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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의 새로운 면면

2020.01.16GQ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고향, 공예가와 디자이너들이 생동감 넘치게 움직이는 창작의 메카, 발칸 지역의 가장 낙관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는 르네상스적 도시. 우리가 몰랐던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의 새로운 면면.

야수적인 느낌의 제넥스 타워.

스퀘어 나인 호텔의 빈티지 가구와 사진.

스퀘어 나인 호텔의 식당.

브루탈리즘 양식의 에어로 클럽 빌딩.

동시대 예술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현대미술관.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리빙 콘셉트 스토어의 입구.

국제회의와 문화 행사가 열리는 사바 센터.

스퀘어 나인 호텔 벽에 걸린 엽서.

프랑스에 대한 감사 기념비.

레트로한 느낌의 즉석사진관.

구 공군본부 건물의 이카루스 조각상.

자다르스카 거리의 건물.

축구와 관련된 역동적인 벽화.

스퀘어 나인 호텔의 인테리어.

따뜻한 색감의 스퀘어 나인 호텔.

묵직한 외관의 법원 청사.

프랑스에 대한 감사 기념비.

도르촐 지역의 빈티지 가게.

성 마르코 성당.

스퀘어 나인 호텔의 로비.

다른 동유럽 도시들이 최근 몇 년간 입소문을 타며 유명해지는 동안에도 세르비아의 수도는 빛을 보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한눈에 반하게 되는 그런 곳이 아니다. 15년 전 리포터로 처음 이곳에 도착한 나를 사로잡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해가 지나고 방문을 거듭하는 동안 이전에는 단지 이해할 수 없어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없으면 못 사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공항에 내려 시내로 들어서는 나를 반겨주는 뉴 베오그라드의 유고슬라비아 시절 브루탈리스트 건축물들이 그렇고, 부유한 세냐크 Senjak 지역에 자리 잡은 뜻밖의 아프리카 예술 박물관도 마찬가지다. 한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장엄한 제문 지구, 축구 영웅들을 기리는 대형 거리 벽화의 재치와 예술성, 아다 치간리야 Ada Ciganlija의 고요하고 숲이 빼곡한 하중도, 그리고 정처 없이 걸으며 구경하는 재미가 끊이지 않는 스카다리야 Skadarlija도 있다. 상점 유리창 안에 놓인 기발하고 별난 아이템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아무도 모르는 보물을 내가 독차지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과거 사회주의 시절의 미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관점의 수공예를 시도하는 창작자와 예술가들 덕에 베오그라드는 오늘날 발칸 지역의 가장 흥미로운 디자인 도시로 급부상했다. 베오그라드가 나를 가장 매료한 건 어쩌면 독자적이고 고유한 창작자의 혼일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도전적인 자세로 베오그라드의 풍경과 외양에 변화를 만든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공예가와 예술가, 셰프, 디자이너들이 도시의 다양한 퍼즐 조각에 의미를 부여하고 국가 정체성을 되찾는 동시에 신선한 활기를 불어넣는 중이다.

