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봄/여름, 파리의 우영미 쇼. 의자에 붙어 있는 이름이 낯익었다. 자리를 확인한 후 의자에 앉은 그 ‘이름’들은 여름용 수트를 입은 채 다리를 꼬았고 첫 번째 모델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수첩을 폈다.
그 사람들이 ‘블루밍 데일스’와 ‘니만 마커스’, ‘삭스 핍스 애비뉴’ 바이어가 맞나? 맞다. 미국 쪽 4군데 멀티숍에 이미 ‘우영미’컬렉션이 들어가 있지만 그래도 욕심나는 건 따로 있었다. 이번에 그들에게 처음 초대장을 보냈는데 수석 바이어들이 왔다. 반응이 괜찮았다.
당장 입점하세요, 그러던가. 안 그랬다. 워낙 신중한 사람들이라 별별 것들을 다 살펴보고 묻고 메모한 다음에 정작 주문은 안 하고 가더라. 색감이 더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해서 고민이다. 유럽 쪽에서는 지금의 색 팔레트를 좋아하는데 미국 마켓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색깔을 넣어야 하는 건지 생각 중이다.
색깔은 무슨. ‘우영미’는 회색과 흰색, 검정색이다. 날씨로 치면 비 안 오는 흐린 날 같고, 그게 좋다. 그런데 어째 섹시하지 않다는 얘기로 들린다. 요즘은 건강하고 밝고 성적으로도 호쾌한 쪽이 좋다. 그동안 너무 피아노 칠 것 같은 남자들만 편애했나 싶고.
그래서 이번 쇼에 커팅이 과감한 가발을 쓴 모델들을 세웠나. 메이크업도 분명해서 약간 비주얼 록밴드 같았다. 매번 너무 옷만 보여주니까 심심해들 하는 것 같아서 쇼적인 부분을 넣고 싶었다. 내 성격에 피날레에서 춤을 출 수도 없고 무대에 피에로를 풀 수도 없으니 메이크업만 평소보다 더 했다.
참, 무대에 세운 접힌 종이들 봤나. 그게 뭐 같던가. 작은 집 같았다. 의자에 놓여 있던 보도자료에서 ‘폴딩 아키텍처’라는 설명을 읽었다. 나는 디자이너 안 했으면 건축가가 됐을 거다. 요즘도 혼자서 집을 짓는 공상을 자주 한다. 비슷한 점도 많다. 건축가와 패션 디자이너 모두 평평한 것을 이용해서 입체를 만들지 않나. 사람을 집에 담느냐 옷에 담느냐의 차이일 뿐, 원리는 같다. 건축 관련 책도 자주 보고 건축가들이 뭘 가지고 노나, 관심이 많다. 이번 컬렉션도 건축가들이 집 짓기 전에 종이로 만들어 놓은 모형 같은 것을 보고 생각을 얻었다.
파리 쇼 처음 할 때 왜 ‘우영미’였나. ‘솔리드 옴므’가 15년째였다.‘솔리드 옴므’는 이미 장성한 청년이었고 대중들이 다 자란 청년에게 기대하는 건 안정적인 어떤 것이다. 파리 컬렉션에서는 대중적이고 편한 걸 하고 싶진 않았다. 거기서 나는 너무 신인이니까. 그렇다고 ‘솔리드 옴므’를 서울 버전 따로 파리 컬렉션용 따로,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다른 이름을 썼다. 외국이라서 온전히 내 한국 이름을 쓰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런 오기 같은 게 있다.
파리 쇼 장 밖에서 서성이던 한국 유학생들을 들여보내면서 가드들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국 학생은 표 없어도 들여보내랬어. ‘마담 우’가. 티켓 확인에 철저한 파리 사무실 사람들이랑 그 일로 여러 번 언쟁을 했다. 우리 홍보하는 장 룩은 처음에는 이해 못 하더니 이젠 내 마음을 읽는다. 나도 알아. 마담 우. 그건 한국 정서야, 그러더라.
파리에서 다른 디자이너들 쇼도 보나. 누굴 좋아하나. 당신은 누굴 좋아하나.
