르트, 학살을 피해 이민자의 항구 도시 맨체스터에 자리를 잡은 화가 페르버. 제발트 그 자신으로 보이는 화자는 이민자들의 삶을 파고들며 화자와 등장인물 간 경계를 넘나들고, 생애사에 가깝도록 내밀한 이야기를 끈질기고 섬세하게 펼쳐놓는다. 이방인의 단단한 삶 속에서 외로움이 먹처럼 배어나올 때까지. <이민자들>을 보며 씨흐트루동의 후고에 불을 붙인다. 이 향초의 주원료인 용연향은 향유고래의 창자에서 생성되는 물질로, 고래의 몸에서 배출되어 바다 위를 오래도록 떠다니다 해안가로 떠밀려와 발견된다. 바다를 오래 떠다닐수록 빛과 소금을 머금어 단단해지며 향이 좋고, 신사적이며 씁쓸한 단내를 풍긴다. 그 자체로도 그윽한 향을 내지만, 다른 향료와 섞이면 그 향을 붙잡아 영속적인 향기를 낼 수 있다. 세계를 떠돌며 다만 광막한 자연 앞에서 느꼈을 경외심, 허무, 그리고 사랑 앞에서도 이방인이었던 아델바르트를 생각한다. 수트에 보타이, 구두까지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신은 채 마지막을 맞이했던 그에게선 꼭 이런 향이 났을 것이다.

튜베로즈 캔들, 프레데릭 말.

<드러누운 밤> 훌리오 코르타사르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문장은 주술사의 언어 같다. 목구멍에서 토끼를 뱉고, 물고기와 화자가 뒤바뀌고,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해 집이 점거당하며, 한 남자는 까무룩 잠들 때마다 아즈텍 문명의 식인 제의 희생양이 되어 돌칼에 심장이 도려내진다.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 특유의 원초적 관능과 낯선 공포가 뒤섞인 <드러누운 밤>은 환상을 밀어붙여 진짜로 만들어내고 마는 기묘한 책이다. 화자가 멕시코 산초어인 아숄로뜰이 광물적 혼수 상태 속 의식이 예속된 존재라는 상상을 펼치다 그 자신이 아숄로뜰이 되어버리는 형형한 박력에는, 어떤 독자도 속절없이 작가가 바꿔치기한 자리에 놓일 수밖에 없다. 드러누운 밤, 프레데릭 말의 튜베로즈 향초에 불을 붙인다. 멕시코가 원산지인 튜베로즈는 화려한 향기를 뿜는다. 이 꽃은 오직 밤에만 향기를 발산하기 때문에 월하향이라고도 불린다. 확산력이 좋아 불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울 만큼 화사한 향기로 가득 찬다.

진저 인센스 스틱, 황동 인센스 홀더, 모두 프리드.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이제니
“눈물 다음에 너울이 온다 너울 다음에 하늘이 있고/하늘 너머로 얼굴이 있다 얼굴 사이로 바람이 오고/(…)/눈물 다음에 너울이 있어 너울 너머로 노을이 진다.” (<너울과 노을> 중.) 이제니의 시를 읽고 있으면 생강 설탕 절임을 씹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언어의 리듬감, 운동성, 연결과 상승. 입에 잔뜩 침이 고인 채, 꼴딱 삼키기 전까지 계속 생강 설탕 절임을 씹듯이 말해야만 하는 주술에 걸린 기분 말이다. 어느 오래전 여름밤, 철거가 예정된 한 카페에서 시인이 기타로 단순한 선율을 연주하며 자신의 시를 노래처럼 얹어 부른 적이 있다. 마법적인 리듬, 반복, 언어와 언어 사이 느슨하게 확장되며 상승되는 세계가 실체를 지닌 목소리로 마음을 밀고 나아갔다. 그것이 먹먹해 눈물이 흘렀다. 프리드의 진저 인센스 스틱은 생강의 달콤함과, 오래 씹었을 때 코가 살짝 매워지는 따듯한 성질까지도 지니고 있다. 방 안 가득 피워놓으면 이제니의 시가 노래처럼 곁에 머문다. 어지러울 만큼 화사한 향기로 가득 찬다. 깊은 밤,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문장과 남미의 흐드러진 튜베로즈 밭에 푹 빠진다.

