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희는 아름답다는 말을 눈발이 날리듯 썼다. 눈발은 씨앗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화 <시>가 시작하기 전에 준비해 둬야 할 말인가 싶었다.
사실 얼굴만 클로즈업으로 찍는 건 당신이 거절하실 줄 알았어요. 젊은 친구들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아니, 왜요? 주름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클로즈업하는 건 좋지 않지만, 어떻게 해요? 난 자연스러운 게 좋거든요. 그런 데 얽매이면 스스로 너무 피곤해지지 않을까요?
‘윤정희’ 하면 ‘이목구비’ 란 말이 있었죠. 하지만 세월은 아름다움을 가리기도 하잖아요. 난 편안하게 살고 싶어요. 남을 너무 의식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변하는 그대로, 그렇지만 아름답게 변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겠죠.
얼굴은 자기 의도대로 어떻게 만들어지는 게 아닌데도요? 얼굴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느낌, 풍기는 게 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느끼는 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거예요. 그대로의 느낌으로. 난 참 인생을 아름답게 살고싶거든요. 사치로 아름다워지는 것 말고요. 옷도 명품보단 편안한 게 좋아요.
얼굴에 들어가는 돈은 사치라고 여기지 않으시나요? 얼굴은 노력에 따라 달라져요. 저는 아무리 피곤해도 저녁에 치즈 마사지를 해요. 쁘띠 스위스라는 수분이 많은 치즈죠. 미장원도 안 가서 남편이 잘라줘요. 염색도 직접 하고요. 모든 걸 제 손으로 하려고 해요.
관리라기보다 노력이란 말씀이군요. 네. 내 피부 괜찮지 않나요? 여성들은 자기 피부에 신경 쓰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보통 얼굴을 알아본다고 하잖아요. 예전에는 밖에 돌아다니지도 못하셨을 것 같은데, 지금 서울에서 길거리를 돌아다니시는 데 불편한 건 없으시던가요? 아이, 물론 젊은 친구들이 알아볼 리 없는 건 당연해요. 제가 74년에 파리 유학을 갔는데, 그때 태어난 젊은 친구들이 제 영화를 봤겠어요? EBS에서나 가끔 나오잖아요. 제 영화를 안 봤지만 “엄마 아빠가 좋아하세요, 사인해주세요” 하는 친구들은 있어요. 하지만 연배가 비슷한 팬들은 어디를 가도 반갑게 맞아주세요. 그래서 참 기뻐요. 중국을 가든, 이탈리아를 가든, 저 동부 쪽을 가든, 러시아를 가든 다 만나요.
혹시 너무 편안해서 섭섭한 마음은 없으셨을까 싶어서요. 제가 불란서 가기 전까지 영화를 2백80편 했어요. 7년 동안요. 하지만 그때도 전 스타의식을 갖지 않았어요. 카메라 앞에서나 영화배우지 뭐 특별할 것 있나요. 저는 큰딸이었고, 부모님 가정교육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거였으니까, 되도록이면 아름답게 살려고 노력했을 뿐이에요.
다시 〈시〉라는 영화로 돌아오셨기 때문에 비단 유명세가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관객들이 배우의 얼굴만으로 느끼는 감정이 있을 텐데, 그건 세월이고 연기 생활의 역사겠죠. 그런데 15년 만의 연기는 그것 없이 연기를 하는 것이잖아요. 관객들이 선생님을 백지로 맞닥뜨리게 됐는데 두렵지 않으신가요? 기도를 해요. 시나리오가 정말 마음에 들었고 우리 이창동 감독이 정말 훌륭한 감독이에요. 스태프 한 명 한 명까지 좋은 영화를 위해 다들 정말 열심히 했어요. 더 할 건 기도밖에 없죠.
기도가 두려움을 없애주나요? 두려움을 없앤다기보다 간절히 바라는 거예요. 정말 열심히 했으니까요. 남편과의 연주 여행을 멈추고 여기에 와 있는 것도 〈시〉에 온 정성을 다하기 위해서예요. 나는 ‘바람’ 이란 단어를 쓰고 싶어요.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아요. ‘작품이 좋았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좋아했으면 좋겠다, 젊은 친구들도 좀 많이 봐줬으면 좋겠다’하는 바람이에요.
‘미자’ 라는 당신의 본명이 이 영화에 쓰일 정도인 걸 보면 이창동 감독이 완전히 선생님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신 듯해요. 그렇게나 선생님을 그 역할에 꼭 맞다고 생각한 이유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저도 물어보려고 해요.
