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멜로가 체질, 공효진

2019.12.03GQ

데뷔 초 개성파 마이너리그 배우로 인식되던 공효진은 이제 대중 사이에 호감형 로코 퀸으로 안착했다. 역시나 공효진은 멜로가 체질이다.

90년대 말 <쎄씨>, <키키>, <신디 더 퍼키> 등의 패션 잡지를 통해 새로운 얼굴들이 발굴됐다. 거기엔 신민아가 있었고, 김민희가 있었고, 김효진이 있었다. 그리고 공효진이 있었다. 통통 튀는 N세대로 분류된 이들은 제각기 판이한 개성을 자랑하며 대중이 흠모하는 얼굴로 떠올랐다. 물론 편차는 존재했다. 개성이 주목받는 분위기 속에서도 공효진이 지닌 개성-마이너한 감성이라고도 불렸던 면모-은 당시로서도 시대를 조금 앞서가는 느낌이 있었다. 에두르지 말자. 톰보이스러우면서도 반항적인 공효진의 비주류적인 매력은 ‘깜찍, 발랄, 신비스러움’으로 수렴되는 N세대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이들 모델 출신 배우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듯하다. 김민희와 김효진이 원빈과 함께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라는 감성 CF를 찍고, 신민아가 이승환의 뮤직비디오 ‘당부’에서 애틋함을 선보일 때, 공효진은 자다가 일어나 침을 닦으며 얼떨결에 휴대 전화를 받는 엽기 콘셉트의 광고에서 치아 교정기를 드러내며 한껏 망가졌다. 이후에도 공효진은 예쁘거나 청순하거나 지적인 역할과는 인연이 없었다. 공효진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질투를 불태우며 주인공 남녀의 사랑을 훼방놓거나, 자존심 따위 내팽개치고 사랑을 갈구하다가 버림받기 일쑤였다.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을 할 타입이 아니라는 편견 속에서 어쩌면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단 한 번의 기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로서 자신을 증명해 보일 기회였는지 모른다. 공효진은 <상두야 학교 가자>, <건빵선생과 별사탕>으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기 안에 숨은 멜로적인 면모를 꺼내든다. 김태용 감독과 호흡을 맞춘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는 일상에 밀착된 연기로 자신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경희 작가가 집필한 <고맙습니다>를 통과하며 대중의 의심을 완벽하게 돌려놓는다. 에이즈에 걸린 봄이를 낳은 미혼모를 연기한 그녀의 모습에서 전에 없던 섬세함이 풍겨나왔다.

<파스타>는 공효진에게 ‘공블리’ 이미지를 쥐여준 첫 관문이 된 작품이다. 방송 초기만 해도 <파스타>는 주목받는 드라마가 아니었다. ‘주방 보조가 정식 요리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라는 시놉이 일단 신선하지 않았다. 아,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실장님 스타일의 왕자님을 만나 일과 사랑 모두를 쟁취하는 신데렐라 스토리겠거니 했다. 그런데, 어라? 공효진이 분한 <파스타>의 서유경은 트렌디 드라마 여주인공 사상 가장 높은 노동 강도를 버텨낸 비상한 캐릭터였다. 연애에 돌입하는 순간 일을 뒷전으로 밀어버리는 기존 드라마 여성들과 달랐다. 셰프 최현욱(이선균)과 사랑을 쟁취한 순간에도,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이탈하지 않는 근면 성실함. 일과 사랑의 균형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녀의 모습은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무수히 많은 시청자들 마음에 제대로 꽂혔다.

<파스타>에서 공효진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많이도 울었다. 마스카라가 번지든 말든 개의치 않고 엉엉 소리 내서 우는 여주인공의 모습은 자못 신선했다. 잠자리에 누워도 화장과 머리카락이 완벽하게 세팅돼 있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다반사인 여타의 드라마들과 디테일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라는 이름 아래 묵인됐던 인공적인 요소들을 쫙 발라내면서 공효진은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바짝 당겨 앉게 했다.

공효진의 이러한 면모는 <최고의 사랑>에서 톱스타 독고진(차승원)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한물간 걸 그룹 멤버 구애정, 귀신 보는 능력으로 백화점 사장 주중원(소지섭)을 사로잡는 <주군의 태양>의 태공실, 스타 소설가 장재열(조인성)의 아픔을 품는 <괜찮아, 사랑이야>의 정신과 의사 지해수, 남자 유방암에 걸린 화신(조정석)의 질투를 연신 자극하는 <질투의 화신>의 기상캐스터 표나리로 이어지며 허공에 붕 떠 있던 로코 여주인공을 지상 아래로 끌어내려 공감을 샀다. 데뷔 초 개성파 마이너리그 배우로 인식되던 이 배우는, ‘공블리’라는 수식어를 대중들에게 인증받으며 ‘로코의 여신’이 된 것이다.