레 푸지 퍼퓨메 싸크르, 레 알루메 퍼퓨메 알렉산드리아 성냥, 모두 불리1803.

<인상과 풍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영화와 번영을 누렸던 안달루시아와 카스티야의 궁전과 사원들은 당시의 웅장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쓸쓸한 폐허가 되어있다. 스페인 남부의 영혼을 담은 시인이자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그라나다 대학 재학 시절, 스페인 중남부를 답사하며 마음에 남은 인상과 풍경을 기록한다. <인상과 풍경>은 그의 첫 책이다. 알바이신과 카스티야의 고도, 아빌라 대성당, 실로스 수도원, 사라진 도시 바에사, 두에로강에서 중세의 스페인과 근대의 스페인을 보며 폐허 속의 메아리와 황혼의 유령들과 마주한다. 로르카를 더 가까이 느끼기 위해, 불리1803의 싸크르 향초에 알렉산드리아 성냥으로 불을 붙여 페어링한다. 삼나무와 꿀의 향이 퍼지고, 금으로 만든 기둥과 둥근 천장, 성스러운 대리석 동상들이 반짝이는 풍경이 보이는 듯하다. 해가 지고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으면, 박하의 향기를 머금은 밤의 그림자가 이제는 쇠락한 풍경을 굽은 칼날처럼 차갑게 비춘다. 초현실주의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 루이스 부뉴엘과 어울렸던 로르카는 스페인 남부의 민속춤 칸테혼도, 그리고 스페인 남부의 대지가 지닌 어둠의 소리인 두엔데를 담아 원초적인 욕망과 비극에 대한 창백한 시와 핏빛 희곡을 썼다. 그리고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지식인 서명에 동참했고, 그라나다를 점령한 파시스트들에 의해 총살당했다.

클래시카 캔들, 산타 마리아노벨라.

<흰> 한강
작가 한강은 흰 것에 대해 쓴다. 흰 것엔 어둠이, 삶엔 죽음이, 뿌연 입김과 유령처럼 함께 부유한다. 이를테면 그의 어머니가 낳은 첫아기의 기억. 혼자 아기를 낳았고, 달떡 같던 아이의 검은 눈을 보며 죽지 마라, 제발, 속삭였던 이야기. 죽지 말라는 그 말을 <소년이 온다>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한 것. 태어나자마자 죽은 언니에게 주고 싶은 오직 흰 것. 작가에게 흰 것은 현존의 차원을 확장하는 일이자, 우리 안에 결코 훼손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인도 유럽어에서는 텅 빔 blank과 흰 빛 blanc, 어둠 black과 불꽃 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흰 것은 또한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이다. 흰 초를 켠다. 클래시카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가 1500년대에 만든 향초다. 베르가못의 상쾌한 향이 훅 퍼지면, 불면증에 쓰는 페티그레인의 은근한 향취, 육두구의 매운내, 숨을 편안하게 해 안식향이라 불리는 수마트라 벤조인의 은은한 냄새가 감돈다.

나그참파 방갈로르 인센스 스틱 at 헤븐센스. 리버스 인센스 홀더, OBJT.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필립 K.딕
어두운 뒷골목엔 알파벳과 한자가 뒤섞인 형광색 간판과 섹스 안드로이드를 선전하는 싸구려 홀로그램이 번쩍인다. 인간들은 핵전쟁으로 몰락한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이주했고, 가난한 이들만이 지구에 남았다.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소재로 한 고전 SF가 그려내는 전통적인 싸이파이 디스토피아의 광경은 방갈로르 뒷골목에서 진하게 풍기는 나그참파 인센스와 퍽 어울린다. 나그참파는 백단향 오일에 참파꽃 수지를 혼합한 향으로, 요가원이든 타투숍이든 특유의 화려하고 매캐한 향기를 내뿜는다. 60년대 히피들의 상징과 같은 향으로, 키치한 멜랑콜리는 인공지능에 낭만성을 부여한 로맨티시즘과도 상통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는 죽기 전 말한다.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에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야.”

