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orial

작가 김완진이 세상에 내민 손

2021.02.26GQ

김완진이 세상에 내민 손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플레이스드 그래픽 셔츠, 파자마 팬츠, 모두 루이 비통.

정오가 지나고 나른한 오후로 접어들었어요. 평소 이 시간에 뭘 해요? 작업을 중심으로 일상이 돌아가는데 이때는 집안일이나 운동을 해요. 여백과 같은 시간이죠.

이야기를 하는 동안 햇살이 이곳 거실에 서서히 내려앉았어요. 그림 같은 장면이네요. 햇빛이 떨어지는 곳에 앉아 전날 작업한 것을 멀찍이 보기도 해요.

지금 작업 중인 <지큐> 커버도 그렇고, 사람의 손을 그린 그림이 곳곳에 놓여 있어요. 인스타그램(@willeys_art)에도 손을 소재로 한 그림이 두드러지는데 손에 대한 애정이 느껴질 정도예요. 중요하지 않은 신체 부위가 없지만 저한테는 일의 특성상 손이 소중할 수밖에 없어요. 이 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어 무척 감사해요. 한때는 손이 다칠까 봐 호들갑 떨 듯 조심조심 다니기도 했어요. 버스를 타면 손부터 챙겼지요.

충분히 이해돼요. 손은 그림의 소재로서 어떤 매력이 있어요? 손에는 회화적 요소가 많아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청나게 다양한 색과 형태가 눈에 들어올 거예요. 기본적인 피부색이 있고 불그스름한 색을 띠는 부분도 있고, 핏줄이 모여 푸른색을 띠기도 해요. 이것들이 뒤얽혀 또 다른 색을 만들고요. 우주의 성운을 찍은 사진을 본 적 있나요? 그것과 닮았어요. 손에서 우주가 보여요.

흥미로운 얘기네요. 또 인물의 표정이나 몸짓보다 손의 제스처로 감정을 표현하는 게 더 새롭다는 느낌이 들어요. 손이 암시하는 이야기가 많아 상상의 여지를 줄 수도 있고요. 그런 요소 때문인지 손을 그린 그림에 대한 반응이 좋아요.

그림에 등장하는 손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대부분 제 손이에요. 손뿐만 아니라 다른 그림들도 저를 모델로 그렸어요. 자화상 작업도 하고요.

눈이 빠지도록 관찰했을 그 손의 특징은 뭐예요? 손가락이 좀 짧은 편이고 흉터가 하나 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손은 어떤지 모르지만 굉장히 다양한 색을 띤다고 생각해요.

드로잉을 제외하고 손으로 무슨 일을 가장 많이 해요? 반려묘 ‘누리’를 쓰다듬어요. 녀석은 고양이치고 사람의 손길을 많이 찾아요. 사실 서로 쓰다듬어주는 거예요. 누리를 어루만지면 그 촉감이 제 손을 쓰다듬어주거든요. 서로 보살핌을 주고받아요.

반려묘 다음으로 애정을 쏟는 존재는 작업을 꾸준히 공유하고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이 아닐까 짐작했어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인스타그램은 세상과 저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채널이자 저한테는 전시 공간이란 의미가 있어요. 2016년부터 그곳에 제 작업물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남들이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어요. 이곳에 연재를 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스스로 마감 기한을 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그림을 계속 그렸어요. 그런 식으로 작품이 차츰 쌓여 여기까지 왔어요. 지금은 제 그림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그림을 공개하는 빈도가 예전보다 줄었지만 싱글 앨범을 낸다는 생각으로 공들여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30만 명이 넘는다는 건, 그림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집중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다는 증거일 거예요. 어떤 부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세밀화라고 해서 정밀하게 묘사만 하면 그림이 지루해 보일 수 있어요. 저는 색을 통한 강약 조절로 리듬감을 살리려고 해요. 색을 다양하게 쓰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색과 색의 조화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고 생각해요. 가령 손을 그린다면 앞서 이야기한 다양한 색을 조화롭게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둬요. 빨간색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부드럽게 강약을 보여주는 거예요.

