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이라서 가능한 [사랑의 불시착]의 윤세리 | 지큐 코리아 (GQ Korea)

손예진이라서 가능한 [사랑의 불시착]의 윤세리

2020-02-07T14:36:20+00:00 |tv|

<사랑의 불시착> 속 윤세리는 판타지 가득한 캐릭터다. 그동안 현실이 짙게 묻어나는 로맨스 여주인공으로 내공을 쌓은 손예진이기에 소화할 수 있는 배역이다.

“윤세리, 너한테 주마.” 눈칫밥만 먹고 자라서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난 듯 보였던 막내딸. tvN <사랑의 불시착> 속 윤세리는 자신을 반기지 않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돌아서던 순간, 자신에게 회사를 넘겨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놀라 돌아선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정리하고 대답한다. “네, 그럴게요.” 그리고 자신을 밀어내지 못해 안달이었던 오빠들과 어머니를 앞에 두고 한 마디 더 덧붙이는 패기까지 보인다. “근데 아버지 자리라면 자회사 대표들 인사권까지 주어지는 건가요? 잘됐네요. 몇몇 대표들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사랑의 불시착>의 시작은 그동안 배우 손예진에게서 쉽게 볼 수 없었던 꼿꼿한 태도로 시작된다. 그의 인기를 치솟게 만든 영화 <클래식>에서 손예진은 늘 조금 몸을 움츠리고 있는 듯 보이는 가녀리고 맑은 이미지의 소녀였고, 이런 손예진의 모습은 여전히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 제작된 멜로 영화를 얘기할 때 이 작품을 빼놓을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로 남았다. <무방비도시>, <스포트라이트>, <해적>, <나쁜 놈은 죽는다> 등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강한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작품도 있었지만, 정작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늘상 언급되는 작품들은 청초함, 사랑스러움이라는 키워드 안에서 조금씩 변주된 캐릭터를 보여준 <클래식>, <여름향기>, <내 머릿속의 지우개>, <연애시대>, <아내가 결혼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등의 로맨스물이었다.

그러나 손예진이 대중의 환상 속에 갇힌 여성 캐릭터를 연기했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매력이 배가 된 작품들 속 캐릭터들은 대부분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인물들이었다. 드라마 <연애시대>의 유은호, <개인의 취향>의 박개인,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윤진아,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의 주인아 등이 그 예다. 이들은 모두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성의 이미지와는 별개로 제각기 자기 몫으로 감당해내야 할 삶의 무게와 스스로 지켜가야 할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현재 방송 중인 <사랑의 불시착> 속 윤세리가 남한의 재벌가 여성과 북한의 총정치국장 아들이 사랑에 빠지는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살아내는 강단 있는 여성의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윤세리의 삶은 리정혁과의 만남 그 자체보다 신뢰나 사랑 등 추상적이지만 반짝이는 가치들을 발견해 가는 과정 안에서 먼저 빛이 난다. 손예진이 해석하는 윤세리의 인생사를 읊는 것만으로도 로맨스의 한 줄기를 완성할 수 있을 만큼 그는 설득력 있게 드라마를 끌어나간다. 전혀 현실성이라고는 없을 법한 이야기를, 한없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을 듯한 분단국가의 이야기를 황당하리만치 능청스럽게 풀어가는 <사랑의 불시착>이 왜 손예진을 필요로 했는지 알 수 있다. 판타지를 판타지가 아닌 것처럼 보여줄 수 있는 센스와 연륜을 갖춘 배우, 손예진을 통해 <사랑의 불시착>은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