파리에선 앤 드뮐미스터가 좋다. 그러고 보면 앤 드뮐미스터와 우영미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게 뭔가. 식물 성분 같은 남자 옷? 동물로 쳐도 초식 동물쯤 되겠다.
누군가에게 가족을 얘기할 때의 말투와 표정, 그 느낌이 비슷하다. 디자이너라도 우리는 여자고 엄마니까 그런 거겠지. 애들 엄마는 어디든 표가 좀 난다. 나는 멋지고 세련되고 카리스마 넘치는 디자이너에 대한 열망이 없다. 그렇다고 앤 드뮐미스터처럼 아들 얼굴을 프린트한 티셔츠를 만들진 못한다. 그런 건 또 못한다. 성격상.
성격상 못하는 게 다른 건 또 뭐 있나. 마음에 없는 건 다 못한다. 마음에 없는 칭찬, 마음에 없는 아부. 싫으면 당장 표난다. 제일 싫은 건 괴상한 뭔가를 해서 관심을 끌려는 디자이너다. 패션쇼가 서커스도 아니고 기괴한 옷을 늘어놓는 건 정말이지 싫다. 불편하다. 제레미 스콧은 그래서 싫다. 디자이너가 대중에게 줄 수 있는 건 옷과 이미지다. 둘 다 잘하면 제일 좋지만 이미지만 만들려고 하고 옷은 말도 안 되는 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좀 허튼 짓을 해도 옷을 잘 만들면 그건 얘기가 또 다르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존 갈리아노가 광대 같아서 싫다고 했더니 해 준 말이 생각난다. 그 사람 옷을 얼마나 잘 만드는데, 욕하지 마세요. 그때 그랬다. 내가 그랬나. 존 갈리아노가 피날레에서 하는 행동 때문에 그 사람을 싫어한다니까 그걸로 디자이너를 판단하지 말라고 한 얘기였을 거다. 벳시 존슨이 싫다고 한 건 지금도 이해가 간다.
이번에 우영미 인터뷰를 한다고 미리 공고를 했더니 독자들이 뭘 좀 물어왔다. 귀여운 질문이랑 평범한 질문이랑 황당한 질문이 있다. 뭐 먼저 답하겠나. 황당한 거 먼저.
저는 엉덩이가 처져서 ‘솔리드 옴므 ’바지를 입어도 안 멋져요. 다른 어떤 브랜드를 입으면 좋을까요. 추천해 주세요. 다른 거 입지 말고 ‘솔리드 옴므’입으세요. 대신 지금보다 한 치수 크게 입으세요. 엉덩이 처진 거 아무도 몰라요, 이런 대답 어떤가.
우영미치고는 상업적이다. 지금까지 받았던 가장 황당한 질문은 뭐냐는 평범한 질문도 있다. 며칠 전에 스웨덴 잡지에서 이메일 인터뷰 요청이 왔는데 질문 중 하나가 비 오는 날 당신은 웰링턴 부츠를 신고 나갈 건가요, 였다. 재미있으라고 한 질문일 텐데 재미가 없었다. 나는 재미있게 대답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어서 앞 뒤 설명도 없이 ‘안 나갑니다’ 라고만 썼다.
귀여운 질문은 뭔가. 우영미의 가족은 모두 ‘우영미’를 입나. 정작 우영미는 여자라서 ‘우영미’를 못 입나. 아까워서 어쩌나. 나는 남자 옷이 잘 맞는 여자 몸을 갖지 못했다. 어깨도 둥글고 키도 작고 살집도 있다. 그래서 내가 만든 남자 옷을 척척 입지는 못한다. ‘우영미’나 ‘솔리드 옴므’는 가끔 줄여서 입는 정도고 주로 기성복을 사서 입는다. 남편은 내가 만든 옷을 많이 입는다. 딸들은 입고 싶은 옷이 얼마나 많을 텐데 굳이 남자 옷을 입겠나.
