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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의사생활 슬기로운 신원호

2020.05.09GQ

야구로 치면 4타석 4안타.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신원호 PD는 또 하나의 안타를 추가할 것으로 보인다.

엄마의 눈은 범대중적이다. 그녀가 보는 드라마가 곧 흥행 드라마다. 나는 신작 드라마가 시작하면, 흥행세를 가늠할 요량으로 그녀의 시청 여부를 체크하곤 한다. 그런 엄마의 최근 원픽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다. 병원에서 일하는 엄마이기에 공감이 더 가서 그런 것일까. “에이~ 저렇게 천사 같은 의사들은 별로 없지. 판타지야. 미화됐어!” 응? 미화됐는데 뭐가 그리 좋다는 건지. “아름답잖아. 이 드라마는 세상을 더 살고 싶게 한다니까.” 세상을 살고 싶게 만드는 드라마라니. 이 무슨 엄청난. 그렇다. 어떤 판타지는 황당무계해서 손에 잡히지 않지만, 어떤 판타지는 현실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그것이 지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보여주고 있는 힘이 아닐까, 하고 엄마와의 전화를 끊으며 생각했다.

야구로 치면 4타석 4안타. 신원호 PD는 지난 8년간 실패를 모르고 달렸다. 세 편의 <응답하라> 시리즈로 대중에게 응답받았고, <슬기로운 감빵생활>로 슬기롭게 새로운 시리즈를 론칭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치솟는 시청자 반응을 보건대,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또 하나의 안타를 추가할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안타가 아니다. 그간 ‘신원호 월드’에서 약점으로 지적받았던 요소를 누르고, 성과로 주목받았던 지점을 계승해 확장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진화’라고 하고 싶다.

생과 사가 부딪히는 병원은 드라마를 위한 최적의 공간이다. 그곳은 권력을 둘러싼 야욕의 정치판(<하얀거탑>, <라이프>)이며, 비범한 의사에 의해 기적이 행해지는 공간(<낭만닥터 김사부>, <의사 요한>)이고, 사랑이 꽃피는 교감의 장(<해바라기>, <닥터스>)인 동시에, 모두에게 평등한 죽음을 ‘부’나 ‘빽’에 따라 불평등하게 만들 수 있는 곳(<골든 타임>, <용팔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온갖 인간 군상이 모여 만들어내는 ‘드라마’가 이곳엔 있다. 이것이 바로 메디컬 드라마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연유이며, 웬만한 배우 중 흰 가운 한번 입어보지 않은 경우가 드문 이유일 것이다.

그런 병원을 다루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대부분의 의학 드라마들이 병원이라는 공간의 드라마틱함에 집중할 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 반대편, 소소해서 다루지 않았던 병원 사람들의 일상 라이프에 집중한다. 자투리 시간에 커피숍에 모여 상사에 대한 정보를 캐거나, ‘법카’로 저녁을 사며 생색내는 의사들의 모습은 평범한 직장인에 가깝다.

배경이 병원인 덕에 전작 <슬기로운 감빵생활> 때 고심해야 했던 범죄 미화라든가 도덕적 딜레마에서도 자유롭다. 보호받아야 할 여성이 아닌 그 자체로 전문성 강한 여성 주인공을 내세움으로써, 신원호 월드의 아쉬움으로 지적돼 왔던 피동적인 여성 캐릭터와도 선을 긋는다. 여기에 드라마는 의대 동기 5인방의 대학 시절인 1999년으로 틈틈이 거슬러 올라가 3040 세대의 추억의 부스러기와 감수성을 건드린다. 단순히 ‘TV를 본다’라는 개념을 넘어 주인공들과 정서적으로 교감한다는 느낌을 안겼던 <응답하라>의 장점을 영리하게 수혈한 셈이다.

