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슬리는 건 뭐든 때려 부술 기세로 배트를 휘두르던 김동주는 더 이상 풍운아가 아니다. 한숨도 자주 쉬고, 자의식도 드러내는 감수성 강한 남자일 뿐.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공손하게 인사를 해오니까 어딘가 모르게 낯설었다. 그는 군데군데 낡은 속살이 보이는 갈색 가죽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그 각도는 아슬아슬하게 경박스러움을 피해가 있었다. 줄곧 왼쪽 다리를 떨었는데 타석에 들어서서 투수가 공을 던지기 직전을 맞는, 다소 긴장한 순간의 김동주 같았다. 어떤 질문도 피해가지 않았고 이따금 서글픈 낯빛으로 땅을 쳐다봤다. 그건 진심으로 아픈 표정이었다. 헤어질 땐 먼저 악수를 청해 오기도 했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말해줄 수 있어요? FA를 앞두곤 진통제 맞으면서 뛰는 선수도 있잖아요. 무릎이 계속 안 좋아요. 포수랑 충돌이 있었어요. 경기에 못 나갈 정도는 아니지만 움직일 때마다 신경이 쓰여요.
재계약할 때 당신이 그 동안 헌신한 것에 대해 구단이 보상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제가 뭐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구단에서 필요한 선수라고 생각하면 대우를 해 줄거고, 그게 아니라면 안 해주겠죠.
김동주가 두산 이외의 팀에서 뛰는 건 연상이 안 돼요. 데뷔 이후로 줄곧 두산에만 있었으니까. 그래도 세상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요. 100퍼센트라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지금은 시즌 중이고 전 아직 두산 소속이에요. 시즌 끝나면 얘기를 하겠지만, 솔직히 두산을 떠나는 게 쉽진 않을 것 같아요.
일본은 어때요? 솔직히 관심 있어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쪽이 있다면 구단(두산)과 잘 이야기해볼 생각이에요.
국내 다른 구단으로 갈 마음은 없어 보여요. 마음은 그래요. 그런데 지금으로선 어떻게 될지 몰라요. 좋아하는 것과 현실은 다른 거니까.
평소에 같이 뛰고 싶었던 다른 팀 선수 있어요? 아뇨. 두산은 워낙 분위기가 좋잖아요. 자유롭고 선후배 간에도 화목하고. 두산 이외에는 생각해본 적 없어요. 정말이에요.
자기 팀 분위기가 안 좋다고 말하는 선수는 없어요. 두산은 달라요.‘OB 베어스’ 선배들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에요. 모든 선수가 믿고 의지하고 똘똘 뭉쳐서 매 경기 함께 해내는 거예요. 다른 팀에서 온 선수들도 모두 두산은 정말 다르다고 얘기해요.
메이저리그 전문가들한테 국내 타자 중 누가 빅리그에서 통할 것 같냐고 물었더니 이대호와 김태균을 꼽던데요. 경험만 조금 더 쌓으면 충분할 거래요. 그 둘이 당신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음, 그렇죠. 젊고 가능성도 많으니까 태균이나 대호가 훨씬 낫죠.
그냥 지금 실력으로요. 제가 제 입으로 낫다고 얘기할 순 없죠. 그 선수들도 자존심이 있는데. 둘 다 좋은 선수인 건 확실해요.
전문가들이 두 명을 더 얘기했어요. 이승엽과 당신이에요. 바로 주전으로 뛰어도 손색이 없을 거래요. 그런데 나이가 적지 않아서 혹시 가더라도 적응하는 데 애먹을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나이는 별로 신경 안 쓰여요. 어리다고 잘하고 많다고 못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 것보단 뭐랄까 어릴 때 가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잖아요. 완숙해서 가면 미국 야구에 적응하는 데 자기가 해왔던 것들, 일테면 습관 같은 것을 버리기 힘들 것 같아요.
최희섭 선수는 너무 어린 나이에 가서 적응이 힘들었던 것 아닌가요? 성격 차인 거 같아요. 저도 대표팀에 있으면서 외국을 많이 돌아다녀봤지만, 미국이라고 해서 적응 못할 것 같지는 않거든요. 버릴 건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희섭이 같은 경우는 자존심이 강해서 못 그런 것 같아요. 최고의 선수들만 모여 있는 곳이잖아요. 자기 주장을 펴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야구 인생에서 최대의 천적은 누군가요? 지금은 없어요. 예전엔 이강철 선배님이랑 김현욱 선배님이 너무 힘들었어요. 이젠 그렇게까지 상대하기 싫은 투수는 없어요.
어떤 점이 까다로웠나요? 이강철 선배님은 크로스로 공을 던지기 때문에 오른손 타자들에겐 부담이 돼요. 공이 몸 안쪽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김현욱 선배님은 변화구 낙차가 워낙 좋았어요. 그 선배들은 유인구도 자주 던져서, 제가 잘 속았어요. 그런데 요즘 투수들은 주로 정면으로 승부를 하니까 오히려 상대하기 쉬워요.
