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의 주역 라미 말렉 | 지큐 코리아 (GQ Korea)

007 시리즈의 주역 라미 말렉

2020-10-31T22:08:16+00:00 |interview|

라미 말렉은 아랍계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정점에 올랐다. 이제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영화 007 시리즈의 주역을 맡게 된 라미 말렉은 눈앞에 드러난 더 높은 봉우리와 마주하고 있다.

셔츠, 랑방. 시계, 네크리스, 브레이슬릿, 모두 까르띠에.

재킷, 셔츠, 팬츠, 모두 구찌. 부츠,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시계, 네크리스, 모두 까르띠에.

재킷, 셔츠, 진, 부츠, 모두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시계, 까르띠에.

재킷, 질 샌더. 티셔츠, 벨트, 진, 부츠, 모두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시계, 네크리스, 모두 까르띠에.

오늘 이야기는 라미 말렉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2019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직후 무대 뒤로 걸어가던 말렉의 기억에서부터 시작한다. 당시 말렉은 몸이 너무나도 가벼워 마치 “마비된 느낌”이었다. 무대 뒤에서는 에이전트 더그 럭터핸드와 홍보 담당자 미셸 마골리스 등 일행 몇몇이 그를 맞이했다. 마비된 감각은 서서히 깨어나 말렉은 곧 감격으로 벅차올랐다. 그가 좋아하는 아가베 시럽을 넣은 음료가 기다렸다는 듯 어디선가 나타났다. 말렉은 마지막 한 모금까지 음미했다.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는 장내 소리가 시상식이 끝나감을 알렸다. 말렉은 볼륨을 한참 줄인 채 TV 중계를 보는 기분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짧고 단조로운 연주가 멈춘 뒤 광고가 나가는 시간 동안 행사장을 채우는 사람들의 말소리, 수상자 발표에 맞춰 조금씩 느려지는 접시나 잔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 종료를 알리는 안내가 아득한 곳에서 들려왔다. 말렉은 기쁜 마음으로 소란스러운 시상식장을 벗어났다.

시상식 당일 말렉과 함께한 일행은 결코 적지 않았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에게 여러 면에서 최초의 경험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주역을 맡은 첫 상업 영화였고, 처음으로 전담 보조원이 촬영장에 배치됐으며, 아카데미상 후보 지명도 처음이었다. 말렉은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도와준 모두를 초대해 함께 시상식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메이크업 디자이너 잔 스웰, 말렉이 프레디 머큐리와 무서울 정도로 닮아 보일 수 있도록 공헌한 영국 출신 ‘움직임 코치’ 폴리 베넷, 말렉의 첫 전담 보조원 엠마 해먼드까지, 쿨한 게스트 리스트는 이렇게 완성됐다.(말렉은 오스카 측에서 굉장히 협조적이었다고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카데미상 수상의 역사가 새겨졌다. 물론 이 역시 처음이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말렉 일행은 미리 준비해둔 여러 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 밤새 파티를 즐기러 출발했다. 가장 먼저 폭스에서 주최한 파티에 들러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 등 퀸 멤버들과 술잔을 나눴다. 말렉의 경호팀 일원 중 한 명인 존이 아담한 오스카 트로피를 맡아 철통같이 지켰다. 북적대기 시작하자 그들은 파티장을 떠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춤추고 업계 관계자나 유명인과 마주치며 상을 받은 지난밤이 현실임을 재차 실감했다. “집에 가야 할 이유는 없었어요. 밤새 정신없이 춤을 췄죠.” 말렉이 그 밤을 떠올렸다. 결국 모두 숙소로 돌아갔고 말렉은 “침대에서 엄청난 양의 파스타”를 먹으며 밤을 마무리했다.

다음 날 아침 말렉은 전화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문자 메시지와 왓츠앱 메시지, 부재중 통화가 본 적 없는 속도로 쌓이고 있었다. “며칠간 계속 그 상태였어요. 전화기에 불이 날 정도로 연락이 쏟아질 것을 감안해 통화를 미루고 시간을 주는 사람도 몇 있었고요. 연락을 준 모두에게 답하는 데 거의 일주일이나 걸렸어요.” 말렉은 잠시 숨을 골랐다. “굉장히 충만한 기분이에요. 친구들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그런 순간을 축하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주변 많은 사람에게 저는 여전히 함께 자라며 연기에 도전하던, 연기자로서 성공할지 어떨지 다 같이 지켜보던 꼬마거든요.”