대개의 좋은 이야기들이 그렇듯, <슬기로운 의사생할>은 이분법으로 인간을 편 가르지 않는다. 나는 환자의 건강을 염려해 선배 송화(전미도)에게 수술 집도를 끈질기게 요구하는 줄로만 알았던 신경외과 레지던트 용석민(문태유)의 행동이, 실은 논문을 잘 쓰고 싶은 의사로서의 야망 때문이었음을 드러내는 이중적인 태도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수술로 한쪽 가슴을 잃은 젊은 환자를 향한 할머니들의 시선이 신기한 구경거리여서가 아니라 “젊음이 부러워서. 너무 예뻐서”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땐 괜한 오해를 했다는 사실에 뜨끔했고 이내 먹먹해져 눈물이 고였다. 우린 모두가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나쁘며, 너무 많이 오해하고, 지나치게 선입견을 품는데, 이 모든 걸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참으로 슬기롭게도 담아낸다.

새로운 얼굴을 발굴해내는 신원호 사단의 눈썰미는 백 단이지만, 이번엔 그 시선이 더 넓고 두껍다. 주인공 5인 외에도 주변 인물에게까지 구석구석 감독과 작가의 시선이 뻗어 에피소드를 보다 풍성하게 매만진다. 지나가는 인턴 1-간호사 2 정도인 줄 알았던 인물들이 극의 중앙으로 침투해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조직의 일부로만 기능할 줄 알았던 신경외과 레지던트 3년 차 안치홍(김준한)이 러브스토리의 중요한 키를 쥐는 인물로 급부상하기도 한다. 본과 3학년 실습생인 홍도(배현성)와 윤복(조이현) 남매는 단순한 실습생 신분을 넘어 어려운 의학 용어가 난무하는 이 드라마에서 관객의 이해를 돕는 길잡이로 활약한다. 등장인물들에 골고루 서사를 부여해 풍부한 화음을 만들어내는 신원호의 전략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인 병원이라는 공간 안에서 그 위력을 더한다.

회마다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에피소드 하나가 마무리되는 형식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부터 신원호-이우정 콤비가 구사해온 특징이다. <1박 2일> 출신으로 지금도 예능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하고 있는 이우정 작가는 풍부한 에피소드를 펼쳐놓는 데 능숙하다. 그런 이우정 작가의 시나리오는 <남자의 자격> 등에서 일한 예능국 출신 신원호 PD에겐 좋은 멍석이다.

신원호 PD는 장면 장면을 어떤 방식으로 이어 붙이고, 시간 순서를 어떻게 뒤섞고, 슬쩍 흘린 미끼를 언제 회수해야 극적 감동과 효과가 배가 되는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조율하는 데 선수다. 회별로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 정서가 다른 에피소드식 구성에선 그에 따른 밀도 있는 디테일이 관건인데, 이는 예능 PD 시절의 경험이 그에게 준 선물. 뇌사자의 자녀가 어린이날을 아버지 기일로 기억하게 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장기 이식을 일부러 자정이 넘은 5월 6일에 진행하는 익준(조정석)의 에피소드가 더 마음을 울렸던 것은, 감독이 앞서 심어둔 자그마한 복선 때문이었다. 무뇌아 출산으로 고통받을 산모를 배려해 출산 시 아이가 울지 못하도록 입을 막아달라고 후배에게 부탁한 석형(김대명)의 진심은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방법으로 인해 먹먹함이 배가 됐다. 신원호 PD는 한 인물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그 노력의 시간을 끝내 회수한다. 그리고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게 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목요일-주 1회 편성이라는 점에서 ‘파격’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런데 사실 신원호 PD에게 이것은 파격도 새로운 시도도 위험한 도전도 아니다. 다소 뜬금없거나 실험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 편성 전략은 신원호이기에 오히려 익숙하달까. 공중파 드라마가 오랜 시간 답습해온 ‘월화, 수목, 주말, 일일 드라마’의 편성 패턴을 과감하게 비틀어 ‘금토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 게 <응답하라 1994>였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게다가 ‘불금’을 공략한, <응답하라 1994>의 편성 전략에 다들 의문을 제기했지만, 알다시피 금토 드라마는 이제 공중파에서도 따라 하는 황금의 편성 시간대가 됐다. 추억을 건드리는 솜씨도 그렇고 편성도 그렇고 여러모로 신원호 PD는 시간 개척자다.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미국 시즌제 드라마 <프렌즈> 같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현실 가능하다고 믿는 쪽이다. 시청자들과 함께 익어가는 5인의 의사 친구들을 계속 만나고 싶은 건 비단 필자만이 아닌 것 같으니.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피쳐 에디터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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