공격적인 투수들이 상대하기 쉽다고요? 네. 저도 공격적이고 투수도 공격적이면 서로 맞붙게 되잖아요. 그런 게 좋아요. 어떤 투수들은‘치려면 쳐봐라’는 식으로 150km 넘게 던지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공은 얼마든지 쳐낼 수 있어요. 국가대표 경기 때 제 성적이 좋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외국 투수들은 정면 승부를 많이 하거든요.
얼마 전에‘빈 볼’시비가 있었잖아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보복성이 있어 보였어요. 맞히라고 지시하는 경우도 있죠? 맞아요. 분명 있어요. 정말 해선 안 되지만, 팀을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어요. 저도 선수니까 이해하는데, 머리나 목으론 안 던졌으면 좋겠어요. 허벅지나 등으로 던지면 위험하진 않잖아요.
후배들이 당신을 무서워하지 않나요? 무서워하죠. 잘못하면 많이 혼내는 편이거든요.
눈에 띄는 후배가 있나요? 두산의 미래가 될 것 같은 후배요. 두산 베어스는 선수 한두 명으로 야구하는 팀이 아니에요. 한 선수가 아파서 빠져나가면 다른 선수가 들어와서 충분히 그 이상을 해요. 전력은 최하위라는 소리를 듣지만, 늘 좋은 성적을 내잖아요. 선수들이 서로 잘할 수 있는 분위기를 선수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죠. 항상 박수 쳐주고 파이팅이라고 소리쳐 주는 게 두산 베어스의 힘이에요.
이 다음 장 어디쯤에 뉴욕 양키스의 게리 셰필드 인터뷰한 것도 실릴 거예요. 평범한 가족을 이루고 싶었는데 힘들었대요. 어느 순간 주변에 여자들이 몰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들이 좋아했던 건 자신의 돈이었대요. 돈 때문인지는 모르겠고, 어렸을 때 인기는 많았어요. 이십대 후반까지는 술도 많이 마셨고, 여자 만날 기회도 흔했거든요. 지금은 아니에요. 한 번 아픔을 겪었잖아요. 곧 결혼할 사람은 매우 가정적이라서, 저도 더 잘하고 싶어요.
어제 신문에 시즌 종료한 후에 결혼한다는 기사가 났어요. 깜짝 놀랐어요. 저랑 친한 기자들은 다 아는 얘기였지만, 지금은 공개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처음 하는 결혼이잖아요. 제가 공인이라는 것에 부담을 많이 느껴요. 내가 운동 선수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에요. 어제 그 기사를 보고 우는데 제가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예전엔 제가 간통했단 얘기도 있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그 여자가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어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천천히 공개하고 싶다고 한 건데. 저 이제 술도 안 먹어요. 잘 살고 싶어요. 주변에서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그 기자, 한 대 쳐주지 그랬어요. 그런다고 달라지나요? 그냥 오늘 경기장에 나오면 얘기는 좀 하고 싶었어요. 정말 마음 아팠다고. 그런데, 안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기자들한테 전화도 많이 받았어요. 뭐냐고, 여기선 썼는데 왜 우리는 못 쓰게 했냐고.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그런 거 아니라고. 난 몰랐다고.
이혼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던가요? 결정하는 게 쉽지가 않았어요. 애도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잘 했다고 생각해요. 남들이 보면 뻔뻔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때로선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이혼하고 나니까, 어렸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너무 일찍 결혼을 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가정적으로 안정이 안 돼 있을 때 결혼한 거거든요. 이젠 책임감이 뭔지 알 것 같아요. 예전처럼 살지 말아야지, 이 여자한테만은 정말 잘해야지, 이런 생각을 해요.
당신도 다른 운동선수처럼 아내의 내조를 받고 싶은 거죠? 운동선수들은 모두 막내 같아요. 운동이 너무 힘드니까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있죠. 저뿐만이 아니라 누구든 마찬가지일 거예요. 운동선수는 자기한테 헌신적인 여자를 만나기를 바라죠. 그런데 요즘은 가정적인 여자가 많지 않잖아요. 지금 만나는 사람은 저에게 너무 큰 위안이 돼요.
남은 야구 인생에서 최대의 목표는 뭔가요? 신기록을 세우는 것보다는, 열심히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가장 존경하는 선수는요? 박정태, 최동원 선배요. 그분들 때문에 야구를 시작했고 그분들한테 악바리 기질을 배웠어요. 늘 감사하고 있어요.
당신에게 야구는 그저 개인적인 인생일 뿐인가요? 국가라는 대의도 조금은 있나요? 많아요. 조금이 아니에요. 태극마크를 단지 십 년이 넘었어요. 한 번 더, 한국 야구의 위상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어요.
말뿐이라도 고마워요. 그것이 운동선수가 할 수 있는 애국인 거죠? 혹시 나에게 나의 애국은 뭐냐고 묻는다면,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이라고 말하겠어요.
- 에디터
- 이우성
- 포토그래퍼
- 윤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