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겨울 연대기

2019.12.15GQ

10, 20, 30, 40 각자의 숫자 속에서 다른 시공간의 겨울을 보낸 이들의 차갑고 시린 이야기.

‘Frozen River’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난데없이 명치를 푹 찌르는 것 같은, 이상하게 스산해지는 기분을 나는 사실 겨울밤이라고 부른다. 가로등 불이 모두 꺼져 캄캄한 겨울밤 운동장이 내 십 대 시절이다. 뭔가 있는데 보이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한 겨울밤에 얇은 교복 재킷과 얇은 블라우스, 치마를 입고 걸어가는 기분만 남아 있다. 십 대 시절 겨울과 엮어 분명 좋았던 일도 많았을 텐데, 좋았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교복 입던 때의 기억을 거의 잃었다. 그래서 아직 남아 있으리라 짐작되는 몇 개 기억을 잡아당기려면 일단, 고등학교 운동장을 떠올려야 한다. 운동장만은 그래도 제일 먼저 기억난다. 운동장의 가장자리를 빙 둘러 심겨 있던 나무 그림자와, 검은 창문에 반사되어 비치는 흰 형광등 불빛 아래 우리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얌전히 앉아는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미쳐 있었던 것 같다.

십 대 아이들이 한 교실에 14시간 이상 모여 있으면 미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은 생각한다.

나는 허벅지를 맞지 않으려고 청산별곡을 줄줄 암기하는 학생이었는데 늘, 그 겨울 밤으로부터 전속력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그때 나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었고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정확히 무엇을 이루고 싶었는지, 무엇에 만족하고 싶었는 지는 모르겠다. 그 무렵의 나는 지금의 내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를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겨울밤이 큰일을 했다. 겨울밤에 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삼 년이 하루의 겨울밤과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저녁 급식을 먹는 도중 이미 해가 지기 시작했고, 문자 그대로 긴긴 겨울밤 우리들은 한 학교에 모여 있었지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입이 없어 미쳐가느라 모여 있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올려다본 교실 안의 우리는 평화로워 보였을 것이다. 그 고요함을 의심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눈앞에서 보면서도 몰랐던 일이 아주 많다. 친구들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겨울 하면 겨울 밤, 겨울 밤 하면 운동장, 그리고 운동장 하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불쑥 튀어나온다. 우리를 보호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던 이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감정이 치솟는다. 애써 돌이켜 떠올려보는 것인데도 이것은 추억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연약했다는 것을 다 비밀로 하고 조숙한 것처럼 굴었다. 그때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는지, 쓰고 싶지만 쓸 수가 없다. 내게는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감정만 묘사할 권리가 있다. 그녀들에게(나를 포함한) 아직 비밀을 털어놓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 하나 없이 모든 게 너무 조용하게 지나갔다.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그게 지금 우리에게 무슨 영향을 미쳤는지 너무 많이 곱씹느라 곤죽이 된 것도 같다. 이런 뒤죽박죽인 기억은 모를 감정을 만들어내 머릿속을 텅 비운다. 그리고 겨울 밤으로 채운다. 명치를 푹 찌른다. 묘사하자면, 아주 추운 겨울밤에 맨발로 복도에 서 있다 고꾸라지는 기분이다.

나는 이 겨울밤 기분을 다시, 슬픔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그 때는 그게 슬픔인 줄도 몰랐을 것이지만, 슬픔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슬픔은 저 스스로는 슬픔을 모르고 냉혹하다. 나중을 남기지 않는 무자비한 것이 슬픔이다. 그리고 우리의 뭔가를 전리품 삼아 가져간다. 내 경우에는 기억이다. 무엇으로도 해소하지 못한 슬픔이 지나간 후의 우리는 이제 그 마음을 겪기 이전의 우리를 모른다. 내가 지금 시를 쓰는 것은 그 겨울밤이 있어서일까? 소급해서 생각해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 그런 겨울밤은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울고 있구나” 이런 노래를 외우기만 할 것이 아니었다. 우리 다들 미워할 이와 사랑할 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겨울밤을 보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김복희(시인)

‘흰 그늘’

폭설주의보

2010년과 2011년의 겨울을 파주 출판단지에서 보냈다. 스물일곱에서 여덟까지였는데, 그 기간은 이상 폭설이 유난히 잦던 때라 나는 마치 재난영화의 엑스트라가 된 것 같았다. 원래도 폭설 지대이긴 하지만, 그때는 정말 과장하면 허리까지 눈이 왔다. 추위도 폭설에 뒤지지 않아 숨을 내쉬면 숨 속의 수분이 머리카락에, 눈썹에, 속눈썹에 하얗게 얼어붙었다. 콧속이 찡하다 못해 부비동 전체가 얼어 두통이 왔고, 동상을 방지하기 위해 운동화 대신 등산화를 신고 다녔다. 그 겨울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걸 보면, 정말로 유난한 이상 기후였던 모양이다.