시상식이 끝난 지 48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 말렉은 촬영장으로 복귀했다. 아카데미 시상식보다 한 달여 앞서 열린 2019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드라마 <미스터 로봇>의 네 번째 시즌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초심으로 돌아가 있었다. 운명적인 순간에도 이처럼 (다 안다는 식의 윙크와 함께) 어깨를 으쓱하고 넘기는 건 말렉에게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의 아카데미상 수상소감마저도 “제가 명백한 선택은 아니었을 수 있겠지만, 어떻게 잘 풀린 모양이에요”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주류 영화계에 말렉처럼 생긴 배우는 많지 않다. 이집트 출신 배우도 마찬가지다. 말렉 이전에는 남녀 불문하고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아랍계 배우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러모로 말렉이 거둔 비평적 및 상업적 성공은 (특히 그가 생전 끝없는 비난의 대상이 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화려한 파르시 청년을 연기했다는 점에서) 기존 영화계를 향한 선의의 침입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그리고 많은 경우 현재진행형으로, 폐쇄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며 마지못할 때만 다양성 관련 문제의 존재를 인식하곤 하는 시스템에 대한 해킹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2018년 웨스트 할리우드에서 햇빛 아래 선 채 찍은 첫 <GQ> 커버 촬영 이후 말렉은 주연 배우라는 위치와 역할의 무게에 익숙해져왔다. 당시 그는 이미 하이패션 화보도 몇 개 찍은 상황이었지만, 평범한 이집트인 꼬마 라미의 모습이 LA 선셋 불러바드의 거대 광고판에 걸린 현실을 여전히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패션쇼에 초대받거나 디올 같은 브랜드의 얼굴이 되는 것이 그에게는 기쁜 동시에 믿기지 않았던 일이다. “주인공이라…, 안 될 건 없죠.” 당시 그가 한 말이다. “세상은 바뀌고 있죠. 그런 변화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에요.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에요.”

말렉의 염려와 달리 변화는 일시적인 유행에 머무르지 않았다. 영화계는 그에게 대작 영화 첫 주연이라는 기회를 주었고, 말렉은 세계적으로 9억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리고 골든 글로브, 오스카까지 끌어 모은 연기로 보답했다.
그로부터 18개월이 지났다. 이제부터 시작인 것은 영원의 시기다. 어떤 한순간의 인물에서 불멸의 스타로 거듭나는 시기인 것이다. <타이타닉>(1998) 이후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이후의 브래드 피트, 그리고 <퍼펙트 스톰>(2000) 이후의 조지 클루니를 생각해보라. 한번 성공하는 것은 차라리 쉽다. 문제는 영원히 남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원의 시기에 단절이 발생했다. 완곡하게, 또는 우회적으로 말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우리는 팬데믹 선포 아래 이상하면서도 끔찍하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스스로들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점점 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생각해내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그리고 대중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라미 말렉 같은 인물을 바라보며 현실 감각을 되찾으려는 고질적인 경향을 보인다. “내가 현재 느끼는 감정들이 정상적인가요?”, “내 감정을 투영하려는 건 아니지만, 당신도 이 모든 상황 때문에 조금은 망가져 있지 않나요?” 같은 혼잣말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는 것이다. 말렉이 그에 응답했다. “한편으로 저는 여유가 생긴 것에 감사했어요. 가능한 한 많이 일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그저 느긋하게 앉아 그간 놓친 것들…, 수많은 콘텐츠를 즐기고 싶어 하는 마음 사이를 오가곤 했거든요.”

