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본드 우먼, 라샤나 린치 | 지큐 코리아 (GQ Korea)

최초의 본드 우먼, 라샤나 린치

2021-01-08T16:08:29+00:00 |interview|

라샤나 린치는 최초의 ‘본드 우먼’으로 발탁되면서 키보드 워리어들을 분주하게 만들었다. 이제 막 존재감을 드러낸 배우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겠으나,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드레스, 부츠, 네크리스, 모두 휴고 보스.

재킷, 휴고 보스.

코트, 드레스, 부츠, 네크리스, 모두 휴고 보스.

2016년 라샤나 린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핀 오프 드라마 <스틸 스타-크로스드>를 촬영 중이었다. 신인 배우에겐 꽤 비중 있는 역할이지만 사실 많은 사람이 시청하기는커녕 이름조차 생소한 작품이었다. 라샤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료들에게 커리어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이렇게 말한 걸로 기억해요. 슈퍼히어로 역할을 맡고 싶어. 마블을 목표로!”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그녀는 위축되지 않았다. 이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2년 안에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라샤나는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다. 결단력 있고 강경하다. 그 덕분인지 드라마가 방영되고 1년도 채 안 돼 2019년 영화 <캡틴 마블>에 캐스팅됐다. 비록 슈퍼히어로는 아니었지만 미 공군 파일럿 마리아 램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라샤나는 예고 없이 찾아온 기회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몇 년째 마블의 문을 두드렸어요. 캐스팅 책임자인 사라 핀이 저에 대해 모를 리 없었죠. 제가 크고 작은 역할에 계속해서 도전했다는 걸요. 그중에는 <블랙 팬서>, <베놈>도 있어요.”

<캡틴 마블>은 라샤나의 커리어에서 첫 프랜차이즈 영화다. “그런 대형 작품은 전과 다른 세상이었어요. 제작비도 어마어마한데다 논의하고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 산더미였어요. 절차도 까다롭고 제가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부서도 한둘이 아니었어요. 이럴 일인가 싶었죠. 규모가 창의성을 방해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가 소규모 작품에 꾸준하게 참여하고 싶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캡틴 마블>이 공개되기 전 라샤나는 런던의 로열코트 극장에서 공연하는 데비 터커 그린의 연극 <이어 포 아이>에 출연 중이었다. 하루는 이온 프로덕션의 공동 대표인 바바라 브로콜리가 그녀에게 연락해 스케줄을 물었다. 영화 제목과 세부 내용은 알려주지 않고, 그게 전부였다. 이온 프로덕션은 007 시리즈의 제작사였고, 바바라 브로콜리는 1962년 첫 작품인 <007 살인번호>를 만든 앨버트 커비 브로콜리의 딸이다. 라샤나도 이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2019년 7월, 대니얼 크레이그가 마지막으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할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캐스팅이 발표됐다. 라샤나도 명단에 포함됐다. 시리즈 사상 최초의 여자 007 요원 역이었다. 제임스 본드가 물러나면서 그의 살인 면허를 이어받는 설정. 그녀를 둘러싸고 영국 왕실과 영국 프로축구 이슈에 버금갈 만한 열띤 논쟁이 일었다. 언론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데일리 메일>의 한 칼럼니스트는 “차라리 본드를 흑인 남자로 설정하는 게 낫다. 이드리스 엘바가 대니얼 크레이그의 뒤를 잇는 걸 보고 싶지, 본드를 여자로 만들 수는 없다”고 썼다. SNS에서는 “이슈를 만들기 위한 술수”, “하이재킹 당한 본드!” 등의 댓글이 쏟아졌다.

라샤나는 그런 반응이 대수롭지 않았다. “백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는 언제나 그렇듯 할 말이 많으니까요. 다만 짐작했던 것보다 소란이 심해서 살짝 놀라긴 했어요.”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처럼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댓글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들이 이런 걸 쓸까, 궁금했어요. 저한테 그들은 진짜가 아니에요. 아무런 존재도 아니죠. 휴대 전화를 끄거나 SNS에서 로그아웃하면 말 그대로 눈 앞에서 사라지는 거죠.”

