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섹스를 했다. 한 남자와는 아니었다. 손해 본 듯한 느낌도 없진 않았지만….
이 여자의 모든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 이 있다는 것 정도는, 우리 둘 사이의 모든 관계는 모텔에서의 세 시간이 전부라는 것도. 추적추적 매달릴 일은 처음부터 없는 관계에 둘 다 목말라 있을 때였다. 필요조건은 상처였다. 몇 시간의 일탈로는 덮을 수도 없는, 몇 년이 지나도 덮이지는 않을. 가끔만 만났고, 그걸로 충분했고, 굳이 말을 섞을 이유도 없었다.이날은 달랐다. 질문은 실수였을까?
“몇 번이나 한 것 같아? 작년에.”
“당신이랑?”
“아니, 모두와.”
“글쎄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였으니까, 한 달에 여덟 번 정도?”
“거의 백…. 그럼 손해야 이익이야? 한 사람하고는 아니었으니까, 계산이 좀 복잡해지나?”
말하자면 이 여자와는, 단 한순간도, 손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몇 시간 전에 미리 전화하는 것만으로 세 시간의 섹스를 담보할수 있었다. 낮이건 밤이건 관계없었다. 저녁 땐 술을 마셨고, 회사엔 ‘점심 시간’ 이라는 게 있다. 보통은 점심을 먹고, 어제 산 주식이나 펀드 수익률을 얘기하고, 커피 한 잔으로 사무실에 들어갈 20분을 유예하고, 누군가는 알몸을 섞기도 하는 시간.
11시의 모텔에선 좀 다른 냄새가 났다. 리넨과 베게는 종종 호텔처럼 버석거렸다. 모든 익명의 밤이 일단의 깔끔함으로 정리되는 시간. 창밖에선 가끔 경적 소리가 들렸고, 12시까진 샤워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여자는 제인 마치라도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방에 들어서자마자 샤워를 했을까? 영화 <연인>에서처럼, 유두가 비치는 리넨 원피스대신 검정색 스타킹과 스커트,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무릎 위 5센티미터를 넘은 적이 없는 단정한 회사원이었고, 그 방은 지나치게 깔끔하지도 불쾌하게 더럽지도 않아서 비현실적이었다. 홍콩이나 브라질의 매캐한 도심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그녀가 말했다.
“전에 얘기한 적 있죠? 진짜로 좋아했다던 상사.”
“그 유부남?”
“영국으로 발령 났어요. 나한테는 말하지도 않았어. 다른 직원들이 수군대는 걸 듣고 2주 전에 알았어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그 남자랑 하지 않았어?”
어떤 남자들은 섹스를 하기 위해 돈을 쓰기도 한다. 법을 피해 돈으로 살 수 있는 어떤 밤도 있고, 관계의 바탕을 남자의 돈이 형성하기도 한다. 영국으로 발령 난 사십대 남자는, 2천원 정도 하는 떡볶이로 여자의 마음을 샀었다. 둘 다 취해 있었지만 소박하고 진지해 보이는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나? 고기와, 와인과, 방값으로 하루에 20만 원정도를 예상하고 일벌처럼 부산하게 여자를 만나러 가는 어떤 남자들보단 확실히 노련했다.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 그 남자는 착실한 적립식 펀드 같았어요. 어차피 이혼을 바란 것도, 내가 곧 결혼할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만 좋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비과세?”
“응. 그런데 이렇게 헤어지니까….”
“마이너스 20퍼센트에 위약금까지 물어야겠네?”
“그냥, 파산.”
여자의 섹스는 담백했다. 그 이상은 없었다. “아침까지 있는건 싫다” 는 말이 그녀의 습관이었다. 가족들한테 딱히 할말도 없고, 같이 잠까지 잘 이유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섹스하는 남자들 모두가 그렇진 않았다. ‘빼자마자’ 샤워하러 가는 조급증도 있었지만, ‘후희가 매너’ 라고 생각하는 로맨티스트도 있었다. 여자는 그런 낭만주의자들을 한 마디 부사로 정리했었다. “칭얼칭얼.” 적립식 펀드 같았던 상사는, 아무것도 바랄 것 없이 마냥 좋기만 했다고 여자는 말했었다.
“나는 거절할 생각이면 모텔에 들어오지도 않아. 들어온 이상은 열심히 하죠. 알잖아?”
“잘 모르겠는데? 다른 남자들이랑? 열심히 어떻게?”
“칫, 일단 남자가 좋아한다고 알려진 건 다 해주려고 하니까. 그… 회음부라고 하나? 하지 말라고 해도 내가 붙잡고 할 정도니까요. 억지로 해도 좋아할 걸 알고.”
“자세히.”
“자세히…랄 게 있어요? 입으로 해주는 거지. 나처럼 아래에 아래까지 입으로 해주는 여자, 많지 않을걸? 그리고 난 뒤로 하는 게 좋아요. 부담스러운 크기만 아니라면. 체위를 말하는 게 아닌 건 알죠?”
굳이 말하자면, 뒤의 뒤였다. 뒤의 약간 위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당황하면 지는 거라지만….
“그, 그래서 올해는 플러스야 마이너스야? 열세 번째 월급이라는말도 있잖아, 연말정산은.”