코로나 사태 발발 직전까지 5년간 말렉은 영화 촬영과 홍보를 위해 전력으로 달려왔다. 차기작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경우 팬데믹이 닥쳐 전 세계 공개를 불과 몇 주 앞둔 상태에서 영화 관련 일정이 조금씩 조정되기 시작했다. 이후 길고도 조용한 휴지기가 뒤따랐다. 이는 말렉에게 여러 가지를 의미했는데 그중에서 숨을 내쉴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가장 컸다. 그럼에도 말렉은 중단된 여러 콘텐츠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자조적인 분위기를 설핏 내비치기도 했다.

라미 말렉과의 인터뷰는 영국의 락다운 상황이 아주 소폭 완화된 시점에 이뤄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줌 Zoom’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영상 통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평범한 일상으로의 즉각적인 복귀를 여전히 우려한다. “언젠가는 다시 락다운 생활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다들 마치 매일매일이 새해 전야인 것처럼 밖으로 뛰쳐나와 마스크도 없이 돌아다니더라고요. 그냥 마스크를 쓰라고요. 그게 전부예요.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말렉은 할리우드를 떠나 런던에 머물고 있다. 런던으로 가야만 한다고 깨달은 시점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확산돼 팬데믹 선포가 확실해진 때였다. “저와 아주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을 못 보게 될 가능성이 있었어요.” 말렉이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보헤미안 랩소디>에 함께 참여한 출연진과 크루, 그리고 특히 지난 몇 년간 연인으로 지내온 사이이자 영화의 공동 주연이었던 루시 보인턴을 의미한다. 그가 동료들에 대해 얘기할 때면 어딘가 익숙한, 영화 홍보 행사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모두 “가족”이고 “정말로 특별한 경험”이었으며 “평생 절친”이 되었다는 식이다. 그러나 아카데미 시상식에 동행하고 락다운 기간 동안 그들과 같은 도시에 머무르고자 하는 그의 행동은 분명 새롭고 신선하다. 영국의 락다운 상황이 완화되고 말렉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는 와중에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보헤미안 랩소디>에 함께 출연한 배우 귈림 리네 집 뒷마당에서 열린 바비큐 파티였다. “앞으로 두고두고 계속될 거라고 확신하는 관계들이에요. 우리 모임의 결속력이 얼마나 탄탄한지 알면 다들 항상 놀라곤 하죠.”

랩톱 화면의 부연 불빛 속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커다란 눈과 흡혈귀처럼 하얀 피부(중요하지 않지만 그는 올해 39세다), 그리고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중저음 목소리를 가졌다. 영상 통화로 인터뷰를 나눈 7월 말 기준,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시켜온 미니멀한 차림이다. 스웨트 셔츠 위로 버튼업 그랜대드 칼라가 삐죽 드러나 있고 머리에는 캡을 썼다. 말렉의 스타일은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카멜레온 같다고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불멸의 스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전에 없던 사고가 필요한 법이다. 최근 그는 생 로랑(말렉은 아카데미 시상식에 특별히 맞춘 안토니 바카렐로 턱시도 차림으로 나타났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더 최근에는 새롭게 재발매된 파샤 워치의 홍보 캠페인에 참여함으로써 까르띠에와의 관계에 힘을 받기도 했다. 까르띠에 홍보 캠페인은 말렉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롯해 지난 수년간 주요 행사에 까르띠에 제품을 착용하고 참석한 끝에 성사된 일이다. 트로이 시반, 윌로 스미스 등 작품과 인물이 서로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스타 총 5명이 참여한 캠페인 자체는 뼛속까지 대놓고 2020년이다. “까르띠에 측에서 선정한 인물들의 조합이 현실 세계를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그런 건 지금껏 보기 힘들었거든요. 실체를 갖춘 스타일이었고, 그래서 제게 자연스럽게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죠.”

더 중요한 것은 말렉이 까르띠에 같은 브랜드와 잘 어울릴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이번 캠페인 참여자들은 기존에 비해 더욱 새롭고 대담하며 시대정신을 비트는 다양한 모습으로 문화를 선도하는, 최근 들어 본격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이들이다. 까르띠에식 명명법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의 부족이다. 다른 곳에서는 팀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명칭이야 어찌 되었든 실체를 가진 무언가가 결국 스타일과 동등한 위치까지 싸워 올라온 것만 같다. 일순간의 유행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다양성에 대한 생색내기식 존중이 판치는 시대에 진정한 연대를 보이기 위한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다름 아닌 돈이다.

