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orial

한예리 "이미지를 깨고 싶어요"

2020.02.27GQ

반듯한 한예리는 그 반대의 모습도 좋다.

스웨이드 점프 수트, 기라로쉬. 실버 링, 판도라. 베레모, 웨스턴 벨트, 사이하이 부츠는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패턴 블라우스, 랭&루.

블랙 니트 드레스, 백, 모두 알렉산더 맥퀸. 블랙 부티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블라우스, 데님 스커트, 모두 지방시. 안경은 스타일리스트의 것.

재킷, 스커트, 패턴 블라우스, 모두 스포트막스. 안경은 스타일리스트의 것.

그레이 카디건, 블루 카디건, 스트라이프 톱, 쇼츠, 모두 미우미우. 헤어 스카프, 포츠1961.

컬러 플레이 니트 톱, 이자벨 마랑 에뚜왈. 팬츠, 앤아더스토리즈.

패턴 블라우스, 랭&루. 데님 팬츠, 화이트 부티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이렇게 넘치는 흥을 어떻게 누르고 살았어요? 하하하.

설마 화보를 찍을 때 그런 척 연기한 건 아니겠죠? 흥이 아예 없진 않아요. 근데 진짜 편한 사람들과 있을 때만 그게 폭발해요.

최근 제일 신났던 일은 뭐예요? 제가 출연한 영화 <미나리>가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거요!

축하해요.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어땠어요? 작년 여름 미국의 털사란 곳에서 6주간 영화를 찍었는데 짧은 시간에 배우, 스태프들과 굉장히 친해졌어요. 가족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수상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되게 뭉클하더라고요.

영화제 무대 인사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죠? 현지 관객들에게 “한국에서는 밥을 같이 먹으면 가족이라고 하는데, 매일 밥을 같이 먹어서 가족 같았어요”라고. 촬영을 마치면 다들 “내일 봐” 하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 저녁에 모여서 식사를 하고 하루를 정리했어요. 그날의 일을 얘기하고 힘든 점이 있으면 서로 나눴죠. 그런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서 우리 영화에 좋은 기운으로 남았고, 관객들이 그걸 느끼고 더 좋아해준 것 같아요.

지금 표정에서도 느껴져요.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는 이야기도 있지 않았을까요? <미나리>는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의 농장으로 이주한 한인 가족의 이야기예요. 누구나 공감하는 가족이란 소재를 다루기도 했고, 미국은 다인종·이민자의 국가잖아요. 아시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이야기가 공감을 이끌어내지 않았나 싶어요.

본인은요? 이 영화의 어떤 지점에 마음이 갔나요? 한인 가족의 엄마 ‘모니카’를 연기했는데 그녀를 보면서 ‘제 인생의 엄마, 할머니, 이모’들에 대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어요. <미나리>의 연출을 맡은 정이삭 감독님은 한국계 미국인이에요.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본을 직접 쓰기도 했어요. 두 아이의 엄마인 모니카는 한국적 정서가 많은 인물이고, 그런 부분이 영화에도 잘 드러나요.

예전 인터뷰에서 엄마가 된 자신의 모습이 궁금하다고 했던 거 기억해요? 모니카를 연기하면서 어떤 새로운 생각이 들었나요? 가족의 분열을 유발하는 것이 세상에 정말 많고, 무수한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그 희생에는 사랑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모니카는 남편 제이콥(스티븐 연)을 정말 많이 사랑하거든요. 두 사람이 갈등을 겪는 장면에서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했어요. 왜냐면 그들이 나쁜 사람처럼 보이는 게 싫었어요.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충돌하고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는 생각으로 연기를 했어요.

한국을 떠나 낯선 환경에서 연기하는 과정이 힘들진 않았나요? 사실 환경이나 시스템 같은 건 큰 차이는 없었어요. 그보다는 함께 연기한 윤여정 선생님이 정말 대단하시단 생각을 했어요. 나는 미국에 와서 연기를 하는 게 이렇게 겁나는데, 조금만 힘들어도 게을러지거나 드러눕고 싶은데, 나중에 선생님 정도의 나이가 됐을 때 나도 이런 도전을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래도 배우로서 한발 나아갈 용기를 얻었을 것 같은데요. 더 큰 도전을 꿈꾸게 됐다거나. 세계가 하나라는 사실을 좀 더 실감했고, 한 곳에만 머물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그 사람의 본성이 달라지진 않더라고요. 이 영화를 찍으면서 어디에 있든 저는 변함없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선댄스 영화제에는 얼마나 머물렀나요? 일주일 좀 안 되게 있었어요.

라디오의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때 영화에 대한 팬심을 가득 드러냈던 걸로 기억해요. 영화는 좀 챙겨 봤어요? 다큐멘터리 한 편과 극영화 세 편을 봤어요. 그중 한 작품이 상을 받아서 괜히 기분이 좋았어요. <미나리>는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기도 해요. 한국에서 개봉하면 오전 일찍 혼자 영화관에 가서 보려고요.