여자는 ‘상처만 받고 끝난 것 같았다’ 고 2009년을 정산했다.
“뭘 많이 사긴 산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날 때 있죠? 작년이 딱 그랬어. 일기를 몰아서 쓸 때처럼. 시슬리 같은 데서 수프리미아 같은 나이트 케어 라인을 단계별로 사서 바르고 잤는데 다음 날 얼굴이 뒤집어져 있는 느낌?”
잠자리 습관으로 여자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남자의 오만이다. ‘회음부’ ‘항문’ 같은 말을 하는 여자가 ‘수프리미아’ 같은 말은 아무렇지도 않은 은유로 발성할 때의 편견과 역설….
“샘플 좀 달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브랜드 있잖아요? 그래서 벼르고 별러서 통째로 사게 되는. 그런 타입인 것 같아, 나는.”
둘 다 가운을 입고 있었다. 가운 밑엔 몸만 있었다. 몇 번째인지가물가물한 이 여자의 몸이, 평소보다 조금 늙은 것 같았다. 혹은 작아 보였다. ‘무드등’ 같은 걸켜 놓았더니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끊이질 않으니 낮인가? 여자의 입에서 맥주 냄새가 나지 않으니 낮인가? 켜놓은 TV에선 언제라도 하는재방송이 한창이었다. 소녀시대가 앞차기를 하기도 하고, 니콜이 울기도 하는. 이런 도시에서, 낮과 밤 사이에 회음부와 입술만큼의 의미라도 있을까? 여자는, 이제 묻지도 않은 말을 방언처럼 하기 시작했다. 누가 좀 물어봐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얘긴 아무한테도 못했던 것처럼.
“연말에 또 어떤 남자를 만났어요. 일로 알고 지내는 회사 사장인데, 영업팀 술자리에 같이 갔었죠. 그런데 술이 좀 들어가니까 나만 남기고 다 도망간 거야…라기보단, 나만 끝까지 마신 거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나긋하게 ‘으응…’ 하고 대답하는 건 이럴 때의 습관이었다. 머릿속에선 가운을 벗으면서 어딘가로 손을 넣고 있었다. 다른 남자 얘긴 이제 그만 들어줘도 됐다 싶었으니까.
“약간 자포자기한 심정이었어요. 그 남자는 영국으로 떠났고, 섹스를 쉰 지 좀 됐을 때였고. 왜 그런 얘기 알죠? 친구들끼린 ‘남자친구가 없을 땐 문란해진다’ 고 해요. 그런 날이었어.”
“으응….”
“전 샤워는 꼭 하는 편이라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그 남자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풀러 내렸어요. 그리곤 가슴에 마요네즈를 발랐어. 그게 시작이었어요.”
가운을 들췄다. 여자의 가슴 언저리에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요네즈가 뜨거웠어? 데워 먹었어?”
여자가 장화 신은 고양이를 보는 눈빛으로 웃었다.
“하여간 귀여워. ‘쪼가리’ 라고 하잖아요. 그 남자가 입으로 한 거지. 내가 남겨달라고 했어요. 모텔에서 나서면 어차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인데, 뭐라도 남기고 싶을 때 있잖아요. 마음이 허전하니까.그날은 그랬네? 취했었나….”
가운 끈을 풀려던 오른손이 주춤한 걸 여자도 알았을까? 일년만큼 늙어 보이던 여자의 몸에, 이젠 얼굴을 모르는 삼십대 남자의 입술과 혀와 이빨이 동시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양가휘 같은 상속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는 브라질이나 홍콩이 아니니까. 여자는 말을 이었다.
“작년은, 위험한 한 해였어요. 이렇게 헌신적으로 매번 남자를 대할 바에야, 차라리 돈을 받고 하자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아무리, 당황하면 지는 거라지만….
“어, 얼마 정도?”
“80만원 정도? 그냥 갑자기 든 생각이에요. 나도 ‘헉’ 하고 놀랐어. 그런 생각을 하다니.”
“모르는 남자라도?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돈을 낼 수 있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아뇨, 그건 아니고. 술 먹고 어쩌다 한 번 잤는데, 나는 싫은 남자가 계속 만나자고 연락이 오면…. 그 남자가 ‘80만원 줄게 한 번 더 만나자’ 하면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았어. 처음 보는 남자가 ‘얼마면 되겠어? ’ 할 일은 거의 없잖아요? 하지만 어떻게든 스쳤던 사람이 그런 제안을 해오면 넘어갈 수도 있었던 위험한 한 해였지.”
채널을 돌렸다. YTN 정오 뉴스가 끝나가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빛이 들어오고 있었다는 걸,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 서울의 오후는 이미 시작됐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심을 먹고, 커피를 사서 ‘배가 부르니 추운데도 사무실에 가기 싫다’ 며 투정을 부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을지로 언저리엔 점심 시간도 잊고 철근을 실어 나르는 트럭들이 길을 막고 있겠지…. ‘차라리, 영화 한 편을 보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 여자가 가운을 벗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대로 두고 볼륨을 높였다.
- 에디터
- 정우성
- 아트 디자이너
- Illustration/ Kim Eun J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