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비독점적 사랑, 폴리아모리에 대하여

2018.02.13GQ

나에게 가족으로서 함께 산다는 의미는 기존의 정상 가족의 것과는 다르다. 사회를 바꾸고 싶어서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미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이 코웃음 치거나 곤란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싶다면, 자신을 폴리아모리라고 소개하면 된다. 열 사람을 만난다 치면 폴리아모리를 아는 사람은 세 사람 정도다. 아는 사람이 ‘다자연애’라고 소개하면 일제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일곱 명 중 네 사람은 묘한 웃음을 보이고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폴리아모리  위험한 점을 묻는다. 원래 폴리아모리를 아는 사람들이 반박하기 시작하면서 자기들끼리 토론을 시작하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그런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럼 나는 그 한 사람과 다른 대화를 시작한다.

내가 지금 긴밀히 관계하는 사람도 그 나머지 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한껏 흥이 오른 술자리에서 누군가 나에게 애인 있냐고 물었을 때, 나는 만나는 사람들은 있지만 독점적으로 구속하는 연애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일대일 독점관계를 맺지 않는 폴리아모리에 대해서 설명하니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 아니야?”라는 사람이 다반사였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폴리아모리를 가지고 갑론을박하기 시작했고, 나는 피곤해졌다. 그날따라 유독 말이 적었던 한 사람이 조용히 혼자 술을 따르다가, 내게 어떤 사람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너무나 예쁘게 웃으면서. 살짝 당황했지만 우린 대화를 시작했다. 그 친구는 경상도에 살았고, 서울에 일하러 왔다가 뒤풀이에 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나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들, 어디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같은 시시껄렁한 것들을 물어봐놓고 극히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멈추지 않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마침 길고 긴 폴리아모리에 대한 논쟁이 끝났는지 담배를 피우러 나가겠다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갈 때 그 친구도 담배 하나 피우고 오겠다며 함께 나갔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은 다 아는 빈 공간의 공허함을 느끼며, 집이나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그 친구가 혼자 돌아와 앉더니 제안했다. 저는 기용 씨 삶에 관심이 많은데, 술 더 마실 거면 저랑 모텔 가서 한 잔 더 하면서 얘기할래요? 이 말에 나는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었다. 좋죠.

선우와는 바로 연애를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애를 그만두자고 했다. 술김에 사귀게 된 것이어서는 아니었다. 우리는 연애라는 말을 쓰지 않고도 긴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걸 한번 실험 해보고 싶었다. 첫 연애 후, 나는 연애라는 이름 속에 연애는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꼬박꼬박 연락이 돼야 하고, 사귀는 사람 외에는 거리를 둬야 하며, 기념일도 챙겨야 하고, 무엇보다 질투를 해야 했다. 첫 연애를 시작했을 때 주변의 흔한 연애 이야기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질투해야 하고,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것이 배신이고, 왜 그의 사회적 관계에서 나와 연애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비중이 커야 하는지 공감이 되질 않았다. 이런 나에게 연애라는 이름이 필요할까? 선우와도 마찬가지였다. 선우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3명 더 사귀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선우의 어항 속 물고기가 된 것처럼 느끼지도 않았고, 가끔은 다른 사람과의 연애 상담을 해줬다. 다른 사람과 헤어지라고 할 때는 선우에 대한 내 점유권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관계가 선우에게 좋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권유했다. 선우는 섹스를 좋아하고 많이 하는 사람이었는데, 다른 사람과 많이 경험한 게 나한테도 좋은 일이었다. 나도 만나는 사람이 있었고 지금까지 선우와 관계하면서 새롭게 만난 사람이 있었지만 선우도 내가 다른 이들과 즐겁게 관계하는 일들을 기뻐해줬다.

사랑은 반드시 연애라는 이름으로 정의해야 하는 걸까? 육체적인 쾌락을 교감하는 일뿐만 아니라, 날 기쁘게 하는, 더 완성된 느낌으로 이끌어주는 정서로 정의한다면 그것에 반드시 일일이 이름이 필요하진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굳이 일대일 독점 관계가 아닌 폴리아모리 관계를 다자‘연애’로 소개하는 게 난 썩 석연찮다. 만약 적절한 번역을 찾는다면, 비독점적 사랑이 더 적확하다. 다자연애는 비독점성이 전제되었을 때 부수적인 결과이지 그 자체가 폴리아모리의 필수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폴리아모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방송에서 해외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꽤 크고 작은 화제가 되었나 보다. 내 주변 사람들도 방송 이후 연락을 해서 폴리아모리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놓는다. 폴리아모리는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람들과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 사실 누구나에게 미래는 끊임없는 고민의 대상이겠지만 마땅한 사회적 롤 모델이 없는 폴리아모리적 미래를 고민하는 덴 또 다른 난처함이 있다. 처음부터 모두 새롭게 고민해야 하는 것도 있고 제도적 공백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들도 있다. 가령 폴리아모리로서 가족과 주거를 생각한다면 모노가미 관계의 사람들이 주로 고민하지 않는 부분을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가령 누구랑, 몇 명이랑 같이 살 것인가?