주얼리(까르띠에), 아카데미상(폭스), 텐트폴 영화 예산(<보헤미안 랩소디>), 또는 이미 하나의 상징인 시리즈(<007 노 타임 투 다이>)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쏟아 부은 수백 수천만 달러의 홍보 예산은 권력을 지닌 자들이 말렉을 그만큼 신뢰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출이 재능과 시장성뿐 아니라 말렉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투자라는 사실도 그들은 이해하고 있다. 전형적이지 않고 똑똑하며 사려 깊고 좀 더 친절한 주연급 캐릭터에 대한 투자인 것이다.

이러한 투자, 제각기 말렉에게 무언가를 거는 상황에서는 일종의 제약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배역을 선택할 때도, 사람들과 어울릴 때도, 심지어 레드 카펫 의상마저도 제약을 받는다. 떠오르는 중에는 보다 높이, 보다 빨리 날아도 괜찮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낮고 느리게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돌이켜보면 ‘어…, 그건 좀 아슬아슬했네’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당연히 있죠.” 말렉이 자신의 패션 스타일을 돌아보았다.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 때는 의상이 각별히 마음에 들었어요. 아주 근사하고 클래식하면서도 현대적인, 우아하고 세련된 스타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제대로 숙성되어야만 나오는 스타일이죠. 언제가 디카프리오가 ‘그냥 매번 검은 턱시도를 입으세요. 그럼 잘못될 걱정은 없어요’라고 말한 게 생각나네요. 일리 있는 얘기예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기만의 개성을 담고 싶기야 하죠. 하지만 미래에 대한 생각도 해야 하거든요.”

미래.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말렉 역시 최근 들어 미래에 대한 생각을 더욱 많이 한다. 5년 만에 처음으로 유의미한 휴식기를 맞이한 그는 이제야 비로소 물결이 잠잠해진 듯, 우선순위가 명확해졌다고 한다. “그동안 달리기만 했어요. 아카데미상 수상 이후 곧바로 정신없이 <미스터 로봇> 새 시즌을 찍느라 제가 원하는 만큼 신경을 못 쓴 친구들도 있어요. 요즘은 휴식을 취하며 확실히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됐어요. 운이 좋게도 당장 다음 일거리를 구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저와 제 사람들과 중요한 관계를 가꿔나가는 데 시간을 쓰려고 해요. 앞으로는 그쪽에 초점을 맞추려고요.” 다음 작품이 이미 다 준비되어 있는 건 사실이다. 특히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007 시리즈 25번째 작품일 뿐 아니라 대니얼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로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상 수상의 후광에 힘입어 말렉에게 섭외 요청이 갔다고 보는 게 터무니없는 추측은 아니겠지만, 사실 말렉과 캐리 조지 후쿠나가 감독 사이에 출연 이야기가 오간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시상식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감독님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대본이 확정되기도 전이죠. 그냥 대화였어요. 캐릭터에 대한 얘기를 전화로 주고받았죠. 때로는 직접 만나기도 했고요. 그렇게 서로에 대한 공감대를 단단히 만들어갔어요.”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대화의 주제는 매번 긴장에 관한 것으로 되돌아갔다. 어떻게 해야 관객의 마음을 움직여 심장을 더 빨리 뛰게 할지가 관건이었다. “관객에게 진짜로 공포감을 심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깜짝 놀랄 요소를 딱 하나 넣는다면 무엇이 좋을까요? 어떤 상황 때문에 이렇게나 음산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렉의 대본 욕심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보기 드물게 뛰어난 대본과 조금 아쉬운 대본을 고루 겪어보고 나서는 대본의 완성도가 단순한 선호의 영역에서 이제는 양보 불가능한 조건으로 바뀌어버렸다. “결국 중요한 건 언제나 기본이에요. 어떤 대본이 캐릭터 측면에서 저를 흥분시킨다면 저는 거의 바로 알아차릴 수 있어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감독이 주도하는 작품에 훨씬 많이 끌리더라고요. 하지만 대본도 좋아야 해요. 특별할 정도로 좋은 대본이어야 해요. 그리고 훌륭한 감독과 고유하면서도 특별한 대본 두 가지만 갖춘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죠.”

