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 뉴욕 2부작 | 지큐 코리아 (GQ Korea)

EDITOR’S LETTER – 뉴욕 2부작

2020-08-19T15:46:08+00:00 |book|

1 브루클린 2012년 ― 제퍼슨 애비뉴 615번지, 낡은 고성처럼 스산하고도 묘하게 퇴폐적인 뉘앙스가 있는 그의 집에서 우리는 만났다. 집 안 곳곳에는 사진에서 본 장면들이 고스란했다. 흐트러진 침대, 치우지 않은 방, 편지 무더기, 곱슬머리 소년들. 빛이 들이치는 부엌 창에는 에밀리 디킨슨 시집 표지가 붙어 있었다. 동시에, 괴이하고 수상한 것도 발견했다. 수백 개의 깃털과 인형, 요란한 드레스와 바로크풍 거울들. 그 난장판 속에서 데이비드 암스트롱은 현관 콘솔 위에 엽서를 반듯하게 놓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엽서엔 “없는 동안 여름이 온통 쓸쓸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 집에서 14년을 살았어요. 맹렬하게 모으다가 갑자기 죄다 버리는 패턴이 있어요. 집은 잡동사니로 가득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아트워크라고 생각해요.” 낮고 다소 신경질적인 말투로 그는 아수라장인 집을 기꺼이 옹호했다. 모델이 도착하자 그는 첫 촬영지로 천장이 낮은 침대 방을 정했다. 포플린 시트 위의 무방비 상태 소년들, 안경을 벗고 보는 듯 모호하고 꿈결 같은 창문, 흠뻑 적셔진 오후의 빛. 드디어 그 고유한 장면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는군, 순간 몹시 들떴으나 데이비드 암스트롱은 스태프 중 누구도 방에 들이지 않았다. “나를 방해하는 것도 싫지만 모델은 더할걸요. 둥그렇게 모여서 자기만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해봐요.” 촬영이 끝나고 컷을 고를 때, 그는 자신의 완고한 태도에 대해 멋쩍게 이해를 구했다. 비슷한 컷들이 수도 없이 붙은 컨택 시트에 대해선 “다른 것보다는 가까운 것들을 모아요. 이 중 완벽한 컷을 찾는 데 몇 달이 걸리기도 해요. 미쳤다고 욕도 먹죠. 사진은 과학도 의학도 아니니까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이 대답으로, 데이비드 암스트롱의 사진이 영화와 그림 사이의 어떤 틈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진 한 컷보다는 비밀스러운 고백처럼 보이는 이유도.(데이비드 암스트롱은 2014년 가을에 세상을 떠났다. 부고를 들었을 때, 사진 속 친구들에 대해 그가 얘기했던 게 생각났다. “다들 사라지거나 죽거나 타버렸어요.”)

2 맨해튼 2012년 ― 허드슨 스튜디오는 채광 좋은 현대식 건물 13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제 층에 도착한 걸 알리는 ‘땡’ 소리는 쾌활한 프런트 맨이 팁을 잔뜩 받았을 때 울리는 벨소리 같았고, 뉴욕의 맑은 초가을에 어울리는 사운드였다. 예정대로라면 마이클 피트는 아홉 시 정각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아홉 시가 지나고 몇 번의 벨소리를 흘려보낸 후, 기척도 없이 그가 나타났다. 단정한 셔츠와 폭이 좁은 검정 팬츠, 파란색 컨버스 올스타 차림. 야구 모자의 챙을 옆으로 돌려 쓰고 손에는 커다란 갈색 가방(나중에 가방 안을 구경시켜줬는데 거기엔 대본 몇 권과 운동용 쇼츠, 얇은 면 티셔츠, 담배와 휴대 전화, <북아메리카 인디언 삶의 초상>이란 제목의 사진집, 매니 파퀴아오에게 선물 받은 권투 글러브가 있었다)을 들고 있었는데, 매니저도 없이 혼자였다. 예상보다 얼마쯤 헬쓱해 보였고, 그 때문인지 눈은 더 파랗고 입술은 더 붉었다. 모자를 벗자 결이 가느다란 금발 머리가 폭포처럼 이마 위로 쏟아졌다. 마이클 피트는 스튜디오 안의 모든 사람과 차례로 인사를 했다. 악수를 하면서 “마이클”이라고 작게 말하는 게 그의 인사 방식이었다. 그러곤 빠뜨린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꼼꼼히 둘러본 후 의자에 앉아 바나나를 먹기 시작했다. 셔츠도 팬츠도 심지어는 운동화 끈까지 모두 깨끗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마이클 피트는 한때 그런지 룩의 슈퍼 아이콘이었다. 티셔츠 솔기를 일부러 찢고 멀쩡한 운동화를 흙탕물에 굴리던 무리는 마이클 피트의 룩을 ‘농염한 그런지’라고 추앙했다. 마이클 피트는 그 시절과 지금은 달라졌다고 말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즉흥적으로 입은 것 같은 룩을 좋아해요. 하지만 요즘은 말끔한 옷도 괜찮아요. 전엔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것에도 이젠 우아하거나 고상하다는 다른 관점이 생겼거든요.” 바나나를 다 먹고 첫 컷을 찍을 때 그는 회색 버버리 스리피스 수트에 어떤 셔츠가 어울릴지 궁리하는 눈치였다. “셔츠 없이 입어보는 건 어때요?” 권했을 때 마이클은 “그거 좋네요, 아니면 바지 없이 입어볼까요?” 하는 시시한 말로 사람들을 웃겼다. 모니터에 뜬 마이클 피트의 모습은 낯선 감각을 부추겼다. 그는 블론드 헤어, 아름다운 파란 눈, 벌에 쏘인 것처럼 부푼 관능적인 입술, 전통적 기준의 미적 요소를 모두 가졌으되, 전혀 전형적이거나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유의 아름다움은 처음이었고, 굳이 묘사하자면 아주 시적인 동시에 더없이 선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