어느 날, 선우가 나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선우와 나는 만난 지 3년 정도 되었고, 때로는 그 아이의 집에서, 모텔에서, 우리 집에서 잠을 잤다. 만날 때면 미래 진로에 대해서 같이 고민하고 서로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지 의논도 하는 사이였다. 제의는 고마웠다. 나도 그애와 함께 자거나, 쇼핑을 하거나, 집에서 함께 뒹굴거리며 데이트할 때면 이 애와 함께 산다면 어떤 모습일지 긍정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사는 건 단순히 그런 경험으로 등치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선우와 나처럼 한국에서 폴리아모리로 살아가는 사람이 꿈꾸는 동거라면 말이다. 보통 한국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거는 일대일의 관계의 둘이 사는 경우를 상상하지만, 단순히 룸메이트를 구하는 동거가 아니라 가족 결합으로서 바라본다면, 선우와 나는 일대일 독점 관계를 지양하는 폴리아모리로서 가족과 동거에 대한 고민도 조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우리는 같이 살더라도, 장기적으로 우리 둘만 살 생각이 없었다. 폴리아모리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과 동거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상이었다. 모든 폴리아모리가 3명 이상의 가족 결합을 고민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우와 나는 2명이서 같이 사는 건 별로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하루는 서로의 품에서 잤다가, 하루는 다른 애인 품에서 잠들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선우와 동거한다는 이유만으로 선우가 나의 파트너십에서 가장 우선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적 결합으로서 함께 살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 딱 한 명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다.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군데 모아놓고 살고 싶다는 바람 외에도, 여러 명이서 같이 살면 서로의 살림에서 경제적인 부담을 여럿이서 공동으로 질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점이 많다. 집세를 같이 분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한쪽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서로 지탱하는 데 부담이 적다. 해외 사례를 보아도 폴리아모리 가족의 가장 큰 장점으로 가정경제와 육아의 분담을 여럿이 함께한다는 점을 꼽는다.

네 명의 폴리아모리스트가 같이 산다면 나는 입양을 해 아이를 키우고 싶다. 혈연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의 양상이 가능하다는 것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내가 선우에게 역으로 제안한 형태는 <아내가 결혼했다>의 방식이었다. 우선 폴리아모리적인 관계로 같이 산다는 건 감정적인 일뿐만 아니라 그런 삶의 방식에 동의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내가 만나는 파트너들 중에는 선우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꼭 선우를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선우와 잘 맞을지도 모른다. 선우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도 나를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관계를 기계적으로 합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당장은 파트너 각각과 살림을 따로 차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손예진이 연기하는 인아는 일주일에 시간을 나눠 각각 다른 집에서 살림을 보는 삶을 살아간다. 그게 가장 나에게 맞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같이 살아보자는 선우의 말은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했다.