당장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은데, 의외네요. 이창동 감독과 교류가 있고 그런 건 전혀 아니었거든요. 부산영화제에서 “안녕하세요. 영화 참 좋았습니다” 하는 인사, 남편 음악회에서 시나리오에 대해서 얘기한 것, 그 정도예요. 영화 촬영 전에 개인적인 교류는 전혀 없었어요. 작품에 대해서만 대화했죠.
당신과 주인공 사이에 비슷한 부분이 있었던 걸까요? 남편 말이 〈시〉의 미자와 제가 비슷한 게 아주 많대요. 제가 좀 꿈속에서 살긴 하거든요.
정부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손자 딸린 가정 도우미 역할이죠? 그러다 시창작 교실에 다니고요? 시상을 찾으러 다니다 큰 충격을 받는 사건이 생겨요. 하지만 그 다음에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고요.
순간적으로 잊어버린다고요? 네. 그 사건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는 행동들을 해요. 나는 참 그녀가 매력 있는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당신과 공통된 부분인가요? 나도 바보 같아요. 남편도 나보고 바보라고 그러는 데요 뭐. 재밌게 살고 싶어요. 생각하기에 달려 있죠.
감히 판단을 내려보자면, 당신처럼 소녀 같은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번뜩여요. 누군가에 대해 가진 선입관 같은 게 별로 없죠. 보통 사람들이 누군가를 본다는 건 몇 개의 필터를 끼우고 보는 건데, 선생님 같은 분은 그게 없죠. 그래요?
네. 그렇습니다. 들켰네.
하지만 사실 순수하다는 말은 철이 없다는 말과 동일시되기도 하고요. 친구들과 저녁 먹다가 처음 들었는데, 나보고 4차원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4차원이 뭐냐고 내 동생한테 찾아보라고 그랬어요.
의미를 알고 나니 수긍이 가시던가요? 맞는 거 같아요.
인정 한 번 빠르기도 하셔라. 미스터 정이 생각하는 4차원은 뭐예요?
4차원은 상식적이지 않거나, 문법을 벗어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유행어였죠. 예의가 없다는 뜻인가요?
예의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굉장히 예의를 지키는 사람인걸요?
딸 같고 아들 같은 스태프들과 작업하셨을 텐데, 선생님이 굉장히 예의를 갖춰 대했다면 선생님을 다소 어려워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지금도 보고 싶다고, 스태프들이 연락해요. 현장에서 젊은 영화 스태프들 보고, 나 놀랬어요. 전부 예의가 참 바르고,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얼굴 찡그리는 사람 하나 없고, 불평하는 사람 하나 없어요. 요즘 젊은 친구들한테 난 희망을 가져요. 참 똑똑하고 일도 잘하고,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어요. 그래서 난 우리나라가 앞으로 훨씬 훌륭한 나라가 될 것 같아요.
당시 젊은 배우였던 배두나나 심은하를 칭찬하는 말씀은 기사로 몇 번 접했어요.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이야기해주시는 것 같단 인상도 사실 좀 받았어요. 아직까지 좋은 친구들만 봤으니까 그런지도 몰라요. 하지만 가식적인 얘기 없이 내가 느낀 대로 털어놓으면 서로 대화가 참 잘돼요. 얼마 전에 음악회 갔을 때도, 같이 일했던 젊은 친구들이 반가워서 막 뛰어 오고 이러는 게 내게 참 자연스럽고 기뻤어요.
불경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안개〉의 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신성일 선생님이 방 안에 들어가면, 인숙 역의 당신이 무릎걸음으로 가서 문을 닫죠. 닫고 나서 엎드린 채 고개만 뒤로 돌려서 이렇게 보시거든요. 그 장면이 엄청나게 ‘섹시’ 해요. 근데 이제는 〈시〉 포스터의 애잔한 얼굴, 그러니까 선생님의 나이 드신 모습이 젊을 때의 모습보다 먼저 떠오를 수도 있겠어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 그러기를 바라세요? 아뇨. 내 말은 우리 영화가 성공해서 〈시〉가 많은 분들에게 남아 있기를 바라는 거죠. 영화인으로서의 욕심이에요.
