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태권도 수난시대

2020.02.07GQ

도쿄 올림픽에서 태권도 경기복 하의가 타이츠로 교체된다. 올림픽 퇴출 위기에 놓인 태권도가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라지만, 대중과 연맹 사이의 온도차가 크다.

최근 투기 스포츠의 대세는 종합격투기다. 타격과 레슬링, 주짓수 등의 그라운드 무술이 뒤섞인 경기 방식으로 영어로는 MMA(Mixed Martial Arts)라고 부른다. 펀치와 킥은 물론이고 조르기와 꺾기도 가능하다. 실전, 그러니까 싸움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종목이다. 아직까지 종합격투기를 제도권에 들어와 있는 스포츠로 보기엔 무리라는 시선도 있지만, 전 세계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스포츠의 변두리에서 메인 스트림으로 빠르게 진입 중이다.

세계 최고의 종합격투기 프로모션인 UFC가 인기를 증명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걸 떠나서 경기가 화끈하다. 얼굴에 선혈이 낭자하고 선수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잔인한 장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고는 하나, 묘한 중독성이 있다. 한 선수가 상대방을 제압하는 장면이 시청자를 순식간에 흥분시킨다. 투기 스포츠의 원초적인 매력에 가장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코리안 좀비’ 정찬성을 주목해보자. 그는 UFC에서 8경기를 뛰었고, 모두 판정 이전에 승부를 봤다. KO 승 아니면 KO 패였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싸운다. 정찬성이 전 세계에 골수팬들을 지니고, 그들에게 열광적 지지를 받는 이유다. 정찬성의 경기는 게임 이후에도 영상을 찾아서 보게 할 정도로 중독성이 강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투기 종목의 꽃은 KO 또는 한판이다. 어떻게든 한 명이 쓰러져 결판이 나야 속이 시원하다. 그래야 게임이 달고 맛있다.

자본주의에 찌든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투기 종목에 흥행성을 요구한다. 각 종목은 올림픽에서 살아남기 위해 화려한 공격 기술이 많이 나오도록 규정을 바꾸고 있다. 아마추어 복싱이 대표적이다. 프로 복싱처럼 선수들의 헤드 기어를 벗겼다. 과거와 달리 프로 복서의 출전도 허락했다. 죽다 살아난 레슬링도 생존 싸움에 여념이 없다. 레슬링은 올림픽 무대에서 퇴출될 뻔했다. 2013년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집행위원회를 열고 레슬링을 2020년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해 버렸다. 올림픽에서 가장 오래된 종목 중 하나가 제외된다는 예고는 세계적인 이슈였다. 나중에 턱걸이로 다시 채택된 뒤에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큰 기술이 자주 나오도록 규정을 부단히 수정 중이다. 이 사건은 재미없는 종목, 즉 올림픽 흥행 수입에 기여가 적은 종목은 제아무리 정통성이 있다고 해도 쫓겨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남겼다. ‘발펜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태권도도 마찬가지였다.

