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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와인의 재발견

2020.03.11GQ

비주류 같은 남아공 와인은 나름의 긴 사연을 가지고 있다. 빠르게 성공 궤도에 오르기도 했지만 하루아침에 국제 사회에서 종적을 감춘 남아공 와인의 재발견.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와인 산지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남아공이 속한 아프리카 대륙은 바다에 잠겨 있던 땅이 융기하여 지금의 지형을 이뤘다. 수십억 년에 걸쳐 융기와 침강, 퇴적을 반복한 대륙은 그 어느 땅보다 복잡한 지질과 토양으로 덮여 있다. 그중에서도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남아공은 포도가 잘 자라는 지중해성 기후를 띤다. 특히 남극권에서 올라오는 한류의 영향으로 같은 위도에 놓인 다른 지역보다 기후가 낮아 포도가 풍부한 향과 맛, 영양분을 응축하며 천천히 익는다.

한편 바닷바람이 실어 나르는 소금기가 포도에 감칠맛을 더한다. 지형이 변화무쌍한 점도 이점이다. 해안평야와 내륙고원 사이를 장엄한 산맥이 가로지르며 그 너머에는 사막이 펼쳐진다. 특히 케이프폴드 산맥이 길게 뻗은 서남단의 웨스턴케이프 주는 산맥에 촘촘히 박힌 골짜기들이 일조량과 바람에 영향을 끼쳐 같은 지역에서 같은 품종의 포도를 재배해도 맛과 향이 다 다르다. 이러한 미세 기후와 다채로운 토양, 지형이 남아공 와인에 특별한 개성과 매력을 안긴다.

실제로 남아공 와인은 신세계 와인 중에서 빠른 속도로 성공 궤도에 올랐다. 남아공 와인의 역사는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이 정착하며 시작됐다. 1652년 의사 출신의 얀 반 리베크는 자신이 발 디딘 땅이 포도 재배에 탁월하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았다. 그는 1655년 포도밭을 조성하고 1659년 와인을 병입했다. 그 후 1688년 종교 박해를 피해 프랑스에서 넘어온 개신교도들이 축적된 기술로 포도밭을 일구며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18~19세기 남아공은 와인을 유럽에 대량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콘스탄시아 지역에서 뮈스카드프론티냥 품종으로 빚은 디저트 와인 ‘뱅 드 콘스탄스’는 유럽에서 큰 성공을 이뤘다.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 왕은 뱅 드 콘스탄스를 원활하게 공수하기 위해 남아공에 직접 구매 담당관을 파견했고, 나폴레옹 황제는 워털루 전쟁에서 패한 후 이 달콤한 와인을 매일 공급받는다는 조건하에 유배 생활을 받아들였다. 한편 영국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은 <이성과 감성>에 등장하는 제닝스 부인의 입을 빌려 뱅 드 콘스탄스를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묘약”이라고 칭송했다. 그녀 외에도 찰스 디킨스, 샤를 보를레르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작품에 뱅 드 콘스탄스를 묘사했다.

이 정도 화제성이라면 우리가 한 번쯤 들어봤을 법도 한데, 전혀 새롭다. 남아공 와인을 화두로 꺼내면 열에 아홉은 “아프리카에서도 와인이 나오냐”는 반응이다. 한 번쯤 들어본 사람일지라도 그 역사가 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호주, 뉴질랜드보다 짧다고 여긴다. 왜? 이들을 알고 나서 한참 후에 접했으니까. 그 와중에 국내 대형 마트에서 특정 남아공 와인을 헐값에 팩 와인으로 판매하는 바람에 값싼 와인이라는 오명까지 썼다. 한때 와인 종주국마저 열광케 한 남아공 와인에 우리가 이토록 무지한 이유는 사실 세계사에 명백하게 존재한다. 남아공은 1970년대 정권을 잡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인종 차별 정책을 이행하며 전 세계로부터 통렬한 비난을 받았다. UN은 남아공의 반인륜적인 정책을 적극 비난하며 경제 제재를 선언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국가가 UN의 결의에 따라 교류를 단절했다. 그전까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유럽으로 활발히 수출한 남아공 와인은 하루아침에 수출길이 막혔다.

국제 시장에서 철저히 고립된 남아공의 와이너리들은 내수 시장에 집중해야 했다. 문제는 당시 높은 품질의 와인은 대부분 수출용으로 생산됐던 터라 와이너리들은 국내에서 소비할 저급 와인을 만드는 데 만족해야 했고, 와인 산업은 점점 도태됐다. 단순히 수출길이 막혀 당장 질 좋은 와인을 생산할 명분을 잃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인적 교류가 단절됐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였다. 20년 가까이 남아공 와인 산업에 짙게 드리웠던 그림자는 1994년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취임해 인종 차별 정책을 폐지하며 서서히 걷혔다.

