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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지면 답도 없는 서브 남주의 매력

2021.02.10GQ

드라마 <스타트업>의 김선호는 몇몇 이름을 다시 불러냈다. 주인공을 넘어서는 신드롬을 일으켜 두고두고 회자되는 ‘서브 남주’ 계보도.

“날 사랑하면 안 돼요? 단 하루라도 그럴 수는 없나요?” 짝사랑이 팔자인 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뛰어든 비극적인 남자들이 있다. 여주인공을 ‘동경’하고, 그녀의 아픔에 그 누구보다 슬프게 울어주지만, 절체절명의 순간 한 발자국 물러나야 하는 포지션의 남자들. 일명 ‘서브 남주’라 불리는 인물들이다. 짠 내 나는 운명을 견뎌야 하지만 대가가 없지는 않다. 짝사랑을 잃는 대신, 그들은 대중의 사랑을 얻곤 하니까. 내게도 그런 서브 남주에 마음이 기우는 병이 있으니, 걸리면 약도 없다는 ‘서브병’이다.

아니나 다를까. 드라마 <스타트업>을 정주행하면서도 이 병이 도졌었다. 중도 하차 위기 때마다 나를 붙든 인력의 8할은 김선호가 연기한 서브 남주 한지평. 해당 드라마 영상 댓글에도 비슷한 후유증을 호소하는 고백들이 난무했다. “여주인공만 모르는 한지평 매력!” 이쯤 되면 서브병 확산 요인을 파악하고 싶은 직업병이 또 발동한다. 서브 남주가 사랑을 얻는 흔한 방법은 모성 본능을 자극하거나, 혼자만 한 사랑이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할 때다. 한지평은 그걸 조금 더 뛰어넘는다. 이 드라마는 설계에서부터 우주의 기운이 한지평에게 몰리는 구조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로 초반 분위기를 달구는 것은 드라마가 자주 취하는 공식 중 하나다. ‘첫사랑’ 코드는 꼬이고 꼬일 사랑의 서사에 강력한 양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건 통상적으로 남주인공에게 허락돼온 서사다. 놀랍게도, <스타트업>은 한지평에게 어린 시절 서사를 통째로 할애했다. 실험적인 선택의 결과는? 무릇 남녀 주인공 사이의 케미가 불타오르려면, 추억과 비밀이 촘촘하게 쌓여야 하는데 그걸 서브 남주가 가져가다 보니 균형의 추가 뒤집힌다. 게다가 천성은 ‘순둥이’인데, 고아로 자라 반항적 매력도 풍기는 한지평은 순정만화 양대 산맥인 ‘안소니’와 ‘테리우스’를 포개놓은 캐릭터다. 서달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키다리 아저씨 역할까지. 작가는 한지평이 욕먹을 만한 요소를 빠르게 차단함으로써 자신이 발굴한 스타에 대한 애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으니, 한지평이 왜 서브 남주냐는 일각의 의구심은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알다시피, <스타트업>을 통해 김선호는 대중이 더 알고 싶어 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스타트업>의 사례는 서브 남주의 존재감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활용도에 따라 극과 극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게 서브 남주다. 서브 남주가 그저 훼방꾼의 전형에 머문다면 극은 단순해지기 쉽다. 반면 그들의 욕망이 공감을 얻어 시청자와 교감하기 시작하면 드라마는 농밀해진다. 빤한 삼각관계가 철수하고, 갈등 양상도 선과 악의 단순 대비에서 벗어나 흥미진진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2010년 방영된 <성균관 스캔들>이 안방의 스캔들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제1 주인공 박유천 외에도 유아인, 송중기 등 자기만의 개성으로 중무장한 서브 남주들의 활약이 있었다. 특히 유아인이 연기한 ‘걸오 문재신’은 작품에 긴장을 부여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그만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하며 대중에게 각인됐다. 그해 거리에는 ‘걸오앓이’가 흘러넘쳤다.

“나에게 이러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정신으로 무장한 재벌 2세들을 다룬 <상속자들>의 구도는 익히 봐왔던 순정만화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식상한 구도도 작가의 캐릭터 변형 능력과 배우 하기 나름이다. <상속자들>에서 그런 변화구 역할을 한 건 최영도(김우빈)였다. 무늬만 나쁜 남자가 아니라, 진짜 나쁜 심성을 지닌 영도는 사랑할 줄 몰라 사랑하는 여자 차은상(박신혜)를 괴롭혔고,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깨달은 후에는 은상을 뺀 나머지를 괴롭히는 방법으로 새로운 타입의 서브 남주 캐릭터로 변모했다. 여기엔 어떠한 규정도 거부하는 김우빈의 개성적인 마스크와 캐릭터 소화 능력도 한몫했다.