출퇴근길이 악몽이었다. 눈 예고가 있으면 며칠 전부터 마음이 졸아들었다. 자유로가 막힐 것 같아 경의선을 탔더니 지상철인 경의선이 멈춰서거나, 경의선이 잘 움직였다 해도 마을버스로 갈아타면 마을버스 기사님이 중간에 내려서 걸어가라고 했다. 버스가 뒤로 슬슬 밀리는 와중에 사람들이 “어어어”하고 낮은 비명을 질렀으니, 기사님의 판단은 정확했다. 눈 오는 벌판을 걸어가다니 무슨 삼포 가는 길도 아니고…. 전략을 잘못 세우면 8시에 집을 나와 11시에 회사에 도착했다. 셔틀버스나 빨간 버스를 타고 세월아 네월아 가는 것이 차라리 편한 길이었는데, 어느 날은 탄현쯤에서 버스가 미끄러지더니 앞의 다른 버스 옆구리를 박았다. 그 둔중했던 쿵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사고 처리를 해야 하니 또 내리라고 했다. 다음 차를 기다리자니 막막했다. 배차 간격이 20분인데 눈 오는 날은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고 택시를 잡을 수 있으면 기적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의 사고는 운이 좋은 것이었다. 가끔 자유로에 옆으로 누운 버스를 보면 기가 막혔다. 옆으로 눕기 전에 사람들이 내린 게 아니라면 부상자가 있을 게 뻔했다. 차편이 모자라니 서서 가는 사람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고 누가 크게 다쳐 뇌 수술을 받았다더라, 하는 흉흉한 말들이 전해졌다.

돈도 없고 운전에 자신도 없었지만 차를 살까 했는데, 친구의 차가 제어 불가능하게 미끄러져 세워져 있던 차를 박는 걸 보고는 포기했다. 게다가 주차 공간 부족도 심각했다. 지하 주차장을 만들지 않은 것은 대체 무슨 정신머리였을까? 걷는 것은 괜찮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파주시는 그때 심각한 재정 부족에 시달렸던 것인지, 출판단지의 도로들은 거미줄처럼 크랙이 가 있었으며 보도블록도 빠진 이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문제는 눈이 위에 덮이면 그 함정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친한 선배가 그런 구멍에 빠져 무릎에서 피를 철철 흘렸다. 제설제 때문에 등산화의 밑창이 메롱, 하고 떨어지면 새 등산화를 사야 했다. 나는 출판단지를 미워했고 겨울을 미워했고 폭설을 미워했다. 눈에 대한 로망을 완전히 잃었다. 파주 신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리둥절할지 모르겠다. 그때의 출판단지는 파주의 다른 곳과 사정이 달랐다. 고립되어 있고 버려져 있었다. 이 나라에서 출판이 그렇듯이.

그리고 봄이 오면 살 것 같았다. 어느 날엔가는 햇빛이 너무 환하고 따뜻해서 친구들과 춤을 추듯 걸었다. 기뻐하며 기온을 확인했더니 영하 7도였다…. 영하 15도에 익숙해지면 영하 7도가 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봄의 고라니들, 머리통이 사람만 한 수리부엉이들, 뱀이 단정히도 벗어놓은 껍질들, 작고 귀여운 갈색 들쥐들과 함께 새로운 계절을 기뻐했다.

출판단지를 폭설 지역에 두고는 지하철도 지어주지 않고 버스도 증편해주지 않는 결정권자들을 만나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며 ‘무슨 생각이었냐? 인간적으로 GTX는 출판단지를 통과해야 하는 거 아니냐? 왜 또 빼먹었냐?’ 화를 내고 싶은 생각뿐이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 폭설이 또 오면 어쩌려고, 누구를 더 다치게 하려고 아무 대책이 없는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언젠가 파주 한가운데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그 혹독한 겨울에 기묘한 아름다움이 있기는 있었던가 보다 싶다. 정세랑(소설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 산굼부리, 제주’

나와 어머니와 회색 당나귀

어느 해의 겨울은 일기에서 통째로 비어 있다. 2009년이 그러한데, 마치 깊은 겨울잠이라도 잔 듯 이듬해 3월에야 날짜가 다시 이어진다. 딱 10년 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그때는 하나도 시작되지 않았었다. 내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지도 않았고, 앨범도 없었다. 그럼에도 굉장한 자존감으로 바쁜 티를 한껏 내며 살았던 것 같은데, 대체 뭘 믿고 그랬던 걸까?

