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남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 지큐 코리아 (GQ Korea)

배정남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2020-10-05T11:34:45+00:00 |interview|

웃음기를 지우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배정남은 부러질 것 같지 않다.

오버사이즈 체크 재킷, 블랙 톱, 와이드 팬츠, 모두 우영미. 블랙 더비 슈즈, 프라다. 실버 네크리스,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크롭트 니트 베스트, 골드 체인 네크리스, 모두 보테가 베네타. 폴딩 디테일 데님 팬츠, 우영미.

위빙 레더 재킷, 퍼플 터틀넥, 모두 벨루티. 그레이 울 팬츠, 메종 마르지엘라. 로고 네크리스, 디올 맨.

코듀로이 코트, 플라워 셔츠, 모두 구찌. 버건디 벨벳 팬츠, 펜디.

스트라이프 터틀넥,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촬영이 순식간에 끝났다. 확실히 이런 촬영은 좀 더 집중을 잘한다. 그리고 내가 빨리 끝내야 스태프들이 편하다.

대충 찍는다는 느낌은 없더라. 전력투구를 해서 빠르게 삼진을 잡으려는 투수 같았다. 모델 경력이 19년 차다. 그러니 화보는 자신이 있을 수밖에. 게다가 연기를 하다 보니 감정이나 분위기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연기할 때도 그런가? 영화 현장은 호흡이 길다. 또 준비한 대로 딱딱 풀리면 좋겠지만 감독님, 동료 배우의 반응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현장 흐름에 믿고 맡기는 편이다.

편하게 풀어주는 현장이 잘 맞나, 아니면 정확한 디렉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어휴, 나는 신인 배우다. 연기를 시작한 지 겨우 3년째다. 감독님이 나를 어떻게 이끌어주는가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이유도 있을 거고, 내 안에서 뭔가를 계속 끄집어내는 현장이 즐겁다.

자신도 몰랐던 재능이나 특별히 느는 게 있다면 뭔가? 얼굴 근육을 자유자재로 잘 쓴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미스터 주: 사라진 VIP>를 찍으면서 짐 캐리 같다는 얘기도 들었다.

지금은 배우가 더 어울리는 수식어 같아서 하는 말인데 여전히 모델이라는 자각이 있나?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모델로 봐도 좋고 배우로 봐도 상관없다. 그냥 내 본연의 느낌이 들면 된다. 뭘 해도 나는 나니까.

뭔지 알겠다. 그게 어떤 느낌이냐면, 비중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배정남이 연기한 배역은 다른 배우가 떠오르지 않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해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역할들도 비슷비슷했다. 아직 보여준 게 없다고 생각한다.

주로 어떤 배역이 들어오는지 알려줄 수 있나? 액션도 있고, 악역도 있고, 여러 역할이 골고루 들어온다. 생각보다 선택의 폭이 넓다. 그럼에도 내 이미지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전략적인 건가? 갑자기 새로운 모습을 들이대면 보는 사람들이 어색해하고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 나도 새로운 걸 하고 싶고 잘할 자신도 있지만, 확 변화를 주는 것보다 조금씩 내 이미지를 깨는 게 좋을 것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천천히 올라가야 천천히 내려올 수 있다.

‘나한테 이런 걸?’ 했던 배역도 있을까? 작년에 촬영을 마친 <영웅>이 딱 그렇다.

어떤 면에서? 안중근 의사의 순국 전 마지막 1년을 그린 영화에서 독립운동가를 연기했다. 윤제균 감독님과 미팅을 하면서도 ‘나한테 이 배역이 올까?’라며 확신을 갖지 못하다가 섭외 소식을 듣고 ‘우와’ 했던 기억이 난다. 실존 인물이고 역사적 의미가 담긴 작품이라 나름 진중하게 접근했다. 억지로 웃기는 장면이 없다. 진지하고 슬픈 감정 신도 있고, 뮤지컬 영화라 노래도 했다. 감독님이 나를 너무 잘 이끌어주셨다. 배우로서 많은 걸 배운 작품이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첫 발짝이라 잔뜩 기대하고 있을 텐데 코로나19 때문에 개봉 시기가 예정보다 늦춰지고 있다고 들었다. 많이 안타깝다. 작년에는 <미스터 주: 사라진 VIP>, <오케이 마담>, <영웅> 촬영을 하면서 바쁘게 보냈다. 예정대로라면 잘 지은 농사를 올해 수확하는 건데, 많은 사람이 고생해서 만든 작품들이라 아쉽고 서운하다. 얼마 전 개봉한 <오케이 마담>도 평소였다면 더 좋은 성적을 거뒀을 거다.