최근 존 보예가도 인터뷰를 통해 캐스팅 논란을 겪으며 백인 배우들과 비교당하는 경험은 <스타워즈> 시리즈 촬영 당시에도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그런 비난은 뉴에이지스러워요. 마치 흑인들이 지구에 막 도착한 것처럼 떠들어요.” 라샤나를 좌절하게 만든 건 격노한 몇몇 남자가 인터넷에 쏟아 붓는 인종 차별적 발언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두 차례나 지연된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상황이었다. 최초 개봉 예정일은 2020년 4월이었지만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여파로 하반기 개봉으로 변경했다가 다시 2021년 4월로 미뤘다. “저는 ‘최초’, ‘흑인’, ‘여성’이라는 단어에 신경 쓰지 않았어요. 현재 진행 중인 작업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이 영화와 제가 맡은 캐릭터가 자랑스러워요. 그토록 바랐던 슈퍼히어로 역할인 걸요.”

라샤나는 자메이카 혈통으로 1987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푹 빠지면서 연기를 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목소리를 통해 감정을 전달한다는 게 신기했어요. 애니메이션에선 작은 동물조차 캐릭터를 갖고 있잖아요. 그런 점에 매료됐어요.” 그녀가 첫손에 꼽는 007 시리즈는 열여덟 살 때 처음 본 <007 카지노 로얄>이다. “역대 최고의 제임스 본드”라 평가받는 대니얼 크레이그가 처음 등장해 쇠락의 길을 걷던 시리즈의 운명을 단번에 뒤바꾼 작품이다. “압권은 아무래도 마다가스카르 추격 신이에요. 영화의 오프닝이었는데 본드가 표적을 쫓는 모습이 뭔가 자유롭고 크레이지한 느낌이었어요.” 대니얼 크레이그를 잇는 새로운 M16 요원 ‘노미’로 캐스팅 되자마자 그녀는 007 시리즈의 모든 작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라샤니의 설명에 따르면 대니얼 크레이그 버전의 제임스 본드가 자유분방한 베테랑 기질이라면, 노미는 훨씬 젊고 정형화된 첩보 요원에 가까운 모습이다. “영화에서 두 사람의 충돌이 흥미롭게 다뤄져요. 본드는 불규칙적이고 예측 불가능해요. 반면 노미는 완벽주의자에 가깝죠. 혈액형으로 따지면 A형의 행동 양식을 지녔어요.” 라샤나는 캐릭터 분석 외에 액션 연기를 위한 사전 준비도 철저히 마쳤다. 5편의 시리즈를 촬영하는 동안 온갖 부상을 몸에 달고 산 대니얼 크레이그와는 달리 그녀에겐 작은 해프닝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유연성이 남들보다 좋은 편이긴 한데, 스턴트 팀에서 부상을 입지 않은 첫 번째 배우라는 말을 들었어요. 약간 우쭐해졌죠. 그들이 제게 골드 스티커를 붙여준 것 같았어요.”

라샤나는 정공법을 택했다. 각본을 맡은 피비 월러-브리지가 생각하는 노미가 자신의 생각과 맞아떨어지는지를 고민한 끝에 제작자인 바바라 브로콜리의 허락을 얻어 직접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노미를 통해 느끼는 것들을 마구 쏟아냈어요. 다행히 그녀는 저와 같은 그림을 떠올렸다고 말해주더군요. 이를 계기로 우리는 노미를 통해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궁리했어요. 손에 잡히는 대로 벽에 던지고 어떤 게 달라붙는지를 찾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죠.”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개봉이 지연돼 라샤나의 캐스팅, 피비 월러-브리지의 각본 참여 소식 그리고 감독 교체를 비롯한 몇 가지 제작 비화가 철 지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작년 11월 영화 개봉이 6개월 더 미뤄질 거라 발표되자 영화 팬들은 실망을 넘어 절망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영화계 관계자들은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병든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영화계와 연극계 모두 걱정돼요. 빨리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라는 말을 들었는데 굉장히 무례하더군요. 그런 소리는 도움이 되질 않아요.” 라샤나는 영국 재무부 장관의 발언을 겨냥해 이렇게 말했다.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 말에 모욕감을 느끼는 건 당연해요. 우린 먹이사슬의 밑바닥이고 대부분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가졌어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말이죠.”

영화의 운명은 둘째 치더라도, 라샤나는 007 시리즈에 되도록 오래 머물고 싶다. 노미가 제임스 본드를 완전히 대체하게 될 거라는 루머에 대해 제작진과 배우들은 “전혀 모른다”는 말로 부인했다. <지큐>의 장난스런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에서는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라샤나는 차기 제임스 본드에 대한 질문에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했지만, 거짓말 탐지기의 불빛이 정신없이 깜빡였다. “하하하. 그게 아닌데!”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바바라와 친하지만 그녀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걸요.” 어떤 놀랄 만한 소식이 들려오든, 제작사의 전략이야 어쨌든, 적어도 향후 몇 달간 007의 살인 면허는 그녀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