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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디제잉 신 변천사

2021.01.20GQ

코로나로 인해 직격타를 입은 직업 중 하나가 디제이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클럽 신과 서브컬처 영역 안에서 변화해온 디제이라는 업에 대해.

업 業이라는 단어가 지닌 여러 가지 의미를 좋아한다. 주어진 과업, 직업이라는 뜻도 있지만, 과거 현재 미래의 연쇄적인 인과관계를 의미하기도 하기에 (업보) 과거의 소행들과 현재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드는 운명적 끌림이 느껴지는 단어라고나 할까. 그런 맥락에서 오랜 시간 한 가지 업을 해왔다면 그만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있어야 할 것인데, 디제이로서 그런 것들을 항상 가지고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쉽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법적으로도 디제이는 1999년까지 ‘유흥 접객원’으로 분류되었고, 이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유흥주점으로 허가를 받아야만 했으므로 당시 디제이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도 상당히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디제이 신은 음악적으로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믹스 팩토리 같은 곳에서 파는 유로댄스, 가요 리믹스 음반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고, 기존 가요 시장을 기반으로 한 디제이 문화는 힙합과 전자음악 등 당시 세계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던 클럽 뮤직과 댄스 뮤직에 대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대안적이고 신선한 맥락을 제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클럽 뮤직과 댄스 뮤직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팝 뮤직의 유행에 대한 프리커서Precursor로서의 역할이다.)

다행스럽게도 1990년대 말, 즉 세기말은 많은 것이 급변하던 시기였다. 신촌과 홍대의 작은 클럽들은 그동안 나이트클럽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장르 음악으로서의 클럽 뮤직을 표방했고, PC 통신이나 인터넷 초기의 에너지는 디제이라는 카테고리를 한국의 나이트클럽 신 안에서 탈출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였다. 나를 비롯한 많은 ‘베드 룸 디제이(방구석 디제이)’들은 독자적으로 (당시만 해도 디제이는 협회나 업장, 선후배 간의 연결고리에 묶여 있었다) 활동했고, 서로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신촌의 클럽 마스터플랜에서는 디제이들이 새로 나온 디제이용 배틀 레코드를 가지고 공연을 했고, 이너테크 Innertech 같은 이벤트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1990년대 중반 홍대의 인디 록, 펑크 신이 주류 가요계에 끼친 영향처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던 이 시기야말로 중요한 변곡점이 아니었을지.

