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미는 소녀였다. <차우>에서 맷돼지를 잡을 땐 선머슴아 같았다. “알았어요, 한 번 해 볼게요.” 오늘은 이렇게 말했다. 저런 눈빛을 하고.
촬영을 마치고 마주 앉았다. 정유미는 책상에 쌓인 인터뷰 자료들을 들어 읽었다. 기사엔 정유미가 ‘잘 팔리는 이미지’라고 써 있었다. “나, 잘 팔리는 이미지였어!” 이렇게 말하곤, 금세 웃었다. 짙었던 화장은 조금만 남아 있었다. 당신이 어떤 여자인 것 같냐고 물었을 땐 “여자가 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매니저에게 개구지게 물었다. “그렇죠, 재웅군?”하고.
잘 팔리는 이미지였네요. 어때요, 옛날에 했던 말들은? 내가 한 말이라고도, 안 한 말이라고도 할 수 없고 그래요. 큰 따옴표 안에 있는 말들은 진짜 내 말처럼 보이는데, 내말은 마지막 한 줄뿐이고 그 위에 살을 붙여놓은 기사도 많았어요. 나쁜 말은 아니었지만. 이런 문답식 인터뷰가 더 억울한 거 있죠?
진짜 당신이 한 말 같으니까? 더 ‘진짜’ 같으니까요.
오늘 촬영은 어땠어요? 하하, 뒷감당이 좀 걱정되네요? 그나마 다행인 건, 대중에겐 아직 정유미라는 배우가 익숙진 않다는 거예요. 좀 더 잘했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아직 제가 사진에 익숙지가 않아요. 항상 이런 거 하면, 다 미안해. 사진을 잘 못 찍으니까.
스틸 카메라 앞에선 어색한 거죠? 오늘은 오히려 편했어요. 콘셉트가 있었으니까. ‘그냥 나’를 드러내기 꺼려지는 마음도 조금은 있어요. 선입견이 생길까 봐. 인터뷰보단 배역으로 인사하는 게 먼저인 것 같거든요. 근데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예전보단 조금 더 열렸어요. 예전에는, 무조건 “안 해, 안 해, 못해” 그랬는데 요즘에는…. 다 잘하면 좋잖아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일도 계속할 거고. 전엔 ‘내가 지금 이런 걸 할 때인가? 연기도 잘 안 되는데?’ 그런 마음의 닫힘이 있었어요.
언제 열렸어요? <차우> 이후? 그렇죠. <차우> 하면서 본격적으로 홍보 인터뷰나 화보 촬영이 있었으니까. 그전엔 정말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였어요.
당신이 동선을 자꾸 벗어나서, 통제가 힘들다는 감독님이 있었어요. “그렇게 하면 제가 찍을 수가 없잖아요” 그랬던 사진 기자분도 있었어요. 아무리 잘하고 싶어도 안 되는데, 말까지 그렇게 하시니까 더 안 되는 거예요. 인터넷에 뜨는 제 사진들 다 되게 힘들게 나온 거예요.
당신이 어떤 여자라고 생각해요? 오늘은 팜므 파탈이었잖아요. 저 남자를 내가 후리겠다는. 하하, 알려주시지. “후리겠다”는 눈빛은 없었던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어떤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음….
마지막 남자 친구는 당신을 어떻게 봐줬는지를 생각해보면? 연애라는 걸 딱 한번 해봤는데요, 나한테 멘토라고 그랬어요. “넌 나의 멘토”라고.
무슨 뜻이죠? “그래?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그냥 그랬죠. 예전에, 사귈 때 한 얘기예요.
다가왔던 남자들은 없었어요? 다들, 별말 없더라고요.
다리가 예뻐요, 목선이 살인적이에요…. 예를 들자면 말예요. 그냥 “너, 참…” 이런 말 많이 들어요. 아, 눈이 너무 예쁘다는 말 들었어요. <10억>에서 이민기 씨가.
너, 참? 그냥, 뭐라고 말은 못하고. “넌 참…”하는 느낌으로. 특별히 남자들에게서 어떤 말을 들었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친구들이 그러는데. 좀 열어보래요. 저한테 다가오기가 힘든가봐요. 닫힌 사람은 아닌데. 제가 어떤 여자인 것 같아요? 작품으로만 날 봤던 사람들, 특히<사랑니>를 보신 분들은 제가 진짜 예민할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억지로 웃거나 하지는않고,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 그냥 즐겁고 좋거든요? 근데, 웃고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다들 놀라더라고요. “어, 이런 스타일이에요?”하고. 저, 원래 이래요. 진짜 좋아서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럼 어떤 남자를 “괜찮다”고 생각해요? 편견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사람. 자세가 좋은 사람, 바른 사람. 여자건 남자건 편견 없는 사람이 좋아요. 편견이 있으면 불편해.
배우는, 지속적으로 당신을 보여줘야 하는 직업이죠. 진실이든 아니든, 자신이든 배역이든. 그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멀어요? 그런 영화가 있었어요. 아직 개봉하진 않았어요. 그 영화를 기다리고 촬영하는 시간은 내 삶과 다르지 않았어요. 내가 해야 하는 대사와 느낌들. 그걸 너무 잘하고 싶었어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가까웠다는 거죠? 당신과 배역이. 그 여자애가 되려고 자제했던 게 많았어요. 간접 경험도 싫었어요. 왜냐면 그건 온전히 내가 해야 하고, 내가 할 거니까.
