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덕꾸러기? 쟁취의 대상? 잠에 대한 고찰 | 지큐 코리아 (GQ Korea)

천덕꾸러기? 쟁취의 대상? 잠에 대한 고찰

2021-02-17T16:22:48+00:00 |living|

환한 아침을 앞당기려는 짧은 기도, 갑갑한 생활을 보상받기 위해 바치는 제물,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이자 쟁취의 대상. 삶의 일부인 잠에 관한 선연한 기록.

1990년대. 고등학교 시절, 등교 시간의 시내버스에서,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으면 이내 잠에 빠져드는 친구가 있었다. 20여 분의 쪽잠. 나는 잠든 친구의 얼굴을 희귀종이 나오는 다큐멘터리처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버스 좌석의 불편함과 내부의 번잡함 따위를 수면제 삼는 이 대담한 영혼이라니. 몇 번 시도해봤지만 나는 번번이 실패했다. 눈을 감으면 이성 관계와 성적, 반항과 순응에 관련된 온갖 사념에 휩싸였으니까.

친구가 자는 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잠든 친구를 깨워 허겁지겁 버스에서 내리는 일의 반복이었다. 나는 쪽잠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친구가 얄밉고 부러웠다. ‘사당오락’이라는 말이 횡행하던 때였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 수면은 성적 좋은 친구들의 공통된 습관 중 하나였고. 쪽잠을 자지 못해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정작 그때 내가 느낀 점은 잠이 개인의 특성에 많이 기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야 할 때는 오로지 잠을 자고 말겠다는 ‘무저항의 의지’ 외에 모든 것을 한쪽으로 제쳐놓을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들이 수면과 숙면의 승리자가 된다는 것.

그 무렵, 눈을 감은 채로 한두 시간이 지나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잦았다. 기존 가치관과 위선에 대한 염증으로 눈 오는 대도시의 밤거리를 방황하던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 같은 서사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질이 들쑥날쑥한 영화들을 하염없이 볼 뿐이었다. 등교해서는 몽롱한 오전과 되살아나는 오후를 지낸 후 다시 생생한 밤으로 진입했다. 이 시절, 잠은 갑갑한 학교생활을 보상받기 위해 바쳐야 하는 제물이었다.

2000년대. 인간이 물건처럼, 야생의 짐승처럼 구겨지고 잔뜩 웅크린 채 잠을 잘 수도 있음을 몸소 실감한 것은 대학을 다니면서부터였다. 잠잘 곳을 찾아 이곳저곳 전전하던, 영화 <인 사이드 르윈>의 주인공인 르윈의 대사처럼(“Got a couch?”) 영화 동아리 방의 낡고 냄새 나는 소파에서, 지저분하고 턱없이 좁은 친구의 자취방에서, 엠티 장소였던 강촌에서 돌아오는 버스 뒷좌석에서, 농촌 봉사활동 때의 숙소이자 모기들에게 피를 잔뜩 헌납한 시골집에서, 나는 조그만 공간만 있으면 당장 갖다 버려도 아쉬울 것 없는 존재처럼 잠을 잤다.

군을 전역한 후에는 아침까지 친구들과 마틴 스코세이지와 왕가위의 영화들을 몰아서 보거나, 술을 마시다 일출을 보러 원효대교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우리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이 되어 타깃이 불명확한 불의에 분노하고, IMF 사태로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예술의 정점으로 명명된 영화의 세기에 열광하며 잠을 성가신 것으로 취급했다. 대학 시절, 잠은 몸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였다.

2010년대. 누군가의 잠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가 속한 사회를 우선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30대 이후였다. 잠에 대한 사회학적 관점이랄까. 이맘때쯤 자고 저맘때쯤 깨자고 생각하며, 한국인은 평균 6시간 30분 정도를 잤다. 의학적으로 권장하는 평균 8시간에 비해 (본인이 실제 자고 싶어 하는 시간에 비해) 1시간 30분쯤 모자란 시간이었다.(이것을 ‘수면 빚’이라 부른다.)

한국인은 ‘수면 빚(Sleep debt)’을 연료로 자신과 사회를 굴리는 중이었다. 성인은 수면 시간을 줄여 근로 시간을 늘리고, 학생은 공부하다 남는 시간에 잠을 잤다. 그리고 그 빚을 건강으로 갚았다.(<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의 저자는 수면 부족을 ‘느린 형태의 자기 안락사’로 비유한다.)

특히 24시간 잠들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잠은 사치에 가깝다. 가라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 올리게 만드는 사회의 인공적 인력. 편의점과 대형 마트, 술집 거리의 이른 새벽 불빛은 그러한 인력이 농축된 각성제였다.(코로나19로 인한 이른 소등은 순리의 역공이라 볼 측면도 있다.)

이는 누군가의 잠에 대한 가치 폄하였고, 차츰 ‘위험의 외주화’와 맞물려 구의역에서, 시멘트 공장에서, 택배 트럭에서, 끔찍하고 불의한 죽음을 불러왔다.(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자본’에 많은 부분을 의탁한 한국 사회에서 잠은 학대당한 노예들처럼 처연한 상황을 맞았다. 비단 한국 사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몇 해 전, 세계보건기구는 수면 부족을 ‘선진국 전체의 유행병’으로 선언했다. 잠이 건강(육체)과 행복(영혼)의 1/3을 담당하며, 개인과 사회를 지탱하는 필수 자원이라는 의미였다.

2020년대. 잠잘 시간이 있음에도 잠을 자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통계에 따르면 2019년 약 63만 명이 불면증 진료를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숨겨진 환자들까지 포함하면 대략 700만 명이 수면 장애를 앓고 있다는 학계의 목소리도 있다. 생존과 욕망, 걱정과 불안으로 뒤척이고 뒤척이는 불면의 밤들.

주기적으로 수면 장애를 앓던 나는 머릿속에 단단히 똬리를 튼 채 고개를 쳐들고 갖은 욕망과 상념에 몰두하는 내 자아의 목을 조르고 싶은 날이 많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파도에 섞이지 않은 채 그 위를 끝없이 부유하는 기름처럼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위치한 생각의 덩어리들이 자맥질하던 밤.

나는 글쓰기 노동자로서 불현듯 떠오른 문장 하나, 비유 하나를 메모하기 위해 머리맡 스탠드를 수시로 켜며 전전긍긍하는 자아가 소멸하기를 바랐다. 그리스 신화 속 잠의 신인 ‘히프노스’는 밤의 여신인 ‘닉스’와 어둠의 신인 ‘에레보스’의 자식이자, 죽음의 신 ‘타나토스’와 쌍둥이 형제 관계이다. ‘밤’과 ‘어둠’이 잉태하는 잠은 의식 속 자아의 일시적 ‘죽음’과 한 배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 탓인지 악플 등으로 인한 우울증의 악화로 불면증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택하는 젊은 연예인들의 뉴스를 접할 때면(평안을 찾으셨길), 그 불면의 밤 동안 그들의 자아를 지배했을 상념들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일면식도 없는 존재들이 누군가의 영혼을 괴롭히고, 수면을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그렇게 승자독식 구조와 인정투쟁이 악다구니를 부리는 시절을 맞아 잠은 쟁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현재 나는 잠이 달콤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는 생애 주기에 들어섰다. 달콤한 것 중 제일이라고 여긴다. 전쟁 중에도 숙면을 취한 다음 날은 ‘아름다운 삶’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잠은 쟁취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일부여야 한다. 그런데 어둠과 밤, 그리고 머릿속을 환하게 들쑤시는 사회 구조와 욕망은 너무 강고하고, 영혼을 휘젓는 악당도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