지난번에 당신의 막내딸이 디저트 가게에서 초코 케이크와 커피 케이크를 골라 오는 걸 보고 놀랐다. 그 빵집에는 딸기와 체리와 장미와 젤리가 토핑된 ‘왕관을 얹은 것 같은’ 화려한 케이크가 두 수레였다. 그런데 장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 밋밋한 케이크를 고르다니. 게다가 그 색깔은 어린 여자애가 보기엔 너무 심심한 색이었다. 우영미 유전자라고 생각했다. 아, 이건 독자 질문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얘기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게 그래서 어쩔 수 없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서 레이스가 달린 이불을 사다 주면 밤새 그걸 뜯어낸다. 엄마, 나는 이런 거 유치해요, 그런다. 걔가 자라면 내 옷을 입을 것도 같긴 하다.
이제 제일 많았던 질문을 하나 하겠다. 우영미와 일하고 싶다,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나하고 코드가 맞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는 천재 디자이너도 필요 없고 굉장한 사교술도 반갑지 않다. 내가 박력 있게 뭘 추진하는 성격이 못되니까 그런 거 다 맡아 처리해주고 스폰서십도 받아 오고 사람 소개도 많이 해주고 그런 팀원이 있으면 좋을 거라고 주변에선 늘 말하지만, 나는 정작 그런 사람이 무섭다. 이런 거 안 하면 안 된다고 이 사람은 꼭 만나야 한다고 달달 볶으면 나는 더 숨는다. 그래서 우리 사무실은 다 숙맥이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다. 그래도 나는 그런 사람들 속에 있을 때 편하다. 조용하지만, 주변 정리는 좀 잘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딸들이 지어준 내 별명이 ‘엄마는 정리왕’이다. 책상 주변이 온통 포스트 잇 천지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기억해야 할 건 다 적어서 붙여놓고 그 일이 끝나면 떼낸다.
이번엔 우영미와 강지영, 둘 다 답해주세요,로 시작하는 질문이다. 두 사람은 늘 남자의 몸이 여자보다 아름답다고 주장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의문이다. 세상에는 뚱뚱하고 배 나오고 피부가 거칠고 키도 작은 남자가 더 많다. 대답은 뭔가. 내가 말하는 남자의 몸은 우선은 이상적인 아름다운 남자의 몸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 조각상 같은 것. 그러나 나는 평범한 남자의 몸, 그 자체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평평한 가슴, 굴곡 없는 엉덩이. 그 단순함과 간결함이 좋다. 살찌고 짧고 거칠어도 그 몸 어딘가에 남자의 몸이 갖는 아름다움은 분명히 있다. 자, 당신의 대답이 궁금하다.
이건 우영미 인터뷰잖아요, 라고 답하겠다. 이제 마지막 독자 질문을 하나 할 거다. 섭섭하다. 얼마 전 페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전 세계의 페레 스토어가 문을 닫고 조의를 표했다. 발렌티노와 이브 생 로랑 같은 디자이너는 단순히 패션이 아닌 나라와 도시의 상징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남자 옷을 했으면 좋겠다. 스무 살짜리 남자의 질문이었다. 어떤 답을 하겠나. 나는 오트 쿠튀르가 아닌 기성복 디자이너다. 내 감성이 젊은 남자들에게 폐가 되지 않을 때까지만 일하고 싶다. 할머니가 된 후에도 쓸 만하다고 그들이 말해주면 즐겁게 일할 거다. 그래도 그렇게 물어봐 줘서 진심으로 기쁘다.
올해가 ‘솔리드 옴므’20주년이다. 나도 몰랐는데 회사 식구들이 말해줘서 놀랐다. 자꾸 뭘 하라고들 하는데 뭐가 좋을지 모르겠다. 서울에서 쇼를 할 생각도 있고, 다른 아이디어들도 꽤 모았다. 서울에 ‘우영미’숍을 낼 준비도 하는데 시기는 아직 안 정했다. 좋은 생각이 나면 그것도 포스트 잇에 적어서 붙여만 놓는다. 빨리 다 하고 시원하게 다 떼냈으면 좋겠다.
- 에디터
- 강지영
- 포토그래퍼
- 강봉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