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한국 야구의 역전 찬스

2020.06.03GQ

한국 프로야구 경기 도중 홈런과 함께 배트를 던지자 미국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KBO 리그를 중심으로 상상도 못 했던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다.

아이러니다. 2020 KBO 리그 개막전은 코로나19의 여파로 모두 무관중 경기로 진행됐다. 하지만 이날은 리그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눈이 지켜보는 개막전이기도 했다. 몇 달간 야구에 굶주렸던 팬들의 시선이 일제히 TV로 향했다. 개막전 5경기의 시청률은 지난해를 앞질렀다. 범위를 한국 땅 밖으로 넓히면 시청자 수는 기하급수로 늘어난다. 미국 최대 스포츠 채널 ESPN에서 매일 한 경기씩 KBO 리그 중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MLB, NBA, NFL 등 세계 최고의 리그를 중계하는 채널이 한국 야구를 방송하는 믿기 힘든 일이 현실이 됐다.

ESPN 중계를 신호탄으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 언론이 KBO 리그 개막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두산을 양키스에, LG를 메츠에, 한화를 컵스에 비유하는 등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를 쏟아냈다. 메이저리거 무키 베츠는 김하성, 이영하 등 KBO 선수들을 소개하는 영상을 제작해 올렸다. 메이저리그 팀이 없는 노스캐롤라이나 사람들과 트리플 A 구단 더램 불스 트위터 계정이 NC 팬을 자처하기도 했다. “미국 현지 반응은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경기 퀄리티도 좋았고, 재미있었어요. 좋은 첫인상을 남겼습니다.” ESPN 개막전 중계방송에 해설자로 참여한 대니얼 킴의 말이다. ESPN이 집계한 개막전 평균 시청자 수는 약 17만 명. 재방송도 10만여 명이나 시청한 것으로 집계됐다. “새벽에 방송된 프로그램이 이런 호응을 얻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현지 제작진도 기대 이상의 반응에 고무된 분위기죠.”

‘K-볼’ 열풍은 현재 야구팬이 접할 수 있는 라이브 스포츠라는 데서 나온다. 결과를 모르고 봐야 재밌는 게 스포츠다. 승패를 다 알고 보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의 재미는 생중계가 주는 쾌감과는 전혀 다르다. 프로 스포츠가 ‘올스톱’ 상태인 미국은 할 수 없이 추억의 명승부와 각종 스포츠 다큐로 시간을 때우려 했지만, 넷플릭스와 유튜브로 향하는 시청자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런 와중에 라이브로 중계되는 프로야구 리그가 있다니, 흥미를 느낄 만하다.

한국 프로야구에는 미국 야구팬의 진입장벽을 없애는 친숙한 요소가 많다. 구단명엔 삼성, LG, KIA 등 미국인이 알 만한 글로벌 기업이 여럿이다. 댄 스트레일리, 애런 브룩스, 케이시 켈리 등 불과 몇 년 전까지 ‘우리 팀’에서 뛰었던 선수들도 보인다. MLB 올스타 출신 맷 윌리엄스 감독과 래리 서튼, 행크 콩거, 훌리오 프랑코 등 유명 선수 출신 코치들도 반갑다. 실제 개막전 이후 미국 팬들은 자신의 MLB 응원팀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휴대 전화가 갤럭시라서, 김현수와 이대호 등 빅리거 출신 선수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응원팀을 골랐다.

낯설고 독특한 한국 야구만의 문화도 재미있다. LG 타일러 윌슨은 한 인터뷰에서 “같은 야구지만 접근법이 다르다. 미국이 정적이라면, 여기는 도루나 히트 앤드 런도 많고 주자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팀 전체가 분주하게 움직인다”고 했다. 경기장 분위기도 미국과는 딴판이다. 롯데와 두산에서 뛰었던 조시 린드블럼은 “한국에서 첫 경기 첫 이닝 때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한국 타자들의 배트 플립, 이른바 ‘빠던’ 문화는 역수출되는 분위기다. 5일 개막전을 중계한 ESPN 칼 래비치 캐스터와 에두아르도 페레즈 해설위원은 경기 내내 빠던이 나오기만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빠던은 보수적인 미국 메이저리그 문화에선 금기시되는 행위다. 상대 투수를 자극하고 조롱하는 행위라고 여긴다. 야구의 불문율을 망라한 책 <더 코드>에선 “홈런을 친 타자는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베이스를 돌아야 한다”며 구체적 행동 지침까지 언급했다. 끝내기 상황도 아닌데 빠던을 했다간 다음 타석에서 머리 쪽으로 보복구가 날아올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인성 논란까지 뒤따른다.