경제 제재는 풀렸으나 공산품이 아닌 와인이 하루아침에 명성을 되찾기는 힘들었다. 양조자들은 해외로 나가 새로운 양조 기술을 받아들이고 흐름을 읽는 한편, 포도밭을 정비해야 했다. 당시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 대부분이 그들의 고군분투에 무관심했지만, 몇몇 전문가는 달랐다. 2010년대에 이르러 남아공 와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예언했다.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앞서 스페인, 포르투갈, 칠레, 아르헨티나가 어지럽던 정세가 호전되기 시작한 지 20년 후를 기점으로 와인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변화가 와인 산업을 서서히 변화시킬 거라는 그들의 예언대로 최근 남아공 와인을 재발견하고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첫인상은 매력적이지 않았어요. 칠레나 아르헨티나에서 대량 생산한 와인 같은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죠.” 볼피노, 쿠촐로, 마렘마 등 다양한 식공간을 운영하는 쿠촐로 그룹의 총괄 소믈리에 편상범 팀장이 8년 전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최근 부르고뉴와 미국 와인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며 대체품을 찾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남아공 와인을 다시 접했어요.” 실제로 와인에 관심이 생겨 남아공을 다녀온 그는 남아공 와인의 극적인 발전 뒤에는 이곳 사람들의 남다른 도전 정신이 있다고 설명한다. “남아공의 와인 메이커들은 대체로 젊어요. 그들에게는 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술과 지식이 있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시도해요. 그 결과 현재 발전 속도가 그 어느 지역보다 빨라요.” 편상범 팀장은 남아공의 소규모 와이너리를 소개하는 국내 수입사들이 남아공 와인을 재발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남아공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조용하지만 꾸준하게 각자 고유한 테루아에서 개성 있는 와인을 만들고 있어요. 여전히 자연 친화적인 영농 기법과 수작업을 통한 수확, 양조 등 가족 중심으로 경영하는 부티크 형태를 고집해요. 와인별 연간 생산량이 1만 병을 넘지 않는 경우가 많죠.” 남아공 와인 전문 수입사 ‘케이프밸리’ 주은수 대표의 설명이다. 물론 그중에는 규모가 꽤 큰 곳도 있지만, 칠레나 미국의 대형 와이너리와 견주기에는 미미한 수준이다. 개성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에반 사디라는 전설적인 와인 양조자가 탄생하기도 했다. 사막에 버려진 밭에서 와인을 빚는 그는 오늘날 “남반구에서 가장 훌륭한 와인 양조자”로 평가받는다. 가격이 높으며 극히 소량 생산되는 사디의 와인을 어렵게 국내에 들여온 주은수 대표는 와이너리를 직접 둘러본 후 전 세계가 그의 와인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여태껏 봐온 밭과 사뭇 다릅니다. 메마른 사막에 줄기가 뒤틀리고 가지들이 뒤엉킨 포도나무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어요. 나무에 열리는 포도의 양도 일정하지 않을뿐더러 극히 적습니다.” 뜨겁고 건조한 지역에 뿌리내린 포도나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열매를 맺는 만큼 그 속에 강한 생명력과 풍미를 응축하고 있다. 획일화된 농법으로 재배한 포도로 빚은 와인과 풍미가 다를 수밖에. 현재 사디의 영향으로 남아공의 많은 젊은이가 와인 산업에 뛰어들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경제 제재가 풀린 후 남아공 와인은 하루하루 새로운 발전상을 보이고 있어요. 국제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생산자가 점점 늘어날 거예요.” 주은수 대표는 지난 20년 동안 남아공 와인이 매 순간 발전했지 퇴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남아공 와인은 어제와 같은 오늘이 없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편견에 사로잡혀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와인은 또 있다. 포르투갈 하면 주정강화한 포트 와인을 떠올리는 오랜 선입견 때문에 우리는 포르투갈의 훌륭한 스틸 와인들을 놓치고 있다. 낯선 이름의 토착 품종으로 빚었다는 이유로 그리스 와인, 터키 와인 등을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고 했다. 또 봉준호 감독은 “1인치 정도되는 자막의 장벽을 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와인을 대할 때도 작은 편견의 끈을 놓아야 더 많은 미각적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다. 글 / 이주연(푸드 칼럼니스트)

    에디터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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