곧이어 2000년대 클럽 신의 확장은 특히 가요와 분리된 클럽 뮤직의 형태가 주도하는 양상이었고 디제이 신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이트클럽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대형 클럽들이 여전히 존재했음에도 이러한 양상은 클럽과 디제이 신을 가요계나 엔터테인먼트 신에 종속되지 않은 하나의 필드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DIY 방식에 가까운, 크루의 형성과 파티 신의 다양한 전개 또한 기존에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었다. 장소를 섭외하고 디제이들을 모으고 포스터를 만들며 홍보하거나 심지어 파티를 운영하는 것까지 디제이들이 맡으면서 종합적 서브컬처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디제잉 파티와 동반된 라이브 페인팅, 전시, 사진, 댄서와 래퍼들의 공연, VJ의 영상, 스트리트 브랜드의 연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자립적으로 하나의 언더그라운드 서킷, 서브컬처 패키지를 만들어낸 것은 조금 과장하자면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전히 고전하고는 있지만 다양한 베뉴의 탄생과 보다 세부적이고 다양한 이벤트들의 전개는 과거 어느 때보다 다양한 청중들을 클럽 신과 디제잉 신에 끌어들였고, 우리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변화를 지켜보는 중이다.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고 더 혼란스럽다고 볼 수도 있는데, 어쨌든 변화 그 자체는 거스를 수가 없다. 무엇이 변했는가? 먼저 디제이의 진입 문턱이 낮아졌다. 기술의 발전과 정보의 손쉬운 공유로 디제잉을 접하고 직접 배우는 일이 과거 어느 때보다 용이해졌다. 유튜브에서 좋아하는 디제이들의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그들이 트는 플레이리스트와 그 음악들에 대한 정보는 검색 능력만 있다면 충분히 빠르게 획득할 수 있다. 클럽이 아니더라도 디제이로서의 결과물을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들이 생겨났으며, SNS 역시 이를 보조하는 미디어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 디제이라는 업의 의미 역시 해체되고 있다. 내 주변에선 많은 바이닐 애호가들이 자신들의 컬렉션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이미 디제이가 되어 있었다. 헤비 리스너에서 디제이로 전환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USB에 자신의 레프트 필드 뮤직 셀렉션을 담아온다고 해서 디제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기술에 대한 빠른 적응과 응용으로 그들이 몇 년 사이에 빠르게 새로운 디제잉 신을 형성하는 모습을 목도했다. 댄스 플로어보다는 자신의 미세한 취향을 우선순위에 두는 이들은 인터넷 컬처가 만들어낸 테이스트 메이커에 가깝다고도 생각하는데, 전통적으로 (해외) 라디오 디제이들이 가지고 있던 영역, 클럽 디제이들이 가지고 있던 영역들이 녹아들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기능 혹은 역할로서의 디제이가 더욱 보편화되는 시점이고, 이러한 능력을 갖춘 이들은 각기 자기 분야에서 디제잉의 개념을 복합적으로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디제이의 활동 범위 역시 더 넓어졌다. 코로나 이후 가장 특이할 만한 사항은 ‘레코드 바’의 등장과 바이닐로 플레이하는 디제이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댄스 플로어 위주 클럽이 아닌 감상의 기능을 우선시하는 곳들에서 디제잉을 조금 더 심도 있게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는 작지만 큰 변화다. 커뮤니티 라디오나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한 스트리밍, 아카이빙 역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즉, 디제잉 신과 클럽 신이 분리되면서 보다 다양한 층위의 음악들을 소화하게 된 셈이다.

독립 레코드 스토어와 사운드클라우드는 서로 양극단에서 음악을 소비하는 서플라이 체인으로서 기존 음악 미디어가 수행해야 할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멜론 차트나 공중파 라디오 따위를 신경 쓰는 헤비 리스너들이나 디제이들은 거의 없으며, 그러한 채널들은 디제이들의 넓고 깊은 취향을 대변해주지 않을뿐더러 그 속도나 방향조차도 놓쳐버린 지 오래다. 오히려 아날로그 도메인의 끝에서 과거의 니치한 음악들을 발굴해내는 디제이들부터 인터넷 컬처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사운드를 채굴하는 디제이들이야말로 신을 넓고 깊게 만드는 중이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활동이 멈춘 현재의 상황이야말로 디제이라는 업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개별적이고 서로 다른 방향을 지녔기에 하나의 ‘업태’로 분류하기가 힘든 디제이라는 업은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제도적 안전장치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예술과 유흥업 사이에서 표류하며 가장 취약한 고리 중 하나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다. 하나의 큰 성공 모델보다는 지속 가능한 독립적 환경의 기반이 필요한 시점에 맞이한 재난 상황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디제이 커뮤니티 내에서의 자체 연대와 자립 활동이다. 이전에도 디제이 신은 스스로의 활동에 대한 주도권을 잡지 못했고 상업적 논리에 지배당해왔기 때문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상황은 오히려 디제이라는 업의 형태가 고착화되어 시장에 종속되고 제도권에 편입되는 것이다. 이것이 제도권에 편입되는 순간 반짝이는 총명함, 호기심과 즐거움을 잃고 추하고 지루한 것으로 식어가는 장면을 나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이 게임의 메타는 계속해서 바뀌어야 한다. 글 / 소울스케이프(DJ)

    피처 에디터
    김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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