메시지를 의식하기도 하나요? 사람들에게 그림을 통해 생각할 거리를 전달해야 한다는. 예전에는 그랬어요. 메시지를 위한 작업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죠. 그런데 그림을 너무 계산적으로 그리게 되고 작업이 더 이상 재미가 없더라고요. 결과물의 느낌도 너무 경직되어 있고. 오히려 예상치 못한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이 개인적인 만족도가 높았어요. 오리지널 같은 느낌이랄까.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억지로 그림에 메시지를 담지 않기로 했어요. 제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리기 시작하니까 마음이 한결 시원해졌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재료도 바꿨어요.

어떻게요? 주로 유화 작업을 했는데 ‘내가 그림을 즐겁게 그렸을 때 뭘 썼지?’ 하고 생각해보니, 오일 파스텔과 색연필이더군요.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서 얻는 순수한 즐거움 같은 것도 있어요? 그럼요. 색연필과 종이의 마찰이 손으로 전해지는 느낌이 좋아요. 매끄럽고 부드러운. 최근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작업이 잘 풀리지 않아 기분이 찝찝했는데 알고 보니 종이가 평소 쓰던 것보다 까끌까끌하더라고요. 종이를 바꾸자 작업이 술술 풀렸어요.

정말요? 성격이 섬세한 편인가요? 아니라고 할 수 없어요. 완벽주의 기질도 좀 있어요.

창작자에겐 필요한 부분 아닌가요? 그게 적당하면 좋지요. 과하면 그만한 고통도 없는 것 같아요.

일상과 작업의 흔적을 공유하고 있는 공간. 온기가 묻어 있다.

색연필을 손에 쥐면 순수하게 그림을 그렸던 장면이 맴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앉아 세상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김완진은 강력한 원동력과 같은 질문을 매일 되묻는다.

그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아이였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네 살 때부터 그린 것 같은데, 이후로 쭉 그림을 그렸어요. 중간에 영상으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작업에 흥미를 느껴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지만 제 성향과 썩 맞지는 않더군요. 지금처럼 혼자 작업하는 게 더 편하고 좋아요. 아, 그림 대신 음악에 잠시 빠진 적도 있어요. 레슨도 받고 작곡도 했어요.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이 꽤 돼요.

어떤 종류의 음악에 끌려요? <라이언 킹>을 보고 한스 짐머의 음악에 푹 빠졌고, 친구들이 가요를 들을 때 저는 영화 음악을 찾아 들었어요. 그러면서 음악적 취향이 자연스럽게 스코어나 크로스 오버 같은 연주곡 위주로 굳었어요. 작업할 때는 독일 음악감독 막스 리히터와 2018년에 갑자기 세상을 뜬 요한 요한슨의 음악을 자주 들어요.

저도 집중이 필요할 때 요한 요한슨이 작업한 <컨택트> OST를 습관처럼 들어요. 특히 엔딩 크레디트의 곡을 좋아하는데 아, 제목이…. ‘On the Nature of Daylight’. 막스 리히터의 곡을 요한 요한슨이 영화에 썼죠. 들어봐서 알겠지만 그 곡이 자아내는 숭고함이 제 작업이 추구하는 느낌과 닮았어요.

자세히 듣고 싶어요. 추상적인 개념이라 말로 설명하면 단순해질 수 있는데, 큰 줄기는 ‘블루밍 blooming’이라는 플롯이에요. 잠재력에 관한 이야기인데, 개인의 잠재력이 활짝 피면서 성질이 변화, 변성한다는 거예요. 뭔가가 피어나는 듯한 손이나 몸의 제스처를 통해 이런 희망적인 뉘앙스를 드러내는 작업을 즐겨요.

예술이란 여정 속에서 삶은 어떤 진전을 이뤘나요? 시행착오와 방황 끝에 저한테 그림이 1순위라는 사실을 확신했고, 저라는 사람을 소개할 때 “그림 그립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됐어요.