균형을 잡기 어려운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따라 걷는 것은 모험을 떠나는 것과 같다. 평범해 보이는 계단이나 그라피티로 뒤덮인 골목길이 새롭고 특이한 세상으로 나를 인도할지 모를 일이다. 마치 옷장 뒤 비밀의 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말이다. 원래 켈트족과 로마족의 정착지였던 코산치체브 베나츠에 들어선 커피색과 박하색 건물들 중 하나인 20세기의 수학자이자 발명가 미하일로 페트로비치 알라스의 아르누보 양식 자택 건물 지층에서 발견한 건 마카담 Makadam의 매장이다. 부르봉 왕궁 스타일로 인테리어를 꾸민 매장 내부에는 사진 프린트, 인류학자 겸 디자이너인 아나 스르디츠가 만든 반지, 스트리트 아티스트를 다룬 풍선껌처럼 화사한 핑크색의 커피 테이블 북, 수작업으로 깎아 만든 조명기구, 원목 풀토이(끈이 달려 끌고 다닐 수 있는 장난감), 중세 수도원의 꽃 문양을 수놓은 베갯잇이 진열되어 있다. 오늘날 베오그라드의 건축 양식만큼이나 다채로운 재능들을 한데 모은 전시 같다. 마카담 설립자 밀레나 라덴코비치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이 거리에 마카담 콘셉트 스토어를 열었다. 런던과 밀라노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2011년 베오그라드로 돌아오며 세르비아의 창작자와 공예가들을 향한 열정이 다시 한 번 타올랐다고 한다. 이후 두 달간 전국을 여행하며 이제는 잊힌 공예가들을 물색하고 킬림 원단을 구해 베갯잇으로 재활용하는 한편, 본인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보이보디나 북부 지역에서 자라는 골풀을 꼬아 클러치 백을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다. 마카담은 세르비아식 쿨함의 새로운 면면을 종합적으로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라져가는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자국의 잊힌 공예에 조명을 비추기도 했다. “대부분의 장인들은 나이가 굉장히 많고 21세기에 적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죠.” 마카담 옆에 위치한 비스트로에서 라덴코비치는 내게 설명한다. “하지만 요즘은 모든 럭셔리 사업 모델이 장인 생산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리고 그건 세르비아 사람들이 자신 있는 분야고요.” 붉은색 쿠션을 얹은 전통적인 목재 스툴을 갖추고 세르비아산 와인과 다양한 원료로 만든 발칸 지방의 40도짜리 과일 증류주 라키야를 판매하는 이곳의 내부는 광택 콘크리트로 벽면을 마감했고, 영화 <비엔나 호텔의 야간 배달부> 시절 샬럿 램플링에서부터 모터헤드의 레미까지 라덴코비치의 우상들을 담은 사진이 곳곳에 걸려 있다. 주말 밤이 되면 이곳에 모여든 예술가와 뮤지션, 그리고 인근 대학의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손에 잡힐 것만 같은 날것 그대로의 기운을 내뿜으며 내가 기억하는 바로 그 불빛 아래로 나온다.

파리에 갤러리와 부티크, 음식점이 모여 활기를 띠는 몽마르트가 있다면 베오그라드에는 코산치체브 베나츠 Kosaniev Venac가 있다. 마카담에서 모퉁이 하나만 돌면 실험적인 채식주의 음식점 만달라 Mandala가 나타난다. 흰색 기둥이 내부에 늘어선 이곳은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재배한 식물로 만든 다채로운 요리를 선보인다. 매끼 고기 위주의 식사가 일상인 세르비아에서 새로운 시도에 앞장서고 있다. 기원전 279년 사바강과 다뉴브강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진 요새까지 이어지는 시내의 주요 간선도로와 연결되는 크네자 시메 마르코비차 Kneza Sime Markovica 거리에는 베오그라드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또 하나의 콘셉트 스토어가 있다. 패션 디자이너 아나 류빈코비치, ABO, 그리고 리메이크로 구성된 컬렉티브의 매장인데, 각자 공통의 미학을 공유하며 의류와 홈웨어를 제작한다. ABO는 수제화를 만들고 리메이크는 다양한 용도로 변형시킨 자기와 직접 디자인한 식기를 판매한다. 불온하고 반항적인 문구나 그림을 새긴 리메이크의 식기에서 지역 스트리트 아트의 흔적이 엿보이기도 한다. 리메이크를 운영하는 전직 의상 디자이너 요바나 보조비치와 슬로베니아 출신 아티스트 안테아 아리자노비치는 베오그라드가 한때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마침내 되찾은 것 같다고 한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여행을 많이 다녀요. 그리고 다른 도시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왜 베오그라드에는 저런 게 없지?’라고 얘기하죠”라고 보조비치는 말한다. 아리자노비치는 자신이 보기에 발칸 지역에서 가장 활기차고 흥미로운 도시가 베오그라드였기 때문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예전에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걸 실행에 옮기려는 사람이 없었죠. 하지만 이제는 움직일 용기를 가졌어요”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유럽의 일부 유서 깊은 문화 중심지는 때때로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져 과거의 영광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오늘 내가 만난 이들은 진취적이고 생생한 낙관주의를 품고 있다. 베오그라드와 뉴욕, 로마, 파리를 오가며 활동 중인 행위 예술가 마르타 요바노비치의 말에 따르면 베오그라드는 ‘르네상스적 도시’다. “피렌체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굴곡진 역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변화시킬 원동력이 있다는 의미예요.”