아틀리에 드 발투스 인센스 스틱, 미누 인센스 홀더, 모두 아스티에 빌라트 at 메종드파팡.

<사랑을 찾아서> 이지혜
샤갈의 염소를 닮은 흰 말은 사랑을 찾아 떠난다. 눈 쌓인 숲을 지나 밤의 계곡과 동굴을 건너, 빗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능소화 냄새를 맡는다. 도시와 화랑을 지나 인간들 사이에 치이고, 죽은 새를 보듬고, 회전목마 속을 누볐다가 붉은 사막과 파도의 격랑을 건너 섬에 다다르고, 다른 존재의 알을 보며, 먼 밤하늘에 몸을 둥글게 만다. <사랑을 찾아서>는 문자가 한 글자도 없는 그림 동화책이다. 그러나 가로로 펼쳐진 그림들을 팔랑팔랑 넘기고 있노라면 한 편의 긴 이야기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여운이 남는다. 흰 도자기로 만든 미누 인센스 홀더에 아틀리에 드 발투스 인센스 스틱을 꽂는다. 시간이 멈춘 듯한 화가의 스튜디오 안에는 린시드 오일에 물든 헝겊과 푸른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 팔레트, 페인트통, 붓이 가득하다. 테레빈과 스모키한 향을 주조로, 꿀과 시더우드의 단내가 햇빛 아래 너울대는 먼지처럼 퍼진다. 사랑을 찾아서.

미르 캔들, 딥티크.

<끝없는 이야기> 미하일 엔데
끝나지 않는 이야기 속 이야기에 대하여, 독일의 동화작가 미하일 엔데는 한 소년의 독서를 빌려 영원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보면 눈이 멀어버릴 듯한 무(無)가 번지는 한 세계가 있다. 세계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그들의 어린 여제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줄 인간을 필요로 하고, 현실세계의 소년은 책 속으로 들어가 모든 이야기를 시작한다. 상아탑의 달아이, 밤의 숲 페릴린, 빛깔 사막 고압, 은의 도시 아마르칸트, 별의 수도원, 꿈의 광산까지 인간이 직조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 생생하고 세밀하게 펼쳐지고, 이야기 안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끝이 처음을 찾아간다. 딥디크의 미르, 몰약을 주원료로 만든 향초에 불을 붙인다. 몰약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지방에 자생하는 콤미포라 미르라의 수피에 상처를 내어 채취한 레진으로,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 때 방부제로 사용했으며 마기로 불리는 동방박사들이 예수의 탄생에 바친 세 가지 예물 중 하나가 이것이다. 쓰고 무거운 향취와 점성이 있고 종교의식에 자주 활용된다. 피어오르는 몰약의 연기 속에서 불현듯 어린 여제의 새로운 이름이 떠오른다.

트리플 페이퍼 인센스, 파피에르 다르메니 at 헤븐센스.

<가기 전에 남기는 글들> 허수경
독일 뮌스턴에서 고고학을 연구한 학자이자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책들을 영영 고아로 여겼던 허수경 시인의 시엔 외로움과 오래된 슬픔이 켜켜이 쌓여 있다. 오리엔트 발굴지에 머무르며 한 문명의 지층만큼이나 깊은 슬픔을 발굴하고 보듬어온 그는 유고집에서 쓴 마지막 시작 메모에서 귤을 쪼갠다. “귤향!/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 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아름다운, 따듯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그리고, 그 모든 향기./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빙하기의 역’, ‘혼자 가는 먼 집’처럼 쓸쓸하고 아름다운 시들을 헤아리며 페이퍼 인센스에 불을 붙인다. 1885년 처음 생산되어 지금까지 판매되고 있는 파피에르 다르메니의 페이퍼 인센스에서는 진한 발삼나무의 향이 피어오른다. 발삼나무는 상록침엽수로서 송진의 쌉쌀함부터 바닐라와 호박의 달콤함, 계피의 스파이시함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향조를 가진 수목이다. 죽음을 앞둔 시인이 한 알의 귤에서 삶을 봤듯, 종이를 태우며 방 안을 메우는 쓰고 달고 매운 향기를 맡는다. 그의 시가 여기 가득 차 있다.

    에디터
    이예지
    포토그래퍼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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