역할에 몰입하려고 일상을 자제했다는 거죠? 누군가가 너무 좋았는데, 말은 못하고 그냥 기다리기만 했어요. 그 캐릭터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 여자였거든요. 지금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캐릭터가 사랑했던 대상과 내 대상은 분명히 달랐지만, 그래도 말을 못했어요. 좋아한다고 얘기하면….
느낌이 깨지니까? 실제 제가 갖고 있는 느낌이 캐릭터 안에서 깨져버리잖아요. 그 남자가 “오케이, 나도 네가 좋아” 그러면 그때부턴 되게 행복한 여자가 되는 건데, 이 캐릭터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거절당해도 그렇죠. 영화 속에선 기다려야 하는 여잔데 실제로는 아니라는 대답을 이미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마냥 기다렸어요. 양쪽 다 캐릭터에 방해가 되니까요.
매번 그러지는 않죠? 작품을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긴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랬죠.
<차우>와 <10억>은 또 달랐죠? <차우> 촬영장에서, 전 이미 수련이었어요. 다 그렇게 대해주니까, 저도 그렇게 행동해요. <10억>에서 나는 김지은이라는 연약한 캐릭터인데, 그럼 사람들도 다 그렇게 봐 줘요. 촬영 스태프들은 이미 그 영화로 머리가 가득 찬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기운들이 있어요. 아직은, 정말 모르겠어요. 뭔가 배역에 맞춰 변신하는 게 맞는 건지. 그게 뭔가 되는 거라고 착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차우>에서 백 포수 아저씨랑 빵이랑 팩소주 먹으면서 마주 보고 웃던 그런 기운? 대본엔 없었던 장면이죠? 즉흥적으로 주거니 받거니 만들어진 거였어요. 그런 게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는 거예요. 그 장면을 좋아해 주시는 분이 많으니까 또 재미있어요. 우리만 통했던 게 아니라는 걸 느꼈죠. 근데 저는 아직, 제 영화를 봐도 항상 현장 생각밖에 안 나요.
온전히 관객이 될 순 없는 걸까? 직후에는 온전히 못 봐요. 몇 년 후엔 가능할까? 괴롭고, 아쉽고.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좋지 아니한가> 찍고 나선 막 후회했어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어요, 진짜.
<좋지 아니한가>에서는 뭐가 아쉬웠어요? 제가 연기를 대하는 방법은 진짜 단순하고 무식해요. 뭘 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캐릭터만 생각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좋지아니한가> 할 때 괴로웠던 건, 그 캐릭터가 되게 어둡고 힘든 애잖아요? 근데 현장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스태프들도 다 젊고, 피디님도 여자였고, 배우들도 너무 좋고 화기애애했어요. 근데 내 캐릭터는 어두운 애니까. 안에선 계속 ‘내가 이렇게 즐거우면 안되는데, 이렇게 어둡고 힘든 캐릭터인데 지금 여기서 웃고 떠들어도 될까’ 생각했던 거죠.
당신의 이런 말들과 ‘4차원’ ‘엉뚱함’처럼 당신을 수식하는 말들이 연결이 안 되네요. 엉뚱함의 기준은 뭘까요? 신경 안 써요. 그냥 친구들은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솔직히 별로 특이할 게 없는데, 뭐만 하면 그걸 쉽게 ‘4차원’ 같은 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하시잖아요.
‘독립영화의 아이콘’이기도 했죠? ‘네가 인디 영화계의 꽃이라며?’ 누가 또 그러는 거예요. ‘꽃은 좋지만 뭐 한 게 없는데…. 제가 그 말을 듣고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독립영화를 위해서 한 게 뭐가 있을까?’ 한번 쭉 적어봤어요. 왜냐면, 그 얘기를 듣기 전에 독립영화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가 저한테는 <폴라로이드 작동법>밖에 없어요. <가족의 탄생> <사랑니><좋지 아니한가> 세 작품이 있었는데, 다 상업영화예요. 흥행이 안 돼서 그렇지, 하하. 다 제가 선택한 건 아니었지만, 살짝 민망한 거예요. 그래서 ‘아, 뭔가를 해야 하나?’ 생각했죠.
오히려? 독립영화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어요. 저는 학교 다닐 때도 아무거나 막 안찍었어요. 독립영화, 단편영화를 많이 찍긴 했지만 비슷비슷해서 하기 싫은 건 안 했어요. 거의 마지막에 찍은 게 <폴라로이드 작동법>이었죠. 그게 잘돼서 데뷔도 할 수 있었고. 하지만 그렇게 불리는 건 민망했어요.
당신과 작업했던 사람들은 그 캐릭터가 곧 정유미라고 말했어요. <가족의 탄생>에서 다 퍼줄 것 같은 여자애로 나왔을 때도. 그분들에겐 제가 이미 그 캐릭터이기 때문이에요. 그분들은 그렇게만 나를 본 게 다니까. 친구들은 작품마다 ‘저거 너야, 저거 너야’ 그래요.
하하. 그건 좀 무섭네요. 처음부터 캐릭터가 곧 나였던 적은 없어요. 하지만 어쨌든 내가 하는 거니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도 말이 되게끔 해야 하잖아요. 내가 선택했고, 또 나를 선택해준 이상은. 그게 자연스럽게 섞이다 보니까 그게 진짜 나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 에디터
- 정우성
- 포토그래퍼
- 김종민
- 모델
- 정유미
- 스탭
- 스타일리스트/김봉법, 헤어/권호숙, 메이크업/권호숙
- 브랜드
- 나인식스 뉴욕, 에고이스트, 에스티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