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 브라이언트는 천재가 아니다 | 지큐 코리아 (GQ Korea)

코비 브라이언트는 천재가 아니다

2020-01-29T14:58:39+00:00 |culture|

2020년 1월 26일. NBA 전설, 코비 브라이언트가 세상을 떠났다. 헬리콥터 추락사고였다. 사고 당시 코비는 그의 13살 둘째 딸 지아나와 함께 ‘맘바 아카데미’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의 죽음은 단신 속보로 보도됐지만, 그의 일생은 쉽게 축약하기 힘들다.

코비 브라이언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은 즉시 죽음을 애도했다. 코비 브라이언트의 멘토였던 마이클 조던은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을 말로 다 담을 수 없다. 코비는 내 동생이나 다름없었다”라고 말했고, 르브론 제임스는 코비가 남긴 것들을 자신이 반드시 이어가겠다고 약속했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만 41세로 생일 마감했다. 1996년 NBA 신인 드래프트부터 2016년 그의 은퇴 경기까지 20년 동안, 다섯 번의 NBA 챔피언십, 두 번의 파이널 MVP, 리그 MVP, 네 번의 올스타 MVP, 두 번의 득점왕, 열 여덟 번의 NBA 올스타, 두 번의 올림픽 금메달, 그리고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한 사람이 업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이력이지만 코비의 동료들은 그의 빛나는 커리어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한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좋은 멘토이자, 빅 브라더, 리틀 브라더, 그리고 그 누구보다 좋은 가장이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1998 Australia Promotion Tour

Rookie, 최연소

생일도 지나지 않은 만 17세 소년, 이제 막 고등학교를 마치고 NBA의 문을 두드린 코비 브라이언트의 이름이 1996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열세 번째로 부름을 받았다. 최근 NBA에는 대학을 마치지 않고 고등학교에서 바로 NBA 드래프트에 도전하는 어린 선수들이 많아졌지만, 90년대에는 절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코비 이전에는 케빈 가넷, 이후에는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있었지만 이들 이전 60-70년대 선수들 중에선 단 세 명 밖에 없었다. 코비는 샬롯 호넷츠에 뽑히자마자 LA 레이커스로 트레이드되었고, 그렇게 역사는 시작됐다.

코비는 NBA 코트를 밟은 최연소 선수이자 최연소 스타팅 멤버가 됐다. 이후 NBA 올스타 게임 루키 챌린지에 참여한 그는 18세의 나이로 NBA 역대 최연소 슬램 덩크 챔피언이 되었다. 그의 두 번째 시즌에는 팬 투표를 통해 최연소 NBA 올스타 스타팅 멤버에 뽑혀 마이클 조던을 상대했다.

시작부터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 같이 들리지만, 사실 코비의 루키 시절은 절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꽃길이 아니었다. 레이커스에는 이미 에디 존스와 닉 밴 엑셀이라는 유망주 선배들이 있었고, 코비를 시기한 팬들은 물론 선수들로부터도 어딜 가나 ‘고등학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게다가 그의 커리어 내내 줄곧 마이클 조던과 비교되며 조던 팬들의 미움을 받았다.

2000 NBA Western Conference Finals

Three-peat, 쓰리핏

97-98 시즌을 마지막으로 마이클 조던이 은퇴했다. 1999년, 마이클 조던의 은사이자 그와 함께 6번의 NBA 우승을 이끈 필 잭슨 감독이 레이커스에 부임했다. 운명과 승리의 여신이 코비 브라이언트에게 미소 짓기 시작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센터였던 샤킬 오닐과 역사상 최고의 원투 펀치, 센터-가드 듀오가 되었고, 코비는 이미 리그 최고의 슈팅 가드가 되었다.

필 잭슨의 지도 아래, 코비와 샥(Shaq)의 레이커스는 2000, 2001, 2002년 3년 연속 NBA 챔피언에 올랐다. 다만, NBA 4년 차만에 우승 반지를 끼는 영광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코비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승은 코비가 아닌 샤킬 오닐 덕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이클 조던의 위업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반감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001년부터 샤킬 오닐과의 불화가 시작되었다.

