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라이즈 호텔 스위트 룸에서 열린 출간 파티

2020.01.09GQ

라이즈 호텔 룸 814호에서 어느 시인의 출간 파티가 열렸다. 사람도 술도 없고 오직 일기 한 권만이 남아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떤가요? 외로워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살펴볼 수 있다면 살펴보게 되는 것이 우리네 본능입니다. 그래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죠.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달리 말해서 앞으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험 소설은 종종 외로운 사람의 넋두리로 시작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독백으로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아요.

여긴 홍대 라이즈 호텔이다. 프로듀서 스위트 룸이고 814호다. 나는 시인이고, 어젯밤에 새 시집이 출간됐다. 제목은 <여기까지 인용하세요>다. 처음 시집을 냈을 때 알게 됐다. 책을 낸다는 건 정말 아무 일도 아니구나. 처음 출간 파티를 열었을 때 알게 됐다.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 양 굴어야 하는구나. 그래서 나는 호텔에 온 것이다. 커다란 식탁이 있고, 의자가 여섯 개나 있고, 소파가 있고, 커다란 욕실이 딸린 이 방에서, 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나를 축하할 사람들을. 아직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아무도 초대하지 않고, 식탁에 앉아 새로운 시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지. 시집이 나온 바로 그날 새로운 시집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도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라이즈 호텔이 당신을 환영합니다. 식탁에서 웰컴 카드를 발견했다.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기 위해서 나는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기로 했다. 모험 소설의 화자는 언제나 사건에 휘말려야 한다. 나는 아직 이 호텔에서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으므로, 호텔에 오기 전부터 사건에 휘말렸다는 설정을 잡기로 한다. 나는 죄를 지었다. 살인, 강도, 사기, 중독…. 전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 누명이다. 나는 누명을 쓰고 호텔로 도망을 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실제로 누명을 썼다. 늘 억울했다. 어제 시집이 나왔는데. 파티하기 좋은 호텔에 들어왔는데. 누명을 썼기 때문에 사람들을 초대할 수가 없다. 너희들은 내게 자수를 권하겠지. 자수를 권하지 않는다고 해도 분위기는 엉망일 것이다. 엄청나게 커다란 이 룸의 욕실에는 양방향으로 문이 나 있다. 문이 열려 있으면 불안하니까. 들어올 때 연 문을 닫고, 반대편의 문을 닫았다. 크고 무거운 미닫이문이로군. 다시는 열고 싶지 않아. 욕실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 나는 욕조에 들어가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때 벨이 울렸다. 나를 체포하러 온 것일까? 누구세요? 나는 소리를 지를 힘이 없었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돌렸다. 뜨거운 물이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벨이 다시 울렸다. 여긴 욕실이야. 여긴 치외법권이야. 나는 물이 미지근해질 때까지 욕조에서 나가지 않았다. 여긴 수건이 참 많구나. 샤워 부스에서 웰컴 카드를 발견했다. 환영합니다. 벨이 다시 울렸다.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운을 입고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에코 백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가방 안에는 편지가 있었다. 프로듀서 스위트룸의 투숙을 환영합니다. 15층 바에 칵테일 하나를 어레인지해놓았습니다. 웰컴 카드였다.

