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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러쉬 "무대에 올라가면 신기하게 괜찮아져요"

2019.12.07GQ

코트, 니트, 팬츠, 비니, 머플러, 슈즈, 가방, 모두 버버리. 신시사이저는 야마하 몬타쥬 7.

코트, 니트, 팬츠, 비니, 머플러, 슈즈, 가방, 모두 버버리. 신시사이저는 야마하 몬타쥬 7.

재킷, 팬츠, 모두 프라다. 니트, 프라다 at 가버먼트 서울.

니트 집업, 팬츠, 슈즈, 모두 펜디.

니, 혜인서. 화이트 셔츠, 메종 마르지엘라 at 가버먼트 서울. 반지, 크롬하츠

터틀넥, 요지 야마모토 at 가버먼트 서울. 팬츠, 준야 와타나베 at 가버먼트 서울.

수트, 프라다. 슈즈, 처치스.

수트, 프라다. 슈즈, 처치스.

화보 촬영을 하는 내내 조명과 분위기에 맞는 곡을 매번 다르게 직접 골랐어요. 첫 컷에서는 아마드 자말 Ahmad Jamal 의 ‘Soul Girl’을, 마지막 신에는 덱스터 고든 Dexter Gordon의 ‘Darn That Dream’을. 크러쉬와 함께하는 작은 음악 감상회를 연 기분이에요. 어떤 회로로 음악을 선곡하나요? 음악을 고른다는 건 자신감과 연결되는 부분인 것 같아요. 사실 오늘 처음 뵙는 분들과 한 공간에서 노래를 듣는다는 것이 뭔가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화보 촬영장 안에서는 제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니까 평소 자주 듣는,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는 것이 촬영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해요.

밴드 원더러스트 멤버들이나 주변의 음악하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도 서로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두는 편인가요? 아뇨, 그럴 때는 음악 절대 안 틀어요. 다들 음악을 만드느라 너무 지쳐 있어서. 음악 아닌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미국과 유럽 투어 공연을 꽤 길게 했어요. 오늘처럼 낯선 호텔에서 늦은 밤 벅찬 마음 혹은 공허한 기분으로 잠드는 날이 많았을 것 같아요. 아마 오늘 이 공간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작은 호텔방에서였을 거예요. 이상하게 투어를 시작하면 몸이 굉장히 아파와요. 미국 투어 공연을 돌다가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잠든 날이 있었어요. 작년 12월에 미국 순회 공연을 하고 나서 바로 유럽으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는데 그때 갑자기 향수병이 찾아와 엄청 고생하기도 했고요. 근데 그렇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막 아파 죽겠다 싶다가도 딱 무대에 올라가면 신기하게 괜찮아져요.

곧 2집 앨범이 나온다고 들었어요. 2014년 발표한 1집 이후 약 5년 만의 정규 앨범이죠. 한 3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온 앨범이에요. 뭐랄까, 냉동실에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나중에 꺼내 먹어야지 이런 느낌으로 작업을 해오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1년 전부터 이제는 이 계획을 구체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아끼는 노래들을 다 꺼내서 다시 편집하고 편곡하고 가사도 고쳐 쓰고 멜로디도 새롭게 짜고. 요즘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정규 앨범 자체가 귀한 시대라고 생각해요. 긴 호흡 안에는 주로 어떤 감정이 담겨 있나요? 3년 동안 벌어진 많은 이야기, 경험, 기억 그리고 아픔, 그리움, 사랑···.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잘 담으려고 했어요. 거기에 위로라는 큰 테마가 자리하고 있고 시간도 중요한 모티브예요. 12곡이 하루 동안의 시간 속에서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요. 조금 추상적이긴 한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24시간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가 있나요? 모두가 잠든 조용한 새벽 2~3시를 제일 좋아했어요. 요즘은 바른 생활 사나이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도록 생활 패턴을 바꿨어요. 그래서 아침 9~10시, 이때 깨어 있으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음악가들을 인터뷰해보면 출퇴근이 없는 지속적인 야근이 일상다반사인 것 같아요. 최근에 일 때문에 힘들어서 체중이 좀 빠졌어요. 그런데 그 안에서 즐기고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크러쉬는 변화 속에서 진화해온 뮤지션이라고 생각해요. 익숙한 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다시 익숙하게 만드는 음악가. 이번 앨범도 그런 기점이 될까요? 목표와 목적이 확실한 앨범이에요. 예를 들어 무조건 음원 차트에서 1등하겠다는 목표가 아니라 제가 앞으로 가야 하는 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어주는 앨범인 것 같아요. 여태까지 그런 마음으로 음악을 해왔지만 이번에는 유난히 더 그래요.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제가 정말 아끼는 노래와 음악들. 한 치의 거짓 없이, 그러니까 좀 아플 정도로 솔직한. 크러쉬라는 사람이 아주 잘 보이는.

앨범은 얼마나 완성된 상태인가요? 지금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는데 계속 다시 녹음하고 수정하고 있는 단계예요. 앨범을 발매하는 순간까지 끝나도 끝난 게 아니에요. 잠들 수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어요.