말렉이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빌런인 사핀 역을 맡기로 했다고 발표됐을 무렵, 대니얼 크레이그가 강하게 요청해 배우 피비 월러-브리지가 각본가로 합류했다. “이제는 피비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유니크한 목소리를 갖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죠”라고 말문을 연 말렉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본드를 탄생시키는 데 정말 많이 기여했어요”라고 짚었다. ‘새로운 시대의 본드’라는 개념은 트위터가 뒤집어질 정도의 논란을 불러일으킨 키워드다. 진보적 변화를 강력히 요구하는 측과 그에 맞서 대중문화가 오염된다고 주장하는 측이 팽팽히 맞서는,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이 펼쳐졌다. 그중에서도 본드 시리즈가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과 관련해서 가장 뜨거운 설전이 벌어졌다. 피비 월러-브리지는 오로지 영화 자체의 시선에만 신경을 쏟았다고 온라인 매거진 <데드라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때 피비 윌러-브리지가 말했다. “이제는 그냥 성장해야 해요. 진화가 필요한 거죠. 문제는 부적절한 방식으로 여성을 대하고 있는 주체가 영화라는 거예요. 본드는 상관없어요. 본드는 그 캐릭터에 충실해야 하거든요.”

전화와 미팅으로 길고 긴 대화를 나누며 준비한 말렉과 후쿠나가 감독은 막상 제작이 시작되자 재빨리 움직였다. 촬영은 <미스터 로봇> 촬영 스케줄이 없는 틈을 타 노르웨이로 날아가 일주일간 영화를 찍고 오는 식으로 진행했다. 말렉은 이전까지와 달리 치밀하게 준비할 시간이 부족한 채로 촬영장에 도착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흥분되는, 짜릿한 요소가 생겨났죠. 때로는 그런 것이 크리에이티브 과정에 도움 돼요.”

007 시리즈에 빌런으로 등장하는 말렉을 떠올리면 일순 신선하면서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당연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007 시리즈는 여성뿐 아니라 인종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진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기자간담회 중 말렉은 철 지난 오리엔탈리즘을 바탕에 둔 빌런이 아니냐는 우려를 즉각 일축하고 나섰다. “특정 사상 또는 종교와 결부된 테러 행위와 제 캐릭터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어요. 저는 그런 건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러니 그런 이유로 저를 섭외한 거라면 제가 발을 뺐을 거예요. 하지만 감독님의 비전은 그런 것과 명백히 달랐죠.”