자신의 그림을 찾는 곳이 확실히 많아졌나요? 작년에 처음 제 작업만으로 생활할 수 있었어요. 그전에는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했죠. 영상 작업을 주로 맡았어요. 이제는 삶이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했구나, 비로소 지망생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업작가가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예술로 인한 환멸을 느낀 적도 있어요? 되게 힘든 시기가 있었어요. 5년 전인데, 아무리 열심히 작업해도 점점 더 힘들기만 했어요. 미술 신에 저를 끼워 맞추려는 노력도 했지만 녹록지 않았죠. ‘나는 그림을 그리면 안 되나?’ 이런 좌절감을 앓았어요.

SNS 채널이 기회이자 도약의 발판이 됐군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런 셈이에요.

신진 아티스트가 SNS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작업을 알리고 인정받는 건 더 이상 희귀한 예가 아니에요. 이런 변화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해요? 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아요. 미술 신의 어떤 경계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발을 들인 적도 없어요. 나중에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어요. 이렇게 혼자 작업하고 활동하는 게 저한테 맞는 거 같아요.

확신에 찬 말이네요. 그러다 보면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 어려울 텐데, 스스로 좋은 작업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뭔가요? 원초적이고 간단해요. 제가 보고 좋으면 돼요. 완성 후에 감탄을 자아내거나 자꾸만 보고 싶게 만드는 그림이 있어요. 제가 생각할 때 그게 좋은 작업이에요. 그리고 인스타그램의 댓글을 다 확인하는데 그런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저와 비슷해요.

댓글을 쓰는 사람들의 국적, 나이, 전공이 엄청 다양하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반응이 그만큼 보편성을 띤다고 볼 수 있겠네요. 맞아요. 그리고 평가가 즉각 적이고 꽤 정직해요.

유독 기억에 남는 댓글은 무엇이었나요? 감사하게도 칭찬 위주의 내용이 많은데 그 중에서 작업 의도를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쓴 댓글을 발견하기도 해요. 제가 염두에 둔 여백의 의미에 대해 서술하거나, 마치 제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내용도 있어요. 이를테면 ‘Divine Water’라는 작품은 “손안에 우주가 있다”라는 구체적인 문장에서 비롯됐는데, 누군가 이 말을 그대로 써서 깜짝 놀랐어요. 신기할 정도였어요.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면 성실한 아티스트 같다는 생 각이 들게 돼요. 지금까지 꾸준히, 열심히 그림을 그 리게 만드는 동력이 궁금해요. 아까 바닥을 쳤던 경험을 잠깐 이야기했잖아요. 그때 하도 안 풀려서 꽉 쥐고 있던 그림을 내려놓았어요.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4개월 정도 손을 떼고 쉬었죠. 그리고 다시 작업을 하려고 하는데 겁이 났어요. 하얀 종이가 무섭게 느껴지더라고요. 그 두려움을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잠재울 수 있었어요. 우리는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사는데, 보통은 받으려는 욕구가 더 크잖아요. 저도 이전에는 인정을 받고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가 컸어요. 그걸 내려놓고 내가 사람들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자 머리가 맑아졌어요.

그게 그림이란 얘기죠? 네,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저한테는 그림이에요. 그리고 이 일이 좋은 것 중 하나는 나이가 들어도 오래오래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그림 속의 손에도 주름이 점점 깊어지겠군요.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궁금했던 건데, 인스타그램 계정의 아이디 willeys_art는 무슨 의미예요? 아, 설명하기 쑥스러 운데 브루스 윌리스를 워낙 좋아해요. 어릴 때부터 광팬이었어요. 그래서 아이디나 닉네임에 ‘윌리스’라 는 이름을 넣었어요. 미국에서 이름 뒤에 ‘ey’를 붙여 애칭처럼 부른다고 해서 저도 그렇게 해봤죠. 20년 전쯤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쓸 줄은 몰랐어요.

‘Remanent Head 2’.

‘Potter's Hand No.1’.

‘Divine Water’.

‘Said and Done’.

    피처 에디터
    김영재
    패션 에디터
    김유진
    포토그래퍼
    이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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