젊은 시절이 그립진 않으시고요? 너무 욕심 부리지 않고 정말 소박하게 우리 둘이서 열심히 살아요. 좋은 친구들이 주위에 많고요. 남편이 그래요. 우리는 불평하면 죄받는다고.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게다가 영화에서 나는 너무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젊은 친구들은 몇 편 하고 계속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우리 때는 촬영 거절하느라 도망 다니기 바빴다고요. 그때를 한국 영화의 황금기라고 하는데, 얼마나 복 받은 거예요. 정말 원이 없어요.
그렇게 도망 다니셨는데도 300여 편이나 찍으셨죠. 파리 유학가기 전에 280편을 찍었고, 결혼 후에도 스무 작품을 찍었어요. 행운이 따랐죠. 하지만 계속해서 영화를 할 거라는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요. 남편이랑 딸이 영화를 좋아하고, 아내로서 엄마로서 좋은 영화를 한다는 걸 기뻐했던 것도 행운이었어요.
하지만 젊은 육체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그런 거 전혀 없어요. 단지, “아이, 앞으로는 시간이 좀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 하는 건 있어요.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소원이 있다면 이 아까운 인생이 좀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한 시트콤에 나와서 요즘 유행하는 대사가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 예요. 그래요? 나하고 비슷하네, 아니 나는 멈추는 건 별로예요. 흘러갔으면 좋겠어요. 천천히 흘러갔으면 좋겠어요. 천천히 흐르는 강물처럼 말이에요. 강이 역류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건 안 되잖아요.
이창동 감독은 테이크를 길게 가져가는 것으로 유명하잖아요. 대사도 많고요. 굉장한 체력적 부담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스태프들이 걱정하더라고요. 하지만 매일같이 촬영해도 힘들게 느낀 적은 없었어요. 촬영할 때는 계속 긴장하고 있으니까요. 촬영이 끝나고 나서야 힘든 걸 알았어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현장이 즐거웠어요. 좋은 시나리오로 즐겁게 찍었어요.
당신은 늘 작품 고르는 안목이 좋으셨죠. 시나리오가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김수용 감독과 함께 문예 영화를 많이 찍으셨잖아요? 문예 영화를 많이 찍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좋은 시나리오의 영화를 선택한다는 게 저의 첫 번째 원칙이에요. 문예 영화와는 인연이 많았죠. 김수용 감독과 참 많이 찍었고, 김승옥 원작의 〈안개〉나 김승옥 작가가 처음으로 감독한 〈감자〉도 내가 했죠. 이창동 감독도 사실은 소설가였고요.
시나리오에서 어떤 점을 관심 있게 보세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화면을 생각해요. 어떤 메시지가 있는가 하는 점도 중요하죠. 〈시〉를 통해선 대중들이 다시 시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나는 엉뚱하게 〈시〉란 작품을 택한 게 아니에요. 옛날부터 시 낭송도 많이 했고, 문학하는 사람들도 다 좋아했어요. 미당 선생의 〈화사집〉 50주년 때는 남편이 피아노 치고 내가 낭송한 적도 있는걸요.
그 처절한 시집을 당신이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한데요. 미당 선생님 시가 다른 시보다 낭송하기는 좋은데, 독특한 언어가 있으니까 불어나 영어로 번역하기가 힘들어요. 음의 흐름 같은 게 참 강해서 좋아요. 어느 불란서 페스티벌에서 미당 선생님 시를 낭송한 적이 있는데, 불어로 번역해서 낭송했는데도 사람들이 다 좋아하더라고요. 너무나 훌륭한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존경하고 있어요.
아마도 가장 치열한 젊음 중 하나일 거예요. 〈화사집〉은. 그렇죠. ‘자화상’ 같은 건 얼마나 좋아요. 우리 영화가 시에 대한 메시지가 참 강해요. 영상으로 된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의미로 온다면 잃을 것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안 그래도 이창동 감독은 작가가 소설에서 바라는 것처럼, 시나리오도 토시 하나 안 빠뜨리고 그대로 읽기를 바란다고 알고 있어요. 맞아요. 얼마나 꼼꼼하게 찍는지. 근데 나는 그게 좋다 이거예요.
테이크도 길다 보니, NG가 났을 때 다른 스태프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하고 그렇진 않으셨어요? 나는 그렇게까지 길다고 느끼지 못했는데요.
당신과 이창동 감독의 호흡이 잘 맞았나 보네요. 네. 쿵작이 잘 맞았어요.