한때 메이저리그 선수는 물론 팬들도 이런 불문율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세대교체가 진행된 최근엔 ‘만들어진 전통’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브라이스 하퍼는 2015 NL MVP 수상 소감에서 “야구계에 만연한 엄숙주의를 바꾸겠다”며 배트 플립을 죄악시하는 풍조를 예로 들었다. 호세 바티스타는 “도미니카에서 야구는 온 나라가 함께하는 놀이이고, 온갖 감정으로 가득하다. 전 세계에서 온 선수로 이뤄진 메이저리그에서 왜 똑같이 행동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자유롭게 빠던을 하고, 세리머니를 하며 감정을 표출하는 KBO 리그는 신선한 충격이다. 한 구단 관계자는 “관중과 시청률 감소, 팬 고령화 문제로 고민이 깊은 메이저리그에 열광적인 한국 야구 문화가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LG 타일러 윌슨은 “미국에선 가끔 야구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데, 한국에서의 경험은 환상적”이라고 했다. 한화 채드벨은 “한국 경기장 분위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다른 리그에서 KBO 리그를 보고 야구를 더 좋게 만들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ESPN에 배트 플립에 관한 칼럼을 쓴 미나 키메스는 “MLB는 선수 사이의 존중, KBO는 팬을 위한 야구”라고 요약했다. 미국 야구의 영향 아래 시작한 한국 야구가 이제는 영감을 되돌려줄 정도로 성장했다.

물론 과도한 ‘국뽕’은 금물이다. 박찬혁 전 한화 이글스 마케팅 팀장은 “위기는 기존의 위기를 감춘다”고 했다. ESPN 중계로 한국 야구가 세계화를 이뤘단 자화자찬이 쏟아지지만, KBO 리그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박 전 팀장은 “이미 팬 고령화와 콘텐츠 경쟁에서의 열세가 문제였다. 무관중 경기가 계속되면 팬들은 디지털 미디어로 이동하고, 기업들은 운영비 부담에, 구단들은 예산 감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우려했다. ESPN 중계와 SNS에 가득한 KBO 리그 트윗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모 구단 마케팅 팀장은 “코로나19가 지나가면 지금보다 더 심각한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올 시즌이 아니라 내년부터가 진짜 위기”라고 했다.

KBO 중계권 사업을 관장하는 KBOP의 관계자는 “KBO 리그의 글로벌 진출 기회”라고 평했다. 하지만 KBO와 구단들이 준비가 돼 있을지 의문이다. 대니얼 킴 해설위원은 “ESPN 중계 이후 KBO 리그 유니폼을 구입하고 싶다는 문의가 쇄도한다”고 했다. 그러나 KBO가 운영하는 굿즈 판매 사이트 ‘KBO마켓’은 국내에서만 이용할 수 있다. 트위터와 래딧엔 KBO 얘기가 넘치는데, 정작 가장 많은 이용자가 찾는 유튜브에선 KBO 리그 영상을 만날 수 없는 것도 문제다. 지난해 포털-통신 컨소시엄이 따낸 ‘뉴미디어 중계권 계약’ 때문이다. 유튜브에 KBO 영상을 올리는 것도, 움짤을 만드는 것도 법에 저촉된다. 구단이 만드는 자체 콘텐츠여도 경기 장면은 사용할 수 없다. 김경민 전 롯데 마케팅 팀장은 “말로는 세계화를 얘기하지만 KBO와 구단들은 전혀 준비가 안 돼 있다”고 했다.

램지 바루드와 로마나 루베오는 웹진 <카운터펀치> 기고문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지구적 위기는 근본적인 변화의 기회를 내포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일말의 변화도 없거나”라고 썼다. ESPN 진출에 고무된 KBO 리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K방역’ 자화자찬이 한창일 때 이천에서는 후진국형 참사가 되풀이됐다. 경계를 늦춘 바로 그 순간, 이태원에선 다시 집단 감염이 일어났다. ESPN 화면에서 카메라를 조금만 돌리면 관중 없이 텅 빈 야구장이 눈에 들어온다. 정신이 번쩍 드는 광경 아닌가. 글 / 배지헌(<엠스플 뉴스> 기자)

    피쳐 에디터
    이재현
    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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