내가 처음 베오그라드에 발을 들인 것은 2004년이었다. 코소보 전쟁 도중 남부의 알바니아인 자치구에 대한 인종 박해를 막기 위해 개입한 NATO군이 폭격을 감행해 억지로 항복을 받아낸 지 5년이 지난 해였다. 발칸 반도의 복잡한 지정학적 맥락이 낯선 이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당시 모든 책임을 세르비아가 져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고,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세르비아의 분쟁 종결 후 회복 과정을 취재하기 시작한 상황이었고 그 후로도 6년에 걸쳐 취재를 계속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달은 건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 벌어진 전쟁들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편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베오그라드에서 내가 받은 첫인상은 피로와 좌절감에 잠긴 도시였다. 특색 없는 상점가 인근에 위치한 당 본부청사에 거대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Slobodan Miloševi 배너가 걸려 있었는데 그 당시 이미 밀로셰비치는 헤이그에서 전범재판을 받는 중이었다. 오로지 분쟁에만 초점을 맞춰 베오그라드의 역사가 회자되는 방식이 이제는 지겹다. 그들은 이 도시가 로마 제국과 오토만 제국의 점령을 견뎌냈으며 세르비아 국립도서관을 비롯한 다수 건축물이 나치의 폭격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폐허가 된 국립도서관의 토대는 기념의 의미로 그대로 남겨두었다.

베오그라드의 길고 풍부한 예술 및 문화의 역사는 너무나 쉽게 간과되곤 한다. 이곳의 젊은 세대는 최근에 들어서야 이러한 역사로부터 영감을 받고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 올해 9월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작업을 폭넓게 조망하는 회고전이 40여 년 만에 작가의 고향인 베오그라드의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녹음이 우거진 조용한 뉴 베오그라드에 자리한 모더니즘 건축물인 현대미술관은 보수를 위해 지난 10년간 문을 닫았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현대 미술계에 베오그라드를 알린 건 아브라모비치를 비롯한 세르비아 출신 행위 예술가들이었다. 오늘날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는 아브라모비치의 위상은 후일 미국으로 건너간 전기기술자 겸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에 뒤지지 않는다.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은 브라차르 주거지역에 위치한 1920년대 저택에 자리 잡고 있다. 세르비아 국립박물관도 현대미술관처럼 15년간 폐관 상태였다가 지난해 들어서야 다시 문을 열었다. 이는 세르비아의 한 세대 전체가 40만 점이 넘는 티치아노, 카날레토, 마티스, 르누아르, 그리고 샤갈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놓쳤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와 같은 문화적 공백기가 베오그라드의 예술가 및 창작자들로 하여금 사바말라 Savamala 지역에서 전시와 공연, 강연을 기획하는 비상업적 공간 KC Grad, 그리고 아브라모비치의 문화적 후계자라 할 수 있는 마르타 요바노비치가 설립한 예술 플랫폼 퍼포먼스 허브 Hub 등 자체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하도록 촉발한 것일 수도 있다.