영화의 내용에 대해 말렉에게 캐묻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대놓고 치사한 질문일 뿐만 아니라 라미 말렉이라는 사람 자체가 시원찮은 화질의 영상 통화 너머의 압력에 굴하기에는 너무나 단단하기 때문이다. 또한 재미나 스릴을 위해 스포일러를 흘리기에는 작품에 참여한 창작자들을 존중하는 마음도 크다. 대신 그는 대니얼 크레이그의 열정과 존재감에 대해 얘기했다. 역사적인 시리즈의 무게를 짊어지고서도 크레이그가 본드로서 테이크마다 보여준 끝없는 에너지를 얘기했다. 007 시리즈의 주인이자 제작자 바버라 브로콜리와 마이클 G. 윌슨에 대해 얘기할 때는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하지만 어쨌든 결과는 11월로 예정된 개봉일이 오기 전까지는 누구도 모르는 상태일 것이고, 앞으로 시작될 말렉의 새로운 이야기 또한 그때가 되어야 첫 장이 채워질 것이다.(<007 노 타임 투 타임>은 지난 10월 초, 2021년 4월로 다시 한번 개봉이 연기됐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는 어느 정도 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감에 따르면 지금껏 007 시리즈를 통해 유명해진 어떠한 빌런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빌런이 탄생할 것만 같다. “제가 어떤지 아시잖아요. 저는 항상 굉장히 복잡한, 가장 복잡한 캐릭터를 추구하거든요. 저의 모든 부분을 변화시켜야만 연기할 수 있는 그런 캐릭터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저를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만들려면 꽤 복잡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런 그가 캐리 후쿠나가 감독과 함께 만들어낸 캐릭터가 가져올 새로운 긴장과 갈등은 말렉의 과거 출연작을 아는 관객이라면 의심 없이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말렉은 깐깐하고 박한 배우다. 그리 후한 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소리를 질렀을 부분에서 그는 속삭인다. 남들은 몸짓을 내보일 부분에서도 그는 완고하고 흔들림이 없다. <미스터 로봇>에서 그가 이를 악무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날카롭게 들이마시게 한다. <보헤미안 랩소디>에서는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크고 파란 눈의 희미하면서도 한결같은 흔들림이 비명을 대신했다. <미스터 로봇> 첫 시즌의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말렉의 캐릭터가 극중 심리상담사에게 뭔가를 털어놓는 장면은 할리우드에서 말렉의 위치를 단지 신기하기만 한 배우에서 경쟁력을 갖춘 배우로 격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장면은 말렉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로 시작하는데, 그는 어딘가 간절하면서도 곤란에 빠진 듯한, 취약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작고 초라하며 온순하고 상처 입은 모습이다. 길든 짧든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겪을 법한 그런 모습인 것이다. “저는 계속 거짓말을 해왔어요.” 무력한 모습으로 내뱉는 대사에 시청자로선 애처로움과 어쩐지 죄책감마저 든다. 하지만 그 순간 말렉은 상황을 뒤집는다. “웹캠을 통해 당신을 지켜볼 때가 있어요. 당신은 가끔 눈물을 흘리죠. 저처럼 말이에요.” 그는 더욱 에너지를 뿜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아래로 뚝 떨어져 밑에서 그의 모습을 담기 시작하는데, 언제 어떻게 그렇게 바뀌었는지 시청자는 제대로 알기 힘들다. 말렉은 이제 지배적이며 위험하고 위협적이다. 그러다 갑자기 눈에 눈물이 아른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자신의 약한 면을 노출시키고 만다. “이 외로움에서 벗어날 길을 찾고 싶어요. 당신처럼 말이에요.” 라미 말렉의 연기 스펙트럼은 빛과 어둠을 지체 없이 오간다.

방역이 강화된 이 시기를 말렉은 사람들과 영상 통화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거나 그간 보고 싶었던 콘텐츠를 챙기며 보내고 있지만, 다음 행보에 대한 생각은 한시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지금이야말로 앞으로를 조금 더 잘 준비하고 계획하기 위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다음 걸음을 고민하기 위한 기회일 수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느긋하게 맞이하는 아침과 긴긴 밤들은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 각자 끌어안고 있는 것들을 점검하고 평가하기 위한 축복 같은(그러나 때로는 저주스러운) 시간을 우리에게 주었다. “제가 이른바 ‘완벽주의’라는 것에 정말로 집착해왔던 건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완벽이 과연 무엇인지, 실제로 도달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일이나 삶에서 매번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되는 건 아닌지 갈수록 의문을 품게 돼요. 완벽을 추구하기에 실패가 예정되는 것은 아닐까요?”