개봉을 앞두고 늘 자신이 있나? 처음에는 그랬다. 지금은 자신감 절반, 두려움 절반이다. 잘된 작품도 있고 잘 안 된 작품도 있으니까. 아무리 현장 분위기가 좋고, 우리끼리 잘했다고 해도 흥행은 까봐야 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나저나 어떤 이유로 <영웅>에 섭외가 됐는지 알고 있나? 윤제균 감독님이 섭외를 할 때 주변 사람들을 통해 그 배우의 인성에 대해 알아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리 연기가 뛰어나거나 재주가 좋다고 하더라도 인성이 첫 번째라는 거다. 그런 부분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배정남의 밑천이 바로 그 인성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동료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입을 맞춘 것처럼 배정남은 의리 있고 정 많고 남들한테 가식 없다는 증언이 나오는 식이랄까? 주변 사람들에게 촌놈 같은 사람이고 싶다.

촌놈이라니, 그게 어떤 의미인가? 오르막에 있든 내리막에 있든 늘 한결같은 놈. 거짓 없는 인생을 사는 놈. 주위에 잘하고 누구에게나 털털하고 솔직한 놈. 아니다 싶을 땐 아니라고 얘기하는 놈. 그렇게 살다 보니 그게 복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그러고 싶어도 솔직히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나? 그냥 뭐 없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살았다. 불필요하게 머리 쓰지 않고 사니까 편하다. 그리고 보면 안다. 다른 사람이 나한테 머리를 쓰는지 아닌지. 관찰 예능이 편한 것도 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그런데 배정남의 촌놈은 멋진 놈이기까지 하다. 그런 단계는 지났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면이 멋진 게 더 중요하다.

인생에서 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뭔가? 모델이 됐고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신기하다. 어릴 때는 농구 선수가 꿈이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미술을 하고 싶었다. 스무 살이 되니 디자이너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하나도 이뤄진 게 없다. 대신 딴 길이 열렸다.

모델이 꿈은 아니었다고?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 모델 일을 시작했다. 어떻게 계속하다 보니 잘하고 싶은 욕심이 점점 생기더라. 다른 인터뷰에서도 많이 말했지만 내 키로는 모델 명함도 못 내밀 때라 노력을 정말 많이 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잡지를 보면서 공부를 했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배우의 ‘ㅂ’자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만큼 성실한가? 뭘 해도 자신이 있다. 남들이 뭐라 해도 소신을 갖고 버텨왔다.

배우 이성민이 인터뷰에서 그랬다. “무엇을 하든 고수와 게임을 하는 게 실력이 늘지 않겠냐”는 말이 자극이 되어 버틸 수 있었다고. 어떤 배우와 같이 작업을 해보면 좋겠나? 그런 배우는 너무 많다. 지금 떠오르는 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촬영하면서 친해진 변요한. 둘이 청춘물을 같이 하면 재밌겠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영화 <태양은 없다> 같은 느낌으로. 나와 아주 잘 맞는 동생이라 친구 역할을 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가장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경험으로 뭐가 떠오르나? 고3 때 공장을 다닌 적이 있다. 꿈도 없고, 하루 벌어서 하루 살기 바빴을 때였는데 어린 나이에 인생에 대해 많은 걸 배웠다. 사람들이 치열하게 사는 모습도 지켜보고 무거운 프레스에 눌려 사고가 나는 것도 봤다. 그래서 그런지 밑바닥 인생에 찌든 역할을 연기해보고 싶다.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이십 대에 연기를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빨리 무너졌겠지. 실력도, 인성도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서 안 좋은 모습만 계속 들통나다가 아무도 나를 찾지 않게 됐을 거다.

그 이십 대로부터 배운 게 있다면 뭘까? 모델 일을 하면서 이름도 알리고 나름 잘나간 적도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더라. 그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게 우선이다. 작은 역할이라도 꾸준히 성실하게 하다 보면 언젠가 큰 역할을 할 수 있고, 주연을 하다 조연이 될 수도 있다. 다시 올라가기도 하고. 조급함 없이 그런 오르내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멋지다고 생각한다.

연기 외에 다른 일을 생각하는 것도 있나? 나이가 더 들면 옷을 만들거나 조그마한 위스키 바를 차리고 싶은 생각이 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아까 요즘 상황이 아쉽다고 했는데 그런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는 건 뭔가? 마음 편하게 외출을 할 수도 없으니, 집에서 반려견 벨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같이 낮잠을 자는 것만큼 위안이 되는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