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미더머니9]을 통해 본 한국 힙합의 새 얼굴 | 지큐 코리아 (GQ Korea)

[쇼미더머니9]을 통해 본 한국 힙합의 새 얼굴

2020-12-18T20:04:48+00:00 |tv|

<쇼미더머니 9>이 시작됐고 한국 음악 신에서 힙합은 또 한 번 새 얼굴을 드러냈다. 래원, 스윙스, 릴보이가 한 예다.

‘킬링 벌스’를 아시는지로 본인의 나이를 가늠해볼 수도 있겠다. 킬링 벌스는 유튜브 채널 <딩고 프리스타일> 코너 중 하나다. 유명 래퍼가 원 테이크로 자신의 대표곡을 부른다. 주 시청자 10대, 시간은 15분 내외, 보통 조회수 1백만을 넘긴다. 가장 인기가 높았던 건 창모. 2020년 11월 현재 조회수가 2천만을 넘었다.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은 래원, 역대 킬링 벌스 등장 래퍼 중 최연소다.

랩은 거칠게 정리하면 비트 위에 얹히는 연설 혹은 시 낭송이다. 시에도 줄거리가 있고 대중물의 형식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오늘날 대중음악 가사에도 여전히 줄거리가 있다.(‘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는 제목부터 줄거리다.) 동시에 랩은 비트 사이에서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목소리다. DJ의 “클랩 클랩”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랩이고, 동네 슈퍼의 “오늘 고등어 특가로 모십니다”도 개념으로는 일종의 랩이다.

요즘 힙합에서는 사람의 목소리도 악기다. 오토튠이 단적인 예다. 랩 가사도 소리 자체의 쾌감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래원의 가사가 극단적인 예다. 래원의 가사에는 줄거리가 없다. “오태식의 모태신앙 오데마시계/오태식은 뭐 드시나 서울의맛집에”는 줄거리로 해석하면 의미가 없다. 소리 내어 읽어봐야 이 가사의 운율을 실감할 수 있다. 발음이라는 기준으로, 서사 대신 소리를 비트에 꽉 채운 것이다.

이런 가사의 배경 중 하나는 래원의 나이 아닐까. 래원은 2001년생. 언젠가 다른 2001년생과 나눠본 이야기에 따르면, “2000년 전은 역사고, 내 삶에서 유튜브가 없던 적은 없었다”는 시대의 사람이다. 래원의 가사로도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래원의 ‘오태식’은 모티프 자체가 영화 <해바라기>의 한 장면이다. 이제 그 영화는 김래원의 포효와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 속이 후련했…냐!”라는 대사로만 남았다. 래원이 오태식을 쓰는 범위도 여기까지다. 맥락 대신 조각으로 남은 짤과 밈만 스타카토처럼 끊어질 듯 붙어 새로운 노래가 나온다. 이게 무슨 말인지 궁금하신 분은 ‘오태식’을 들어보시면 된다.

옛날에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보증하기 위해 소개장을 주고받았다. 전통은 지금도 여전해서, 한국의 소개팅처럼 사회 곳곳에서 사람의 추천이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래퍼도 그랬다. 신인 래퍼는 유명 래퍼의 곡에 피처링으로 참여하며 자신을 증명하고 알린다. 21세기 래퍼 래원은 자신을 알리는 방법도 다르다. 래원이 알려진 계기는 작년의 <쇼미더머니 8>, 올해 <쇼미더머니 9>에 지원하기 위해 올린 유튜브 영상, 그리고 킬링 벌스다. 이 전략은 적중했다. 래원 편이 올해 20년 차 래퍼인 다이나믹 듀오 편보다 조회수가 높다.

이제 한국 힙합을 이야기하면서 <쇼미더머니>를 뺄 수 없고, <쇼미더머니>는 한국 힙합 최고의 이슈메이커인 스윙스와도 연관이 있다. 2019년 스윙스는 프로듀서로 참가해 ‘인맥힙합(이 단어 자체가 너무 한국적이다)’ 논란을 빚었다. 스윙스는 논란을 없애고 싶다면서 2020년에는 참가자로 출연했다. “내가 왕따 출신인데 무슨 인맥힙합이냐”라는 말과 함께.

스윙스 본인의 명예회복은 개인 사정이고, 스윙스의 <쇼미더머니 9> 참가는 힙합 아티스트들이 미디어를 이용하는 방식이라는 면에서 굉장히 흥미롭다. 인터넷 환경과 방송에 익숙한 오늘날의 아티스트들은 미디어를 아주 잘 활용한다. 총 방송 시간 안의 분량 확보가 관건이라면 방송에서의 프로듀서 권위는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눈에 띄는 것, 좋은 것을 만드는 것, 그래서 기억에 남는 것이지, 방송 프로그램이라는 작은 틀 안에서 으스대는 게 아니다.