말렉이 까다롭고 꼼꼼하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적다. 그는 그침 없이 테이크를 계속하며 그때마다 주어진 장면에 미묘하게 새로운 느낌과 분위기를 입힌다. 쉽게 잡히지 않고 실체조차 불분명한 ‘더 나은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처럼 엄격한 기준을 가장 많이 적용하는 대상은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인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상을 많이 받아도 스스로를 의심하는 게 가능하더라고요. 웃긴 얘기지만, 다른 많은 배우에게서 똑같은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상상도 안 되는 그런 배우들 말이에요. 작품을 또 할 수 있을지, 앞으로 영영 끝나는 건 아닐지 지금도 불안하다는 거예요. 진짜 유명한 배우들이 말이에요. 그런 마음가짐에는 뭔가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어요. 배고픈 상태를 유지하게 해주거든요. 잘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정체가 드러날지도 몰라, 발각될지도 몰라, 다들 내가 실은 가짜였다는 것을 알아차릴지도 몰라’ 같은 생각을 늘 갖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남들은 제 성취를 두고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재능을 바탕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노력을 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쏟아지던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차분함을 되찾았고, 많은 것이 분명해졌다. 모든 게 잘 풀린 건 그를 위해서이고 잘 풀리도록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낸 것도, 그리고 여전히 해답을 찾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렉의 입장에서는 과연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그는 사회나 국가 등 한 개인의 수준을 뛰어넘는 거대 담론에 뛰어들기를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거부하지만, 그러면서도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권력과 특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깨달음을 틈틈이 얘기한다. “우리 모두에게 꽤나 힘든 시기였죠”라고 말렉은 운을 뗐다. “앞으로의 목표를 찾는 중이에요. 제가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을지, 저의 책임은 무엇인지, 계속해서 배우며 제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죠. 연기자로서는 물론이고 락다운 종료 후 일상으로 돌아가는 한 개인으로서도 정의를 옹호하고 대변하기 위한 방식을 찾고 있어요. 접근 방식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요.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깨우쳐나가도록, 그리고 스스로의 정신과 신체를 잘 돌볼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거죠.”

영화감독이나 비평가들이 종종 보내는 찬사와 같이 말렉은 독특하고 고유한 존재다. 그는 자기 얘기를 떠벌리지 않고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며 클랩백(날카롭고 재치 있는 빠른 반격, 비판, 응수를 뜻하는 신조어. 주로 SNS에서 쓰인다)과도 거리가 멀다. 자신이 지닌 힘을 신중하게 행사하며, 지금껏 할리우드라는 생태계에서 본 적 없을 정도로 업적이나 공적의 광고를 꺼리는 편이다.

그렇기에 본인이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브라이언 싱어를 <보헤미안 랩소디> 감독직에서 퇴출시킨 주역이 말렉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당시 싱어 감독의 과거 행동과 관련하여 드러난 의혹은 한 출연진의 말에 따르면 혐오스러울 정도였다.(그는 <보헤미안 랩소디> 이후 한 편의 영화도 찍지 못했고, 2019년에는 해당 작품과 무관한 과거 성폭력 폭로가 줄줄이 이어졌다.)

“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폭력을 용인한 적이 없어요.” 영상 통화 화면 너머 말렉의 눈빛이 단호하다. “공정성과 정당성,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이 제게는 늘 중요했어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떠한 종류의 폭력도 용납할 수 없어요. 길을 가다가 폭력이 행사되는 상황을 마주한다면 저는 참지 않을 거예요. 누군가 자신의 힘을 남용하는 것도 저는 참지 않을 거예요. 특권의식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촬영장에서 남을 함부로 대하는 추악한 장면들을 목격한 적이 있어요. 저는 그런 상황에서 그냥 넘어가거나 못 본 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당연히 그에 대한 제 생각과 의견을 얘기했어요. 그리고 그런 상황이 막 벌어지기 시작한 시점이라면 더 강하게 얘기를 하죠. 제 위치가 어떻든 간에 말이에요. 저는 그런 분위기나 환경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통화가 끝나갈 무렵, 이야기를 마친 직후 카메라를 내려다보는 말렉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너무 깊은 얘기였나요? 너무 어두웠어요?” 말렉이 물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때 너무 깊거나 어두운 얘기라는 게 과연 있긴 한 건지 모르겠다.

우리의 대화는 주제 곁을 맴돌며 온 더 레코드와 오프 더 레코드 사이를 오가고,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거나 단어를 신중히 고르기 위해 이따금 멈추기도 했다. 여느 전화 통화와 다를 바 없다. 삶에 긴 휴식을 맞이한 작금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깊고 어두우면서도 화려한 데다 기운이 넘친다. 어색하고 처연하고 연약하면서도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깐깐하고도 달콤한, 속에 불길을 품었으면서도 냉정한 모습의 라미 말렉이 있다. 길을 찾아내고야 만, 그리고 또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중인 라미 말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