그러나 문득 서른 둘에 떠났던 제주 여행이 떠오르며, 내가 나름 잘 지냈던 게 아니라 불안과 힘듦을 감추며 살았었다는 것, 그러다 주저앉아 그 겨울을 겨우 건너왔었다는 기억이 났다. 나는 어느 저녁 혼자 제주 여행 중이시던 어머니께 전화로, 모든 일이 지지리도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털어놓고 말았다. 눈 딱 감고 내려오라는 조언을 받은 다음 날, 동일주버스를 타고 진눈깨비가 눅눅히 날리는 밤의 해변에 내리니 어머니가 길에 나와 계셨다. 우리는 컴컴한 돌담길을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호텔도 게스트하우스도 아니었다. 지인에게 빌렸다는 학교 사택에는 전기장판이 한 장 깔려 있었고, 창을 막은 비닐을 제주의 바람이 후려치고 있었다. 벽이 있을 뿐 이건 뭐 야영지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 심란한 분위기를 동물 한 마리가 완벽하게 완성해주고 있었다. 학교에서 키우던 커다란 당나귀.

추운 밤, 집 뒤에서 응앙대는 당나귀라니. 눈은 푹푹 내리고, 나와 어머니는 전기장판 위에서 나타샤를 기다리고···.

그해 히말라야 등반을 마치고 오셨던 어머니께는 그 여행이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몸 풀기였다. 그러나 불규칙한 생활에서 도망쳐 온 내게는 그간 약골이 된 내 몸을 깨닫게 하는 혹독한 시간이었다. 노트북에 아마츄어 증폭기의 ‘수성랜드’를 틀어놓고 이불 속에서 얼마나 아득한 생각들을 했었던지.

다음 날은 어머니께서 해변 산책 중 알게 되었다는 한 부부의 집에 초대받았다. 근사한 나무 창고를 구경했고, 그곳을 쓰라고 해도 절대 제주도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서울의 또 다른 ‘음악하는’ 아들 이야기를 들었다.

이중섭 생가가 쉬는 날이라 헛걸음을 했던 오후에는 세밑을 기념하려 동문시장에서 갈치를 샀다. 그날 밤 어머니와 코펠에 끓고 있는 갈치조림을 보며 소주 한 병을 사오지 않은 걸 얼마나 후회했던지. 컴컴한 학교 식당 냉장고에서 한라산 한 병을 찾아내고 얼마나 기뻐했던지. 다음 날 냉장고에 똑같은 소주로 사다 채워놓느라 얼마나 슈퍼를 찾았던지.

새해 첫날 걷기 시작한 올레길은 종종 코스를 벗어났다. 점심 무렵, 막내 이모의 지인 수녀님이 계시다고 들은 성당 한 곳을 발견했는데, 경내 어디에도 인기척이 없어 둘러보니 작은 건물에 모두 모여 과메기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렇게 졸지에 저녁 식사에 초대되어 새해 기념으로 과메기를 실컷 먹었던 것, ‘길이 알아서 모든 걸 해결해준다고 믿는’ 나그네가 된 기분으로 다시 걸어 나왔던 기억이 난다.

밤에는 한 대안학교 선생님과 두 학생이 사는 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요리를 제법 한다는 학생이 끓인 구수한 청국장을 맛있게 먹고, 답례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다음 날은 다 함께 올레 한 코스를 걸었는데, 만사 의욕이 없고 유일하게 음악에만 조금 관심이 있다는 학생이 자신의 계획을 비밀스레 들려주었다. 일단 스무 살만 넘으면 돈을 잔뜩 벌어 흥청망청 쓸 것이고, 이번 생은 그렇게 살 거라고. 제주의 해변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그만큼이나 불안한 내 미래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 뒤로 그런 느슨한 여행은 인생에서 다시 없었던 것 같다.

그 우연한 제주도 겨울 여행은 이후 10년으로 건너가기 위한 간극이었던 것 같다. 그 뒤 나는 앨범을 내며 다시 바빠졌고, 몇 년 뒤 예상을 깨고 청국장을 끓였던 학생 쪽이 음악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다른 학생은 계획대로 돈을 잔뜩 벌었을까? 그 사택과 사택 뒤의 당나귀는 아직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겨울이다. 김목인(뮤지션)

‘WTWW1362’

그 겨울, 처마 밑

서울에 눈이 올 때 남쪽 항구도시에는 비가 내렸다. 서울에 자리 잡기 시작한 이후 20여 년이 흐른 2017년, 나는 고향인 경남 마산으로 회귀했다. 그리고 십 대 시절을 보낸 다가구주택의 옥탑방에서 마흔 살의 겨울을 맞았다. 무엇이라도 털어내어 몸을 가볍게 하고 싶은 욕망이 하필 마흔 살 때 찾아와서 잠시 스스로를 폄하하기도 했다.