“뭐 타는 냄새 안 나냐”는 능글맞은 대사로 신화 멤버들에게 놀림거리를 제공했지만, 뭇 여성의 마음만큼은 확실히 태운 <불새>의 에릭이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오뚝이 정신으로 ‘이런 남자가 내 남자라면’을 되뇌게 만든 <응답하라 1994>의 국보급 로맨티스트 유연석 역시 창의적인 언어와 캐릭터로 파급력을 드러냈다. 주인공의 매력에 버금가는 서브 남주 만들기가 트렌드로 떠오른 건 이러한 흐름과 무관치 않다.

여기엔 작가의 역량이 깊게 개입된다. 홍자매는 서브 남주에게 일찍이 애정을 보여온 작가로 유명하다. 아이돌 출신 정용화와 윤계상은 <미남이시네요>와 <최고의 사랑>을 통해 연기자로서의 인생 이모작을 성공적으로 캐기 시작했고, 신예 이도현은 <호텔 델루나>를 통해 발굴됐다. 남주인공과 서브 남주를 황금비율로 섞어내는 일인자는 김은숙 작가인데, 서브 남주로 또 다른 멜로라인을 형성하는 전략도 자주 쓴다. <도깨비>의 이동욱이 대표적. <태양의 후예>의 진구 역시 그 어떤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보다 김은숙의 서브플롯 안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고만고만한 작품의 주연으로 백날 출연하는 것보다 특급 작가의 작품 하나에 서브로 출연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란 이야기도 나온다. <기황후>의 지창욱, <별에서 온 그대>의 박해진 모두 주연으로 활약하다가 잠시 물러서는 방향으로 운신의 폭을 넓힌 경우다. 비중은 작아졌을지 몰라도 작품 안에서 존재감은 확실했다. 부여받은 서사가 빈약하든 말든, 배우 본연의 매력으로 모든 걸 뚫어버리는 경우도 있긴 하다. <가을동화>의 원빈이 그렇다. 다른 배우가 내뱉었어도 “얼마면 돼?”가 긴 생명력을 얻었을까. 원빈이 했기에 그냥 그렇고 그런 대사가 T.O.P로 거듭난 건 아닐까. 결국 ‘될 놈은 된다’라는 말인데, 물론 얼굴이 원빈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서브 남주가 결말까지 바꾸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서브 남주계의 조상이라 불리는 <별은 내 가슴에>의 안재욱이 그렇다. 당초 차인표와 최진실이 연결되는 그림으로 기획됐던 드라마는, 안재욱이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얻으면서 결말 자체를 틀어버렸다. 임성한 작가의 <오로라 공주>는 서하준이 뜨자, 남주인공 오창석을 돌연사로 하차 처리하는 유례 없는 대범한 작법을 보이기도 했다. “암세포도 생명이다”라는 기괴한 대사도 서하준의 몫이었다. 물론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이 과정에서 주연 배우는 무안해지고, 결말을 급조하면서 완성도가 떨어지기도 한다. 시청률만을 의식한 무책임한 처사라는 비난은 덤이다.

<스타트업>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이야기했듯 <스타트업>은 매력 넘치는 서브 남주를 얻었다. 그러나 서브 남주를 뺀 거의 모든 걸 잃은 희귀한 드라마로 남았다. 남주인공을 놓쳐서다. 사실 밀당도 몰라, 까칠함도 몰라, 눈치마저 모르는 남도산은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드라마계의 스타트업 같은 주인공이었달까. 잘만 매만졌다면 클리셰를 벗어난 새로운 유형의 주인공을 우린 만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런 남주인공이 사랑할 만한 남자라는 사실을 시청자들에게 납득시켜야 하는데, 이 드라마는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빌미로 남도산을 너무 아마추어처럼 그려버렸다. 서브 남주의 매력이 남주인공의 매력을 넘어섰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두 캐릭터가 가치관을 가지고 대등하게 맞설 만한 좋은 배경을 살리지 못한 게 문제다. 서브 남주들이 빠르게 영역을 확장해가는 상황에서 <스타트업>이 던진 질문이다.

    정시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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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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