“요가 레깅스 아닌가요?” 누군가는 지난해 세계태권도연맹(WTF)이 2020년 도쿄 올림픽에 도입하기로 결정한 겨루기 경기복을 보고 이렇게 반응했을지 모른다. 상의는 기존 도복 형태를 유지하되, 하의는 몸에 완전히 달라붙는 타이츠 형태의 디자인.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다. 도복보다 가벼워서다. 선수들이 회전이 들어간 큰 발차기를 하는 데 부담을 적게 느낀다는 것이다. 세계태권도연맹은 문대성이 2004년 그리스 올림픽 결승전에서 보여준 뒤후리기 KO 승 장면이 자주 연출되길 원한다. 더 강한 발차기를 유도해 KO 승부를 장려하겠다는 의도다. 게다가 타이츠를 입은 다리는 굴곡이 훤히 드러난다. 관중과 시청자가 발차기를 더 뚜렷하게 볼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세상사 늘 그렇듯 파격은 반대에 부딪힌다. 세계태권도연맹은 반발 세력 목소리에 살짝 물러나야 했다. 지난해 12월 하의를 타이츠 형태로 만드는 대신 기존 도복에서 바지폭을 줄이는 쪽으로 궤도를 수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 보가 아닌 반보 후퇴였다. 하의를 타이츠만큼 신축성 좋은 재질로 바꾸고 색상을 컬러풀하게 만들겠다는 여지를 남겼으니 말이다. 그만큼 세계태권도연맹 의지가 확고하다. 이 덕에(또는 탓에) 올여름 우리가 알던 태권도 경기와 다른 그림을 볼 수 있다. 세계태권도연맹은 가벼운 새 경기복과 궤적이 큰 공격에 높은 점수를 주는 채점 방식이 태권도를 화끈하고 공격적인 무술로 진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는 늘 역설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조정원 총재가 선장을 맡은 2004년부터 세계태권도연맹은 과감한 행보를 이어왔다. 전자 호구 도입, 품새 세부 종목 채택, 회전 공격 추가 점수, 5인 태그 단체전 등 다양한 시도를 계속했다. 도쿄 올림픽에 앞서 경기복 규정을 과감하게 바꾼 것도 이러한 생존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절묘하게도 새 경기복 디자인에 태권도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생존이라는 목표 아래 진보와 보수가 뒤섞여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는 중이다. 지킬 건 지켜야 한다는 세력과 바꿀 건 바꿔야 한다는 세력이 각각 경기복 위와 아래를 점령했다고 해야 할까. 아직까지는 사이가 좋지만, 도쿄 올림픽 이후에는 균형추가 한쪽으로 기울 공산이 있다. 원래 도복으로 돌아가거나 상·하의가 따로 노는 디자인이 계속 유지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상의까지 몸에 들러 붙는 형태로 바뀔 수 있다. 방향타를 잡고 있는 세계태권도연맹이 변혁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래 도복 형태로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태권도가 살아남으려면 개혁이 항상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전자 호구가 그랬다. 의도는 좋았다. 혈연·학연·지연 밀어주기가 만연했던 태권도계를 개혁하기 위해 뽑아든 회심의 카드가 바로 전자 호구였다. 세계태권도연맹은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 있는 ‘인간 심판’의 채점 비중을 크게 줄이는 대신 발차기 강도를 측정하는 전자 호구로 객관적인 채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기술이 이상을 못 따라왔다. 강도 측정 기술이 정교하지 못해 전자 호구가 잘 잡는 공격과 못 잡는 공격이 따로 생겼다. 전자 호구에서 점수가 잘 나오는 공격법이 따로 있었다. ‘커트발’이라는 일종의 비비기 기술이 등장해 태권도의 호쾌한 맛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발펜싱’이라는 비아냥 섞인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부터다.

올림픽에서의 태권도의 미래는 전적으로 세계태권도연맹에 달려 있다. 즉, 스포츠로서의 태권도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단체다. 지금까지 이뤄낸 성과를 고려해서라도 올림픽 정식 종목의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더 포괄적으로 생각한다면 올림픽이 태권도의 전부는 아니다. 스포츠인 동시에 무예로서 전 세계에 보급된 태권도를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선 다른 태권도 단체와도 협력해야 한다. 정통성 기반의 무도 태권도는 국기원에서 맡는다. 수련자들에게 단증을 발급하거나 품새를 개발한다. 태권도 학술 연구를 진행하는 업무도 국기원에서 주도한다. 대한민국태권도협회는 세계태권도연맹에 속한 한국 내부의 태권도 단체다. 우리나라가 태권도 종주국이라서 독특한 지위를 갖는다. 담당하는 업무와 지역이 다른만큼 협회간의 협력에 따라 다양한 시도가 충분히 가능하다.

대한민국태권도협회는 지난 1월 12~13일 양일간 ‘KTA 파워 태권도 프리미엄 리그’ 시연회를 열었다. 프리미엄 리그는 양 선수 모두 파워 게이지 바가 꽉 찬 상태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공격의 강도에 따라 게이지 바의 에너지가 줄어드는 기술을 도입했다. 강도가 높은 공격을 적중시키면 상대의 에너지를 빨리 소모시키고, 빠르게 경기를 끝낼 수 있다. ‘철권’이나 ‘스트리트파이터’처럼 게임 같은 그림이 연출된다. 타 단체의 색다른 시도와 개선된 기술, 그리고 아이디어가 융합된 새로운 모델이다. 새로운 차원의 태권도 겨루기 경기가 될 수 있다.

태권도는 계속 진화한다. 세계태권도연맹은 겨루기뿐 아니라 품새도 세부 종목으로 발전시키는 중이다. 음악을 배경에 깔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펼쳐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 ‘자유 품새’가 최근 화제다. “이게 태권도인가?”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정통성을 비껴 갔다고는 해도 시도 자체는 박수받을 만하다. 정통성을 지키는 품새와 새로운 자유 품새가 공존하면 된다. 도쿄 올림픽에 도입될 겨루기 경기복이 낯설기는 해도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절실한 변화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의 태권도로 진화한 내막을 조목조목 살펴본다면, 무조건 깎아내릴 수만은 없는 시도다. 글 / 이교덕(<스포티비 뉴스> 기자)

    에디터
    이재현
    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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