흰 커튼을 살짝 걷고 창문 밖을 바라본다. 명동은 명동이 되었고, 신촌이 명동이 되었고, 이대가 명동이 되었다. 그 누구도 명동엔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명동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다. 홍대는 명동이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홍대 근방에 살고 있다. 나를 알고 있는 그 누구도 출간 파티에 초대할 수 없다면 나를 모르는 사람들을 여기 초대하면 되지 않겠는가? 길거리의 사람들을 낚아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에서는 길 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창백한 건물들뿐. 서교프라자. 홍익대학교. 건물에 가려 골목이 보이지 않는다. 주차장 길도. 이런 풍경은 처음 봤다. 명동 같지 않은 홍대다. 하지만 나는 출간 파티를 해야 한다. 나는 사람을 초대하기 위해 호텔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복도. 서늘하다. 아무도 없다. 미로 같다. 나는 내 방이 몇 호였는지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룸 번호를 외운 다음 다시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는 책장과 소파 그리고 외국인들이 있었다. 이 호텔에는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것 같아. 하지만 외국인은 내 책을 읽을 수 없지. 그러니 축하도 하기 힘들 거야. 그래서 나는 4층으로 갔고, 거기엔 피트니스가 있었다. 아무도 없을 거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외로이 러닝머신 위를 뛰고 있었다. 나는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5층으로 발길을 돌렸다. 5층엔 회의실과 컨퍼런스 룸이 있었다. 오전에 무슨 행사가 있었나 보다. 이젠 텅 비어 있었다. 여기다. 여기가 내가 여느 호텔에서든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행사가 끝나고 미처 다 치우지 못한 컨퍼런스 룸. 나는 어쩌면 끝난 행사를 가장 좋아하는지도 몰라. 하지만 아직 내 출간 기념회는 열리지도 않았지. 어서 파티를 해야겠어. 어서 파티를 끝내야겠어. 나는 아무 회의실에나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이 호텔엔 어딜 가나 앉을 곳 투성이이고, 여기저기 테이블마다 사탕이 잔뜩 담긴 유리통이 놓여 있다. 나는 죠스바 맛 사탕을 꺼내 물었다. 회의를 시작합시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미 오후 10시가 다 됐어요. 15층에 가는 건 어때요? 루프톱 바에 칵테일이 준비되어 있다고 했어요. 웰컴 카드가요. 거긴 마지막 보루예요. 거기서도 실패하면 저는 오늘 아무도 초대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별 기대 없이 그냥 음악이라도 들으러 가는 건 어때요. 근데요, 이상하죠, 이 호텔에 들어선 순간부터 라운지 음악이 들렸어요. 힙스터 음악이요. 힙스터 음악이 뭔가요? 몰라요. 그냥 계속 음악이 들려요. 템포가 빠르고 아주 나른한. 엘리베이터에서도, 복도에서도, 그리고 지금 이 회의실에서도…. 그건 당신의 착각입니다. 지금 이 회의실엔 아무 음악도 재생되고 있지 않아요. 어서 루프톱 바에 가보세요. 그리하여 나는 ‘사이드 노트 클럽’에 도착했고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작은 남자를 보았다. 신입입니다만 술은 아주 잘 만듭니다. 그렇군요. 야외로 나가시면 분위기가 아주 좋답니다. 감사합니다. 꼭 가보겠습니다. 나는 얼음을 갈아 만든 제주도 모양 칵테일을 마셨다. 그리고 루프톱에 있는 비닐 이글루로 들어가서 가만히 서 있었다. 비닐 이글루는 무척 추웠다. 사모예드가 필요해. 사모예드 열 마리가 필요해. 같이 여기서 끌어안고 자는 거야.

나는 힙스터 음악이 흐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서 편의점에 들어갔다. 편의점 알바생은 피곤한 것 같았다. 저기요. 저 정말 이상한 사람이 아닌데요. 제가 지금 호텔에서 제 시집 출간 파티를 하려고 해요. 혹시 오시겠어요? 아직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어요. 초대를 더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자고 가시는 건 아니고요. 잠은 사모예드랑 자야 돼서요. 외국 영화에서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파티 오라고 하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외국 영화처럼 구는 건데요. 죄송합니다. 그냥 버튼을 만들어야겠어요. <모렐의 발명>이라는 소설에 보면요.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이 주인공인 소설인데요. 무인도에 가서 숨어요. 그런데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래서 막 비닐 이글루 같은 곳에 숨어서요, 관찰을 하거든요. 일기를 써요. 그 일기가 소설이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사람이 아니고, 모렐이라는 과학자가 만든 홀로그램이었어요. 주인공이 홀로그램과 친해지고요. 그다음은 스포일러라서 말을 못 하고요. 그러니까 저도 호텔에 돌아가서요. 버튼을 누르고요. 홀로그램들과 파티를 하는 거죠. 사실 홀로그램들은 자기들끼리 파티를 하는 건데요. 파티라는 게 그렇잖아요. 다들 자기들끼리 놀죠. 집에도 안 가고요. 한 사람이라도 취하면 거기서 파티는 끝이거든요. 사람 홀로그램을 끄고요. 사모예드 홀로그램을 켜요. 사모예드들과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잘 거예요. 제 방은 프로듀서 스위트룸인데요. 의자가 여섯 개나 있고 식탁이 무지 크거든요. 욕실은 문이 두 개인데요. 그래서 홀로그램이 필요해요. 혼자 있으면 일기 쓰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거든요.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일기에 자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쓰거든요. 저는 그래서 버튼이 필요해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호텔에서 살고 싶은데요. 일기도 재밌게 쓰고 싶거든요. 일기를 시라고 우기고 싶거든요. 그래서 또 시집이 나오면. 출간 파티를 하긴 해야 되거든요. 어쩐지 그렇거든요. 글 / 김승일(시인)

    에디터
    김아름
    포토그래퍼
    최용준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