2001 Kobe Bryant and Shaquille O”Neal

Down fall, 내리막 길

영광이 너무 컸던 탓일까, 좋지 않은 일들도 한 번에 몰려왔다. 쓰리핏 이후 2년간 레이커스는 내리막 길을 걸었다. 후에 명예의 전당에 오른 NBA 전설, 칼 말론과 개리 페이튼을 영입하여 다시 한번 우승에 도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극에 달한 코비와 샤킬 오닐과의 좋지 못한 관계로 인해 2004년을 마지막으로 오닐은 레이커스를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필 잭슨 감독의 계약은 연장되지 않았고, 같은 해 필 잭슨의 저서에서는 코비를 ‘un-coachable(가르칠 수 없는, 말을 듣지 않는 선수)’로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코비는 앞선 시즌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에 휘말려 계속된 조사와 세간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2004 NBA Western Conference Semifinals

Mamba Mentality, 맘바 멘탈리티

보통 선수들은 위와 같은 과정에서 무너진다. 떨어지는 성적, 부상 등으로 인해 계속해서 팀을 옮기게 되는 이른바 져니맨(Journey man)이 되거나 술과 마약에 손을 대 그대로 은퇴하는 선수들도 있다. 하지만 코비는 보통 선수가 아니었다.

승리에 대한 집착, 의지, 경쟁심. 코비가 늘 조던과 비교되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그의 플레이 스타일 또한 그러했다. 실제로 마이클 조던이 직접, 코비와 자신은 “(승리에 집착하는) 저주를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코비가 조던과 다른 점이 있었다. 신이라고 불리는 마이클 조던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모터사이클, 골프, 심지어 도박 등의 취미가 있었지만 코비에게는 농구밖에 없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취미도 없고, 고등학교 때는 여자 친구를 집으로 불러 데이트 대신 함께 농구 비디오를 봤다고 한다. 경기 후에 동료들과 어울린 적도 없고, 오랜 경쟁자이자 동료였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와도 마이클 조던의 비디오를 돌려보거나 같이 운동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심지어 맥그레이디에게는 좀 쉬어도 되지 않겠냐고 권유하고 코비 혼자 몰래 운동을 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별명인,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공격적인 독사, 절대 먹이를 놓치지 않는 ‘블랙 맘바’가 잘 표현하고 있다.

2006 Golden State Warriors v Los Angeles Lakers

Stand alone, 홀로서기

2005-2006 시즌부터 진정한 코비의 역사가 시작됐다. 처참했던 내리막길을 버텨낸 그는 운동선수로서의 기술과 경험뿐만 아니라 리더로서도 성장했다. 정신적으로도 많은 성숙했다. 다시 감독으로 복귀한 필 잭슨과 더 이상의 의견 차이는 없었고, 덕분에 그의 20년 커리어 동안 가장 훌륭한 개인 성적을 기록한 해이기도 했다.

2006년 1월 22일, 코비는 토론토 랩터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홀로 81 득점을 기록했다. 레이커스 프랜차이즈 기록이었던 엘긴 베일러의 71점을 갈아치웠고, 윌트 챔벌린의 100점 기록에 이어 NBA 역사상 한 경기 개인 최다 득점 2위에 올랐다.

8 & 24, 성장과 성숙

2006-2007 시즌부터는 기존의 백넘버 8번 대신 24번을 달고 코트를 밟았다. 24번은 그의 고등학교 시절 첫 백넘버이기도 했고, 루키 시절에도 해당 번호를 원했지만 구단측으로부터 거절당해서 8번을 달았었다고 한다. 8번은 그가 아디다스 캠프에서 입었던 143을 하나로 합친 번호이기도 하고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탈리아에서 사용했던 번호였다. 코비의 CBS 인터뷰에서 그는 8번을 두고 ‘이제 막 NBA에 들어와서 존재를 증명하려는 자신’이었고, 24번은 ‘한층 더 성장하고 성숙했으며 넓은 시야를 갖기 시작한 자신’이라고 말했다.

8번의 코비는 3번의 NBA 챔피언십, 득점왕, 8 차례의 올스타에 선정, 총 16,777점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24번의 코비는 2번의 NBA 챔피언십, 득점왕, 10차례의 올스타 선정, 총 16,866점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레이커스는 그의 8번과 24번 모두를 영구결번시켰으며, 두 개의 영구결번 번호를 가진 선수는 NBA 역사상 코비가 유일하다.