최근에 인터뷰한 어느 소설가가 말하길 전 세계적으로 작가들이 더 이상 장편을 많이 쓰지 않는, 소설의 분량도 점점 얇아지는 단편의 시대인 것 같다고 했는데, 이 말은 음악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아요. 맞아요. 곡의 러닝타임 자체도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 해외 뮤지션들이 발표한 싱글 앨범을 들어보면 2분이 채 안 되는 1분 남짓한 곡도 꽤 많죠.

그렇다면 정규 앨범이기 때문에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부담감도 있나요? 싱글 앨범과 비교해보자면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달라요. 수많은 곡을 어떻게 한 음악처럼 들리도록 만드는지가 관건이고 그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에요. 제가 노래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혼자서 다 해결해야 하니까요.

이번 앨범도 LP로 발매할 계획인가요? 네, 저는 앞으로도 계속 그러고 싶어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장편이 사라지고 있는 단편의 시대, 아날로그가 점점 사라지고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시대에 저는 그 모든 것을 두 손을 뻗어서 막고 싶은 심정이거든요. LP를 고집하는 건 저의 소신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좀 많은 것 같아요.

올해 <GQ KOREA> 8월호에 애장품 1호인 턴테이블과 LP에 대해 짧게 글을 쓴 적 있어요. “음악가가 아니더라도 그날의 분위기에 맞는 음반을 골라 듣는다는 건 무척 아름다운 경험”이라는 말이 근사했어요. 화보 촬영을 위해 직접 가져온 LP는 어떤 사연과 의미가 있는 음반인가요? 제가 평소에 자주 듣는 재즈 뮤지션의 앨범 위주로 가져왔어요. 재즈 기타리스트 웨스 몽고메리 쿼텟의 <Vibratin(1967)>>, 빌 에반스와 짐 홀이 역사적으로 만난 <Undercurrent(1962)>도 정말 아끼는 앨범들이에요.

이번에 화보를 준비하면서 쳇 베이커의 옛날 사진들을 찾아봤어요. 그에 대한 크러쉬의 존경하는 마음은 익히 잘 알고 있죠. 쳇 베이커의 묘지에 다녀온 뒤 헌정하는 곡도 발표했었잖아요. 오늘 이 자리에 있다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나요? 화려했던 전성기와는 다르게 말년에 비참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아서 아마 그때의 모습으로 뵌다면 거의 대화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자서전을 읽어보면 살아 있는 동안에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던 모습이 제게 많이 와 닿는 것 같아요.

막연하게 마흔 살의 모습도 상상해보는 편인가요? 이번 앨범에 나중에 제가 아빠가 된다면 내 아이에게 꼭 들려줘야지 하고 만든 노래가 있어요. 미래의 아이에게 네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너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단다 이러면서 언젠가 들려주지 않을까요?

크러쉬, 신효섭이라는 사람의 성향과 가치관도 음악처럼 계속 변화하고 있나요? 완전히 그래요. 옛날에는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뭔가 하나에 꽂히면 끝없이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느끼는 습관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걸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분명히 크고 작은 힘든 일이 많이 닥쳐오겠지만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해요. 살면서 화나는 일도 슬픈 일도 많은데 예전보다 몸과 마음이 좀 더 단단해질 수 있는 힘을 스스로 기른 것 같아요. 요즘 들어서 확실히 느끼는 건 세상을 살면서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에요. 제가 진짜 못 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부동산의 복비를 깎는다든지(웃음).

살면서 점점 발전하고 있는 것과 퇴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발전하는 것은 긍정적인 마인드와 좀 더 멀리 볼 수 있는 시야, 퇴보하고 있는 건 벌써부터 느끼는 잦은 피로와 체력 저하···. 비타민이나 영양제를 악착같이 챙겨 먹는데도 피곤한 걸 보면 너무 많이 먹어서 더 피곤한가 싶기도 해요. 뭐든 과용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잖아요.

발전하고 있는 것에 크러쉬의 목소리도 추가하고 싶어요. ‘넌 none’ 의 경우는 곡 구성의 80퍼센트 이상이 본인의 목소리라고 들었어요. 중첩되는 보컬의 하모니가 신비로웠어요. 보통 음악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악기가 피아노, 드럼, 베이스, 기타이고 이것들이 모여 포 리듬 Four Rhythm을 형성하는데, 그 곡은 포 리듬이 형성이 안 된 상태에서 나머지 부분을 제 목소리로 전부 때려 박은 거나 다름없었어요.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음악을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서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크러쉬가 생각하는 올해의 뮤지션은 누구인가요? 럭키 다예 Lucky Daye의 올해 나온 앨범이 다 좋아요. 알앤비, 솔 장르의 음악을 하는 미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인데 2~3년 전의 대니얼 시저 같은 느낌이랄까요? 요즘 완전 떠오르는 친구인데 음악 진짜 좋아요. 한번 들어보세요.

    에디터
    김아름
    포토그래퍼
    박종하
    스타일리스트
    박지연, 박상욱
    헤어 & 메이크업
    한주영
    로케이션
    시그니엘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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