특별히 마음에 닿은 장면은 뭔가요? 주인공 가족이 다 같이 아침을 맞이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여기서 윤여정 선생님이 연기한 할머니의 얼굴이 너무 좋아요. 영화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선생님의 얼굴이 화면 가득 나오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훗날 저런 얼굴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스스로 체감하는 자신만의 나이 같은 게 있다는 말도 했었죠? 요즘 몇 살이라고 느껴요? 그 얘기를 했을 때는 스물여섯 같았는데 지금은 스물아홉쯤 됐어요.

어떤 의미의 나이예요?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죠. 하하.

그런 걸 언제 느끼는데요? 체력이 예전 같지 않고 엄마 역할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이걸 거스르려는 욕심은 없어요. 오히려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아요. <미나리>에서 엄마로 나오는 제 모습이 어색하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젊게 보이려 해도 잘 안 돼요.

지금 얼굴로는 무엇을 더 해보고 싶어요? 할 수 있는 게 더 늘어났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한을 두지 않으려고요. 폭넓게 오가면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고 싶어요. <미나리> 직전에 한 작품이 드라마 <녹두꽃>이었어요. 조정석 오빠와 멜로 연기를 한 뒤 엄마 역할을 했는데 되게 재밌다고 느꼈어요.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는 건 저한테서 그런 모습이나 가능성을 봤을 거라 생각해요.

특별 출연한 <해치지않아>도 충분히 새로웠어요. 코미디 장르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민한 금수저 CEO를 연기하는 한예리를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요. 저도 즐겁게 연기했어요. 근데 드라마 <청춘시대>의 ‘진명’을 좋아하셨던 분들은 그 모습이 낯설었나 봐요. 적지 않은 분이 진명이처럼 제가 진중하고 단호하거나 흐트러짐이 없을 거라 생각하더라고요. 그런 이미지를 깨고 싶어요.

실제 한예리는 어떤 사람인데요? 약간 귀여워요. 그런 느낌이 진짜 있어요. 하하. 선댄스 영화제에서 <미나리>를 본 사람들이 제가 나온 영화를 알려 달라고 해서 <최악의 하루>를 추천했어요. <미나리>와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거든요. 이 영화에서 연기한 ‘은희’는 가볍고 맹랑한 캐릭터예요. 신기하게도 곧 촬영에 들어가는 드라마에서 은희라는 인물을 연기해요.

새 드라마도 가족에 관한 이야기라고 들었어요. 집에선 어떤 딸이에요? 여동생과 남동생이 한 명씩 있어요. 맏딸, 장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책임감이나, 동생들을 챙긴다거나, 거기에 딱 부합해요. 그런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아요. 동생들도 어른이 됐지만 저한테는 여전히 어린 동생들이에요.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동생들이 좋은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서로 의지가 되고 속내를 공유할 수 있는 사이여서 고맙기도 하고,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요. 사실 가족만큼 힘든 관계도 없거든요. 타인 같은 가족도 있고, 남보다 못한 가족도 있고. 그런 얘기를 들으면 본인한테 맞는 가족을 찾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가족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기도 하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좀 더 살 만하고 나아지고 있다고 보나요? 원래 긍정적이지 못한 사람이라 불안과 걱정이 늘어나는 편이에요. 세상살이가 힘겨워지면서 사람들은 전보다 더 자신의 삶에 충실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가장 이상적인 하루는 어떤 모습인가요? 딱 하루만 주어진다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요. 시간을 쪼개서 생각하기보단 크게 보거든요. 어떤 날은 밤새 일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해 뜨는 장면을 보고 싶고,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리고 싶고, 또 어떤 날은 잠에서 깼을 때 밤이었으면 해요. 제 일상은 이처럼 다양한 날들로 채워져 있어요. 이상적인 하루를 보내야 한다면 뭘 할지 궁리하다 반나절이 지나고, 남은 반나절에는 뒷산에서 나무라도 심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렇게 하루가 끝날지도 몰라요.

<미나리>는 정이삭 감독의 여섯 살 때 이야기에서 시작됐어요. 그 나이에는 어떤 아이였나요? 어릴 때 사진을 보면 화려한 걸 되게 좋아했어요. 스트라이프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선글라스와 팔찌, 목걸이를 주렁주렁 하고 있거나, 화려한 모자를 쓰고 어디서 봤는지 허리에 손을 얹은 포즈로 찍은 사진도 있어요. 그 시절엔 자신을 드러내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왜요? 그런 성격이 계속 이어지지 않았나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진 진짜 조용하게 살았어요. 눈에 잘 안 띄는 아이였어요.

성격이 크게 바뀌었나 봐요. 아까 말랑말랑한 얼굴로 먼저 인사를 해서 솔직히 놀랐어요. 어른들이 그러시잖아요? “인사만 잘하면 중간은 한다.” 그 말이 맞더라고요.

    에디터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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