베오그라드의 패션계도 주목할 만하다.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건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록산다 일린칙 Roksanda Ilini이지만 그 외에도 베오그라드를 무대로 활약하며 세르비아 스타일을 표방하는 뛰어난 디자이너들이 테라지예 광장 인근의 버려진 야외 쇼핑몰에 형성된 베오그라드 디자인 지구로 속속 모여든다. 알렉산드라 랄리치 Aleksandra Lali는 예술작품에 가까운 극적으로 구조적인 드레스와 수트, 코트를 선보여 세르비아 패션상을 수차례 수상했다. 분주히 돌아가는 공방 아래 있는 매장에서 만난 그녀는 베오그라드의 패션이 도시 자체만큼이나 다양하다고 설명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선명하고 강렬한 촉각적 원단 사용과 건축적 디자인이다. “우리는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색이나 패턴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편이에요”라고 랄리치는 말한다. 보다 로맨틱한 것을 원한다면 실크 포 브렉퍼스트가 있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비단 기모노, 스모킹 재킷, 바지, 드레스를 주문 제작 방식으로 판매하며 제품의 제작 과정은 전부 세르비아 내에서 이뤄진다. 베오그라드의 의류 업계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품질이 더더욱 좋을 수밖에 없다.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장인과 예술가, 구두 수선공, 그리고 제빵사까지 모두 이처럼 긴밀한 가족적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 베오그라드의 인텔리겐치아가 사랑하는 밝은 분위기의 카페 도콜리차 Dokolica가 실크 포 브렉퍼스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고, 50년 된 낡은 구두 수선소가 호마 비스트로트 Homa Bistrot와 오드 우스타 도 우스타 Od Usta Do Usta 같은 좀 더 인디 분위기를 내는 가게들 옆을 지킨다. 하지만 지금껏 베오그라드에서 발견한 가장 흥미로운 음식점은 빠르게 변해가는 사바말라 지구 인근의 평범한 건물에 자리 잡은 아이리스 뉴 발칸 퀴진이다. 사바말라에는 발칸 지역 최대 규모의 쇼핑센터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곳은 논란 속에서 내년도 개장을 앞두고 있다. 매주 3일 동안만 영업을 하는 이 작고 아늑한 음식점은 사르마(다진 돼지고기 양배추 쌈) 같은 전통 음식을 재해석한다. 세르비아 전역에서 신선한 유기농 재료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으며, 집집마다 자랑하는 나름의 가정식 비법 레시피를 바탕으로 매년 잼과 라키야 Rakija, 아이바르 Ajvar(붉은 고추 소스)를 만들어 저장한다. 살롱 5, 비스트로 말리 피야츠 Mali Pijac, 랑구스트 Langouste 등 세련된 식당들도 있지만 진짜 수준 높은 요리는 결국 각 가정의 주방에서 만들어진다. 사회주의 체제와 제재조치 속에서 다년간 세월을 보낸 세르비아인들은 디자인이 과하거나 지나치게 부풀려진 데는 돈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베오그라드의 매력 그 자체이다. 매끄럽지 않고 완벽하지도 않지만 대신 정직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많은 것을 이뤄냈으며 그 안에는 진심이 가득하다.

Where to Stay
브라질 출신 건축가 이자이 웨인펠드가 설계한 스퀘어 나인(Squarenine.rs)이 더 이상 시내의 유일한 부티크 호텔은 아니지만 명소로서의 위상은 여전하다. 지난 수년간 배우, 예술가, 정치가들이 거쳐간 이곳의 모더니즘 가죽 의자는 잘 길들여졌고 고풍스런 지구본과 둥근 조명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세기가 바뀔 무렵 지어져 랜드마크가 된 수출은행 창고 건물에 자리 잡은 사바말라 B&B(Savamalahotel.rs)는 11개의 아늑한 객실에 빈티지 가구와 예술품, 뱅커스 램프를 갖추고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근 워터프론트(Belgradewaterfront.com)에는 세인트 레지스와 W 호텔이 2022년에 개장할 예정이다. 근래 들어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세련된 호텔로 명성을 얻은 건 세인트 텐(Saintten.com)이다. 세르비아 정교회 설립자 성 사바를 기념하는 웨딩케이크 모양의 성 사바 대성당과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 모두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에디터
    Ginanne Browell Mitic
    포토그래퍼
    Matthew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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