지금 성공한 아티스트들은 이 사실을 몸으로 안다. 추억의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때만 해도 가수들은 자신들의 랭킹이 매겨지는 데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반면 개코는 <쇼미더머니 6> 사이퍼에서 노래했다. “출연의 명분이 뭘까 고민에 밤을 새/진지 빨지마 인마 어차피 예능 아니냐/빡세게 설탕 모아서 비싼 밥이나 한 턱 쏴/동네 친구 얘기에 다시 보기를 결제/친구 친구였던 놈들이 거기서 경쟁해/난 심취했고 맘 비우고 봤어 대박 친 드라마”. 도끼는 같은 노래에서 이 사실을 더 간단히 요약했다. “이용당하지 않아 내가 이용하는 거지”.

그 말처럼 지금의 미디어와 아티스트는 서로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미디어 활동을 기피하는 라디오헤드형 아티스트의 시대는 끝났다. 신비주의 자체가 콘셉트인 뱅크시 정도를 빼면 누구도 이렇게 활동하지 않는다. 킬링 벌스 역시 아티스트들이 더 출연에 적극적이라고 한다. “공연하듯 준비하고, 하고 나면 시원하다고 해요”라고, <딩고 프리스타일> 박동준 PD도 말했다. 이제는 모두가 SNS라는 채널을 갖고 있고, 모두 자신의 채널로 콘텐츠를 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디어와 아티스트는 서로의 힘과 역량을 주고받으며 신종 금융 상품처럼 가치를 튀겨나간다. 미디어는 아티스트를 소재 삼아 콘텐츠를 만들어 송출하고, 아티스트는 그 콘텐츠를 소재 삼아 2차 콘텐츠를 만들어 자기 채널에 송출한다. 그럼 제3의 다른 미디어들이 송출된 콘텐츠를 보고 그 이야기를 재생산하며 계속 송출한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 힙합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이게 뭐야’라며 들여다보고, 그러면서 시장이 점점 커져간다. 지금의 한국 힙합은 어느 정도 그 과정이 반복되며 커진 시장이다.

이건 힙합의 본거지인 미국과는 조금 다르다. 미국 힙합 아래에는 흑인 하층민의 열악한 상황이 있고, 그 상황을 승화시킬 만큼 압도적이고 원초적인 에너지가 있다. 그 상황과 에너지 속에서 “드럼 루프 위에 박자와 운율을 맞추어 이야기만 해도 음악이 된다”는 힙합의 포맷이 만들어졌다. 한국 힙합은 여기에 온갖 한국 요소를 집어넣었다. 인터넷 문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극한 경쟁 예능, 정통 힙합에 대한 진지한 (인터넷)논쟁, 한국 대중음악 특유의 발라드 랩, 발라드 랩에 대한 정통 힙합 측의 공격, 이들이 20여 년 동안 뒤섞였다. 그 결과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한국 힙합이 만들어졌고, 2019년 연말 음원 차트 1위는 래퍼들이 부른 ‘아마두’가 됐다.

래원의 가사 속 단어 역시 한국 힙합이다. 미국 힙합 가사의 상당수는 갱들의 무서운 생활이나 사치스러운 소비 습관이다. 반면 래원의 가사 속 단어는 인터넷 밈과 수험생 기출 용어다. ‘반 페르시’ 등 유명한 해외 축구 스타, ‘카사딘 블루’ 등의 게임 용어, 원효대사 해골물처럼 모의고사 문제집에 나오는 한국 대입 수험생 단어들. 래원의 노랫말은 진짜 지금 한국 청소년의 잠재의식이고, 진짜 한국 청소년의 잠재의식이 가사로 구현되었다는 점에서 2020년 한국 힙합의 한 모습이라고 보았다.

지금 한국 힙합이다 싶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릴보이다. 그의 2011년 데뷔 싱글 ‘오피셜리 미싱 유’는 대중의 인기를 얻었으나 한국풍 ‘리얼 MC’들에게는 비난을 받았다. 릴보이는 몇 년 동안 정신적으로 앓다가 <쇼미더머니 9>에 출연해 말했다. “나는 다이나믹 듀오와 슈프림팀, 에픽하이의 아들이라고 자부해요.” 모두 리얼 MC로의 인증(?)과 대중적 성공을 모두 잡은 팀이다. 이제 한국 힙합은 정통 논쟁을 넘어 어디서나 흘러나오는 노래고, 세부 장르적으로도 유례 없이 다양해졌다. 2020년의 릴보이도 한국 힙합의 MC와 대중에게 모두 인정과 응원을 받는다. 이것도 한국화한 힙합의 한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