중도에 주저앉았다는 좌절감, 남들보다 빨리 노화했다는 절망감, 나이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연약함이 이 욕망의 진짜 속내가 아닌가 하고. 소박함에 대한 뒤늦은 옹호는 패배주의의 다른 이름일 때도 있으니까.

같이 산 지 10년이 된 검은 고양이 두 마리와 옥상 양 끝에 각각 위치한 서가와 침실을 오갈 때면, 저 멀리 왼편으로 보이는 바다에서 배들이 겨울비를 맞으며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에서는 차갑게 식은 무거운 구름들이 무언가에 쫓기듯 서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중이었고. 그중 일부는 집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팔룡산 산등성이 턱에 걸린 채 원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옥탑방 처마 아래서 잘못한 것이 없이 서러워진 마음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를 바라보던 나와 고양이들의 처지인가 싶어 가슴속에서 무언가 쿵 내려앉기도 했다.

그러나 ‘남쪽으로 튀는 일’은 낙향(落鄕)만이 아니라 낙향(樂鄕)이기도 했다.

다음 해 1월 1일이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와 25년 만에 ‘달의 그림자’란 이름을 가진 동네의 뒷산에서 일출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산 어시장 복국거리를 찾아가 ‘졸복 매운탕’에 소주를 곁들여 마시며 얼어붙은 몸과 속을 달랬다. 엄마가 어시장에 장을 보러 가면 핸드 카트를 끌고 뒤를 따랐다. 집으로 돌아오면 핸드 카트에는 원래 사려던 것 반 그리고 나와 아내 An이 집어 올린 것 반이 담겨 있었다. 나와 An은 목도리처럼 펼쳐진 쥐포를 자르고 잘라 밀가루 반죽을 묻힌 튀김을 했고 담요를 덮은 채 책을 읽으며 주섬주섬 그것을 주워먹었다. An은 15년 동안 했던 일을 그만둔 후 허물 벗듯 얼굴빛이 달라졌다. 잠시의 따분함과 추레함도 견디지 못하던 사람이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동네를 거닐며 낡아빠진 것들의 가격을 흥정했고, 수면바지를 입은 채 밖으로 나가 5분 만에 박스에 든 석화를 사들고 오곤 했다. 그때 석화와 곁들여 마시던 화이트 와인에 나는 이름을 붙였다. 풍선. An과 나는 조금 들떠 있었다.

겨울에는 그 어디를 가든 행복이 언 땅에 절반쯤 파묻혀 있다. 마찬가지로 불행도 그렇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해는 겨울이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스산한 겨울비는 수시로 내렸고, 아침이면 옥상이 빙판처럼 얼어붙었다. 나는 먼지와 모래로 오염된 빙판 위로 비치는 퀭한 얼굴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안 도로는 추위로 인적이 끊겼고, 나는 그 휑한 길을 매일 걸으며 끝을 상상하곤 했다.

해안 도로의 끝, 겨울의 끝, 사십 대의 끝 그리고 결혼 생활의 끝. 해안 도로는 공사 중인 해안 절벽 부근에서 허망하게 끊어졌다. 사십 대는 시린 파도처럼 끊임없이 뒤척였다. 겨울이 다 가기도 전, An은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서울로 달려가서 오래 머무르다 드문드문 내려왔다.

셔터 내린 가게들이 시냇가 디딤돌처럼 반복적으로 박혀 있는 거리를 걷다 보면 내가 지켜보고 겪었던 하나의 시대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겨울 추위 속에서 사그라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감각도, 지향도, 결여도 빠르게 변해가는데, 거기서 너무 비켜서 있는 것은 아닐까?

처마 밑에서 겨울비가 떨어지는 모습을 두 해에 걸쳐 바라본 후,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겨울 방학 숙제를 남겨둔 채 개학을 맞은 아이처럼 머쓱하고 난감한 표정으로 서울의 거리를 한동안 멍하니 걸었다. 사십 대는 방황의 계절이다. 남쪽 항구도시에서 맞은 두 번의 겨울은 그것의 의미를 실감케 하는 빗방울 소리였다. 김기창(소설가)

    에디터
    김아름
    포토그래퍼
    민지이, 최기현, 홍진훤,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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