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orial

그래픽 디자이너 김영나의 시각

2020.05.03GQ

선명하게 자리 잡은 도형과 컬러 사이로 그래픽 디자이너 김영나가 보란 듯이 섰다. 비로소 퍼즐이 완성됐다.

SET v.20: cover space

SET v.20: page wall, 2020

당신을 인터뷰한 거의 모든 기사가 그래픽 디자이너인 동시에 예술가라는 지위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시각이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2011년 개인전을 했을 당시에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전시를 한다는 게 흔치 않았다. 전시도 디자이너로서 미술 공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이후 나를 규정하려는 질문이 늘 따라다녔다. 나한테는 중요한 사안은 아니지만 내가 어떤 관점을 만들기 때문이지 않을까? 아직도 그 질문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미술계에서 디자인 분야는 여전히 경계에 위치한다.

꼬리표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궁금하다. 예전보다 개인 작업과 전시 비중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디자이너가 미술 언어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흥미로운 지점들은 지금도 유효하다.

매체나 분야에 따라 태도와 관점이 달라지나? 아니면 유지하려는 편인가? 디자이너의 일이란 의뢰받은 작업에 합당한 프로세스를 고민하고 해답을 내는 것이다. 전시도 비슷하다. 결과물을 단순히 미술 공간에 가져다 놓는 게 아니라, 기획 의도와 콘셉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가며 접근한다. 외부 질문에 반응하고 답을 낸다는 점에서 디자인 작업과 닮았다.

전시 준비에 앞서 빈 공간을 바라보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드나? 작품의 배열보다 공간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더 고민한다. 공간에 대한 관심은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2018년 문을 연 에이랜드 브루클린 매장과 현재 준비 중인 뉴저지 매장의 디자인을 맡아 실질적인 작업을 경험했다. 사물, 소품, 집기, 인테리어 요소에 따라 공간이 차츰 변해가는 과정이 흥미롭더라.

현재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구조는 흔히 떠올리는 갤러리와 다르다. 공간적 특성이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켰나? 층고가 12미터쯤 되어 1층에서 지하 1층의 전시장으로 가는 계단이 꽤 길다. 이곳을 따라 내려오면서 볼 수 있는 넓은 공간에 크고 작은 구조물들을 설치했다. 이를 ‘표지 공간’이라 부른다. 2015년에 그전까지의 작업을 모으고 분류해 <SET>라는 일종의 샘플북을 만들었고, 그 내용을 다시 공간으로 옮겨 재해석하는 동명의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20번째 작업이다. 작품집이 곧 전시 매뉴얼인데, 표지 속 형태들을 본 떠 이번 구조물을 만들었다. 책 표지를 보고 내용을 짐작하듯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있게끔 말이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온 관람객의 동선은 곧장 표지 공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다른 작업들이 전시된 곳을 거쳐야 한다. 흥미로운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동선을 짰다.

<SET>에 수록된 작업들은 공간에 따라 재해석될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SET> 연작은 어떤 완결성을 향해 흘러가고 있을까? 원래 계획을 세워놓고 행동하는 편이 아니다. 처음에는 작품집에 실린 작업을 전시장의 벽에 그릴 생각도 없었다. 책이 완성됨과 동시에 전시를 하게 되어 이걸 어떻게 전시 공간에 옮길지 고민하다 벽화를 떠올렸다. 지면이라는 평면이 벽이라는 평면으로 옮겨지는 작업인데 경험과 시간이 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시를 마친 뒤에는 작품집을 토대로 계속 전시를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같은 디자인도 공간에 따라 다른 작업이 되니까. 작품집에서 특정 형태, 색깔을 골라 쓰거나 입체 구조물을 만드는 것처럼 새로운 규칙과 방법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SET> 시리즈가 어떤 식으로 진화를 할지 짐작되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선 캔버스 작업을 시도했다. 조형적 실험인데 벽화 일부를 캔버스에 옮겼을 때 어떤 식으로 읽힐지 궁금했다. 누군가는 미술 작품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비주얼보단 그 안에서 생성되는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 것 같다. 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창조하기보단 익숙한 사물과 재료가 의외의 상황에 놓였을 때 발생하는 낯설음, 색다른 이야기가 흥미롭다. 예전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아트숍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도 같은 맥락이다. 아트숍은 미술관 안에서 유일하게 상업적인 곳으로 작품을 상품화한 물건을 판매한다. 비싸지 않은 재료로 연필, 배지, 컵 등의 물품을 만든 뒤 상자들에 담아 전시 공간을 구성했다. 관람객들에게 작품으로 읽힐지, 상품으로 보일지 알 수 없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물체주머니>는 추억의 단어다. 1980~1990년대 다양한 학습 도구를 담아 판매했던 주머니의 이름을 어떻게 해석했나? 어릴 적 물체주머니에 담긴 빨대 묶음, 도형 형태의 나무 조각, 고무공, 조개껍데기 등을 가지고 친구들과 놀던 기억이 있다. 별거 아닌 사물이지만 여러 가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이번 전시의 이미지들도 작품집에서 가져와 과거 작업, 당시의 기억들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물체주머니의 의미와 맞닿는다. 동시에 전시의 영문 제목은 <Bottomless Bag>이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 등장하는 주머니로, 주인공의 소중한 기억과 연결된 사물들이 무한대로 들어 있다. 이 두 가지 제목을 같이 쓰면 전시의 폭도 넓어지고 전시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도형, 컬러, 패턴이 작업의 주된 요소라면 당신을 자극하는 주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이것도 기억에 관한 이야기인데, 습관처럼 과거를 돌아본다. 예전 사진을 보거나 수집하는 것도 좋아한다. 지난 시간에 미련이 있기보단 스스로를 다시 검열해보는 의미가 크다. 작업도 그렇다. 지난 것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현재로 옮길 때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계획을 세우기보다 흘러가는 대로 두는 편이다.

모든 이미지에서 규칙과 질서가 느껴진다. 자신의 작업과 얼마나 닮았나?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작업과 닮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실은 정리가 잘되어 있는 걸 좋아한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디자인 전시에서 선보인 ‘테이블 A’도 그런 성격에서 비롯됐다. 네덜란드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아카이브를 정리하려고 했는데 A4, A3, A2 종이 크기에 딱 맞는 박스를 도저히 구할 수 없었다.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박스를 판매하지만 정작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규격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경험을 계기로 각 종이 사이즈에 상응하는 테이블을 디자인했다. 전시를 준비할 때도 느끼지만 완벽한 시스템이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불안한 시대다. 창작자로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작업에 대의나 거창한 메시지를 담아 사람들을 독려하거나 계몽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나조차도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안 듣는다. 일상적인 재료나 추억이란 키워드가 작업에 존재하는 이유는 개개인이 충실하게 살면 세상이 나아질 거란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부터 열심히 살아야지.

    피쳐 에디터
    김영재
    포토그래퍼
    김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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