폴리아모리 용어로 트라이어드triad라는 말이 있다. 세 명이 동시에 서로를 좋아하는 형태다. 네명이면 쿼드quad, 그 이상이면 몰섬moresome인 식이다. 선우와 나처럼 한 명이 여러 사람을 만나는 형태를 비이vee라고 부르는데, 선우와 내가 꿈꾸는 함께 사는 가족은 이 비이 이상의 사람들이 모인 형태였던 셈이다. 세 명 이상의 폴리아모리 관계로 동거를 시작하는 게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은 지인들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지인 A는 직장인이었고, 미국인 남자친구 B가 있는 사람이었다. A는 폴리아모리고, 연애는 B와만 하려고 했으나 중간에 좋아하는 남자 C가 생겨버렸고 그와도 연인 관계를 맺기로 했다. B와 C는 서로를 궁금해했고, A를 사이에 두고 만나게 되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둘이 매우 잘 맞아 결국 서로를 인생의 동반자로까지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 명의 관계는 초반에 매우 좋았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비극은 세 명이 같이 살면서 시작되었다. 문제는 생활 방식의 차이와 소외감이었다. 가령 A는 B와 C의 생활 방식 모두 이해할 수 있었지만,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기 좋아하는 B와 달리 C는 집에 다른 외부인을 초대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성관계 때문에 벌어졌다. 언젠가 A와 C가 술을 먹고 들어와 방에서 섹스를 했는데 그걸 잠에서 깬 B가 알게 된 것이다. B는 그때 아주 큰 소외감을 느꼈다. 이 문제로 세 명의 관계가 파탄날 뻔했지만, 이때까지는 대화로 어찌어찌 상황을 모면했다. 그러나 결국 A의 가족이 B와 결혼을 추진하면서 관계가 틀어졌고 C가 모든 것을 그만두면서 이들의 상황도 종료되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내게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또 다른 친구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경우는 소외감을 다른 식으로 해소했다. 그는 폴리아모리인 미국인 여자친구와 같이 살고 있었다. 그 여자친구는 내 친구에게 이해를 구하고 다른 미국인 남자친구를 집에 들였다. 이들도 친구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이 술을 먹고 들어와 단둘이 섹스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며칠 후 친구는 두 명에게 도저히 이런 일 못하겠다고 했는데, 그들의 반응은 그 감정을 적극적으로 해소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은 세 명이서 같이 섹스하는 것이었다. 다소 황당한 이 해결책은 놀랍게도 먹혀들었다. 친구는 섹스를 세 명이서 하고부터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미국인 남자친구와의 섹스도 즐기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여자친구만큼이나 미국인 남자친구도 사랑하게 되었다. 친구는 그전까지는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생각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을 양성애자로 재정체화하기까지 했다. 3년 후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해서 동거는 끝났지만, 친구는 아직도 그들과 아주 긴밀히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두 가지 이야기에서도 드러나지만, 폴리아모리의 동거는 셰어하우스 개념과는 다른 곳에 방점이 찍힌다. 셰어하우스는 공동주거를 함으로써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이 핵심이지만, 폴리아모리 공동주거는 사람 사이의 감정적 유대나 육체적 교감 관계를 소홀히 여기면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파트너십 제도의 공백으로 인한 소외나, 일상생활에서 서로에 대한 질투나 불신이 생기는 일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인들에게 서로 섹스 가능한 사람 4명이서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게 농담만은 아닌 것이다. 선우의 지금 당장 같이 살자고 한 말은 거절했지만, 언젠가 몸이 맞고 뜻이 맞는 사람들이 생기면 같이 살자고 말했다. 만약 4명이 모인다면 나는 입양을 해 아이를 키우고 싶다. 가족을 필요로 하는 아이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함께 살고 싶다. 육아 부담이 커서 그전까지는 상상도 못했지만, 육아도 3인 이상 분담하면 경제적 부담이 훨씬 적다. 혈연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의 양상이 가능하다는 것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이미 육아 자체는 부모 2인이 온전히 부담하지 않고 직계가족이나 위탁 시설이 분담한다. 육아 담당자가 여럿일 경우 온전하게 성장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편견이다. 아이의 성장에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가족 환경에 대해 차별적인 시선이다. 물론 육아는 다른 사람들과 모두 의견이 합치되어야 하는 부분이라 쉬이 얘기할 수 있는 없지만 말이다.

폴리아모리 가족의 육아까지 생각해 봤을 때, 2인 파트너십 또는 혼인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하는 것이 반드시 미래의 가족의 상이어야 할까? 단순히 동거 관계가 아닌 폴리아모리 가족의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가 꿈꾸는 가족의 이미지는 사뭇 달라져야 할 수도 있다. 폴리아모리 가족을 인정하면 사회가 무너질 것이라는 비난도 많지만, 과연 혈연 중심의 이성애 모노가미 시스템이 사회를 안정시키고 있는지부터 반문해야 한다. 독점적 혼인 관계의 이혼율을 생각해보라.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건 폴리아모리 가족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가족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억압하고 기성 체제를 유지하려는 관성이다. 폴리아모리인 나에게 가족으로서 함께 산다는 의미는 기존 정상 가족의 것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사회를 바꾸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미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방식으로 가족을 구성해나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면 우리는 가족의 상부터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글을 쓰는 동안 선우가 아닌 애인에게, 만약 폴리아모리 가족을 구성한다면 어떤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냐고 물으니 “착한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는 귀여운 답변이 돌아왔다. 언젠가 그런 착한 사람‘들’과 폴리아모리적인 가족 관계로 함께 살게 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즐거워질 것이다.

이성 간의 혼인으로 맺어져 혈연관계로 형성된 집단. 가족의 이 관습적 정의는 곧 바뀌거나 대체될지도 모른다. 비혼과 졸혼을 선언하는 사람들, 동거를 택한 연인들,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 법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성소수자 연인들, 연인 관계가 아니지만 가족이 된 사람들, 서로 모르지만 함께 사는 하우스 메이트들, 완전히 새로운 가족 모델을 찾는 폴리아모리스트들. 2018년, <GQ>는 가족은 무엇인지, 함께 하지만 또 가족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에디터
    글 / 심기용('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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