2008 Beijing Olympic Games

Come back, 다시 챔피언으로

2008년, 레이커스는 후에 코비 브라이언트의 최고 조력자가 되는 파우 가솔을 영입했다. 당시 심각한 손가락 부상에도 불구하고 코비는 정규 시즌 82경기를 소화했고, 57승 25패를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1위에 등극한다.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아쉽게도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했지만, 샤킬 오닐 없이 처음으로 다시 레이커스를 NBA 결승전에 올렸다. 2008 정규 시즌 MVP를 받았다.

같은 해 코비 브라이언트는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2000년에는 결혼 때문에, 2004년에는 사건 조사 때문에 올림픽에 참여하지 못했다) 미국 국가 대표팀은 2004년 올림픽에서 아르헨티나에 패하면서 동메달에 그쳤었다. 이를 설욕하기 위한 Redeem Team(Dream Team의 언어유희)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2012년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받았다.

2009 NBA Finals Game 5

2009년, 코비와 레이커스는 전 시즌보다 더 뛰어난 성적인 65승 17패로 다시 한번 서부 컨퍼런스 1위를 달성했고, 2월 2일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뉴욕 닉스와의 경기에서는 홀로 61점을 득점, 메디슨 스퀘어 가든 역사상 최다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2009 NBA 결승전에서 만난 드와이트 하워드의 올랜도 매직을 5차전에서 격파, 2002년 이후 7년만에 코비는 다시 한번 NBA 챔피언에 등극했다. 지난 힘든 시간들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고, 루키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비난했던 사람들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또 샤킬 오닐 덕분이 아닌 코비 브라이언트 자신의 힘으로 이뤄낸 우승이었기에 그의 네 번째 우승 반지는 더 값진 의미를 지닌다.

2010년에도 코비는 잦은 부상에 시달렸지만 3년 연속 레이커스를 서부 컨퍼런스 1위에 올리고, 3년 연속 결승전에 진출시켰다. 결승전 상대는 2008년에 패배 안겨줬던 보스턴 셀틱스. 80년대 매직과 버드의 시대 이후 또다시 맞붙게 된 두 명문 구단의 경기는 7차전까지 이어졌고 마지막 경기에서 13점 차를 뒤집고 지난 패배를 설욕하며 백 투 백(back to back) 우승, 통산 다섯 번째 챔피언에 올랐다.

Still Standing, 그 이후

한 편의 영화처럼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역사는 해피엔딩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이후에도 코비는 2011 올스타 게임 MVP에 선정되었고, 2012년에는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그가 은퇴하기까지 계속해서 올스타로 선정되었지만 그가 그토록 원했던 여섯 번째 우승은 손에 닿지 않았다. 그의 은사 필 잭슨도 2011년을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물론 이 시점에서는 이미 많은 코비의 옛 안티팬들이 그의 팬으로 바뀌었지만, 그가 받는 연봉이 너무 많다며, 슛을 너무 많이 쏜다며, 그는 이제 끝났다며 비난하는 사람들은 여전했다.

2013 Golden State Warriors v Los Angeles Lakers

2013년 4월 12일, 정규 시즌 막바지 경기를 치르고 있던 코비 브라이언트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이미 잦은 부상에 시달리고 있던 코비는 경기 3 쿼터에서 무릎을 붙잡으며 쓰러졌다. 그래도 다시 일어난 그는 계속해서 싸웠다. 4 쿼터, 경기 종료 3분 만을 남긴 상황, 돌파를 시도하는 코비는 다시 한번 쓰러졌다. 이번에는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경기 해설자들은 그가 왼쪽 발목을 마사지하는 것 같다고 했지만 사실 그는 자신의 발목을 더듬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힘줄이 없었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것. 코비는 다시 일어났다. 절뚝거리며 한 발로 버티며 그에게 주어진 두 개의 프리드로우를 성공시키고 나서야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코트 밖으로 나갔다. 전 세계 많은 팬들이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Mamba out, 은퇴