공효진의 러브 스토리에 대중의 지지가 끊이지 않은 건, 그녀가 그려내는 캐릭터들이 끝까지 자존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걸려 오는 태클 앞에서 공효진표 캔디는 백마 탄 왕자가 달려와 구해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는 안간힘, 구질구질한 현실에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태도는 수많은 여성 직장인들과 공명하며 또 다른 의미의 대리 만족을 안겼다.

혹자는 로코 안에서의 공효진을 ‘리베로’라고 평한다. 호흡을 맞춘 상대 배우를 위한 내조 연기를 했다는 게 이유다. 나는 그녀가 상대를 빛나게 하는 배우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리베로’라는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공효진의 멜로 연기에 힘이 있는 것은 오히려 상대 배우에게 기대지 않고도 그 스스로 보는 이의 시선을 장악하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효진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대본에 충실한 배우가 아니다. 현장 분위기에, 리듬에 맡기는 쪽이다. 이는 공효진과 짝이 된 많은 남자 배우에게 의도치 않은 리액션을 가져다줄 공산이 크다. 그리고 그 리액션이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공효진은 그걸 타고난 감으로 또다시 받아친다. 그녀와 함께 연기한 상대 배우들의 연기가 기존과 달리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면, 이는 공효진이 던지는 액션의 탄력이 신 안에서 상대의 호흡과 강하게 공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효진은 멜로드라마 안에서 리베로라기보다 호흡을 이끄는 스트라이커에 가깝다. 이는 그녀가 로코 안에서 그려내는 자존감 있는 캐릭터를 더 자존감 있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스크린 안에서의 공효진은 드라마에서보다 훨씬 더 용감하다. 가히 문제적이었던 <러브픽션>을 예로 들어볼까. <러브픽션>의 겨드랑이 털 장면 말이다. 영화사적으로 관객을 충격에 빠뜨린 겨드랑이 털 하면 <색, 계> 탕웨이의 ‘겨털’과 <러브픽션> 공효진의 ‘겨털’이 자웅을 다툴 만한데, <색, 계>의 경우 1930년대 상하이라는 문화적 배경에 기인한 반면 <러브픽션>은 여주인공 캐릭터의 개성을 위해 느닷없이 제시되면서 관객석을 웅성거리게 했다. 겨드랑이 털을 기르는 설정이 엽기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여배우가 고사한 <러브픽션>의 희진 역을 받아든 공효진은 기어코 이 캐릭터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마술을 부렸다. 공효진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꽤 있지만, 공효진처럼 겨드랑이 털마저 귀엽게 만드는 배우는 본 적이 없다. 하정우에게 “겨털이 뭐가 어때서?”라고 묻는 공효진의 능청은 “여름은 멜로의 계절이죠?”라고 말하는 하정우의 능청과 용호상박을 이루며 극을 보다 풍부하게 했다.

“이쁜 것들 다 묻어버리고 싶다!”라는 카피를 과감하게 들고 나온 <미쓰 홍당무>에서 공효진이 연기한 안면홍조증 환자 양미숙은 또 어떠한가. 이 영화에서 그녀가 보여준 전무후무한 ‘삽질 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차고 넘치지만 그러기엔 아, 지면이 얼마 없다. 다만 양미숙을 끝까지 비호감으로 남겨 놓는 영화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양미숙이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가 된 데에는 공효진이 부여한 결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점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

작품 밖의 공효진은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또래 여성들의 워너비로 떠오른 패셔니스타다. 일상에 어떻게든 밀착하려는 작품 속 공효진과 비교하면, 현실 세계의 공효진은 오히려 판타지적인 면모가 있다. 흥미롭게도 이 두 가지가 서로를 위협하지 않고, 보완하며 균형을 이룬다는 점이 공효진이 지닌 퍼스널리티다. 최근 공효진은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또 한 번 로코 퀸으로서의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다졌다. 그녀가 기존 드라마에서 쌓아온 이미지를 캐릭터에 적극적으로 차용한 까닭에 누군가는 ‘자기복제’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해진다. 이에 대한 주석은 눈에 띄는 댓글이 있어 대신한다. “같은 캐릭터를 한다 한들 죄다 재밌긴 힘들지. 그게 공블리의 능력이고 매력이야.” 맞다. 이것은 아무나 지닐 수 없는 능력이고, 커다란 경쟁력이다. 멜로가 체질인 공효진의 마력이다.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에디터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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