아킬레스건 부상을 딛고 돌아온 선수는 많지 않다, 아니 사실상 예전의 기량으로 돌아온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코비도 돌아왔지만 계속된 부상으로 경기 결장과 시즌 아웃을 반복했다. 2015년 11월 29일, 결국 코비는 The Player’s Tribune(플레이어즈 트리뷴)을 통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것을 밝혔다. 코비 브라이언트 정도의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될) 선수가 은퇴를 선언하게 되면, 그의 남은 경기 동안 각 구단에서는 그의 마지막 경기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예우를 보인다. 하지만 코비는 그의 상대 팀들과 선수들에게 그 어떤 세리머니도, 선물도 준비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코비다운 선택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코비는 그가 처음으로 NBA 무대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사랑보다는 미움과 비난을 더 많이 받았다. 마이클 조던의 팬들로부터, 전통 레이커스의 팬들로부터, 그리고 그가 패배를 안긴 필라델피아, 보스턴, 새크라멘토의 팬들로부터 온갖 야유와 조롱을 들어왔다. 하지만 코비가 레이커스의 오랜 숙적, 보스턴의 TD 가든과 필라델피아와 새크라멘토 구장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일어서서 박수로 그를 맞이 했고, 구단들은 그를 위한 특별 영상을 준비했다. 더 이상의 미움과 증오는 없었다. 사랑과 존경만이 남았을 뿐.

2016 Utah Jazz v Los Angeles Lakers

2016년 4월 13일, 코비 브라이언트는 유타 재즈와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이 날 코비는 60점을 꽂아 넣었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지고, 무릎, 어깨, 손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 37세 노장의 선수가 자신의 은퇴 경기에서 60점을 넣은 것이다. (이것 또한 기록으로 남았다.) 경기 후 옛 동료 샤킬 오닐은 인터뷰에서 “내가 경기 전에 코비에게 50점은 넣어야 하지 않겠냐 했더니, 그 X자식이 60점을 넣었어”라고 말했다. 코비의 마지막 시즌, 레이커스의 기록은 17승 65패로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악의 기록을 남겼고, 같은 날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는 73승 9패를 기록하며 NBA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하지만 이날, 모두 코비의 ’60점’만을 기억했다.

Family Guy, 코트 밖에서의 코비

코비 브라이언트는 평생 농구만 하며 살았다. 앞서 말했듯이 취미도 없고, 동료는 있었어도 이렇다 할 절친도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은퇴를 선언했을 때, “과연 이 사람이 농구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그의 팀 동료들, 라이벌들, 감독과 멘토들이 하나 같이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는 정말 좋은 아버지이자 좋은 남편이었다는 것이다.

사고 전 날의 코비 브라이언트, @slowmotion00

미국 프로 선수들은 그들의 생활 대부분을 집 밖에서 보낸다. 경기가 없는 날에 가정을 돌보는 NBA 선수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예를 들어, 마이클 조던은 경기장 밖에서도 마이클 조던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의 오랜 친구인 찰스 바클리의 인터뷰에 의하면 식사자리에서 물도 빨리 마시고, 심지어 뒤처지기 싫어서 남보다 앞서 걷는다고 한다. 세상 모든 것이 경쟁인 조던과는 달리 코트 밖에서의 코비는 굉장히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주유소에서 팬들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한참을 이야기 나누기도 하고, 미국 국가 대표팀 출정식에서도 모든 선수들이 식장을 빠져나갔을 때 홀로 끝까지 남아서 팬들에게 싸인을 해줬다. 2011년 방한했을 때에도 그는 농구 클리닉 자리에서도 열정적으로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어린 선수들을 지도했다. 무엇보다, 코비의 웃음을 꼭 빼닮은 둘째 딸, 지아나와 함께 어디든 다녔다.

코비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다. 솔직히 나도 그를 미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막 NBA에 들어온 루키가,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마이클 조던과 비교되는 것이, 어쩌면 조던의 업적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3번과 2번 연속의 우승이 미웠고 그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팬들이 어떤 말을 하든 코비는 자신은 그냥 코비 브라이언트 일 뿐, 단 한 번도 자신이 조던 혹은 그 누구보다 나은 선수라고 말하지 않았다.

농구팬들은 조던, 코비, 르브론의 천재성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코비는 성공보다 많은 실패를 겪은 선수고 천재보다는 노력파에 가깝다. 그가 아킬레스 부상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프리드로우 2개를 마치고 다리를 절면서 경기장을 나갔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한 선수의 루키 시절부터 은퇴식까지 모두 지켜본 팬으로서, 코비 브라이언트에 대한 이야기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