새삼스러운 옛날이야기 하나 여쭤보려고요. 당신은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한 분이셨잖아요. 경쟁자로서 그 분들과는 사이가 어땠나요? 그건 밖에서 보는 거죠. 사실 고 남정임과 문희는 선배예요. 나는 좀 나중에 나왔어요. 두 분과 작품도 배역도 너무 달랐기 때문에 특별히 치열하게 경쟁하는 건 없었어요. 그렇지만 누가 좋은 작품을 맡느냐는 중요했죠.
그런 의미의 경쟁자를 말씀드린 거였습니다. 그 친구들은 영화를 오랫동안 하지 않았고, 저는 불란서 가서도 영화 공부를 했고, 배우는 15년 만이지만 그동안 청룡영화제나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도 계속 했기 때문에 영화를 떠나본 적이 없어요. 경쟁이 전혀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겠죠. 그렇지만 우리 스스로 좀 더 잘해야지 했던 거지, 다른 사람 작품을 뺏어야 겠다 하는 건 없었어요.
암투가 없었다는 건가요? 그런 거 없었어요.
세 분이서 〈결혼교실〉이라는 작품에 같이 출연한 적 있으시잖아요. 그때는 어떠셨어요? 그땐 다들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죠. 겉으로는 무척 사이가 좋았지만, 아 마음속으로는 다들 그렇잖아요? 내가 좀 더 잘해야지, 그런 게 없으면 뭣 하러 해요, 맛이 없지.
말씀하셨듯이 두 분은 빨리 은퇴했고, 선생님은 계속하셨어요. 후에 나타나는 여배우 트로이카라고 불린 분들은 세 분이 각자가 다른 길을 걷죠. 한 분은 홈쇼핑 광고와 몇 개의 어머니 역할을 맡으면서 친근한 이미지로 남았어요. 또 한 분은 아예 연예계에 나타나지 않고 있고요. 다른 한 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해오고 있죠. 여배우에겐 보통 이 세 개 정도의 선택지가 있습니다. 당신의 경우는 마지막에 가까운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불란서에서도 영화를 많이 보는데요. 영화를 보면서도 연기나 조명을 따져요. 항상 영화 속에서 죠. 내가 여배우였다는 것 때문에 외국에서 얼마나 대우 받고 다니는지 몰라요. 여배우로서의 나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있다면 내 몸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요. 좀 더 진실하게 살아가야죠. 그런데, 나는 엄마나 친구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엄마나 친구 같은 여배우가 되는 것도 좋은데.
물론 직접 뵈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이 만들어지는 이미지인가요?
네. 대중들의 뜻이죠. 내가 얼마나 친구 같은 사람인데!
그럼, 〈시〉를 보면 당신이 친구 같은 사람인지, 여배우 같은 사람인지 알게 될까요? 매력적인 영화니까, 알게 될지도 몰라요.
영화에선 아주 사소한 것이더라도 인물의 변화가 나타나잖아요. 그러나, 시대로 말미암아 한국의 고전 영화들은 인물의 변화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어요. 무슨 난리를 쳐도 결국 탕아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굳이 분류하자면 해피엔딩의 결말이었죠. 〈시〉를 통해서도 인물은 변할 텐데요. 그 변화가 선생님 마음에 드시나요? 결말이 참 멋있어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여주인공이 꿈속을 헤매는지, 살아 있는지, 어디 갔는지 이런 걸 몰라요. 나는 여주인공도 결말도, 매력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영화처럼 삶을 런닝 타임이라 본다면, 당신은 한참이나 지나온 상태잖아요? 0에 가까울 때와 0에서 멀리 있는 지금까지, 본인이 변한 것 같으신가요? 변했어요. 좀 더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시간과 함께 얻어진 건가요? 시간과 함께 얻어진 거고, 제가 되도록이면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려고 했던 덕이기도 하죠.
지금 성격 그대로 젊었을 때도 그러셨을 것 같아요. 특별히 변한 것 보다는 어렸을 때부터도 삶에 대해 화려하거나 대단한 걸 꿈꾸지 않았어요. 아름답게 사는 걸 꿈꿨죠. 근데 그게 이루어졌어요. 남편과 나는 인생관도 똑같아요. 좋아하는 취미도 같고요.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요. 제가 남편에게 ‘우리 아름답게 안 살고 있어?’ 라고 말해요. 나는 만날 참 아름답다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아요. 정말 그렇게 살려고 하니까 그래요.
그럼, 취미가 다른 사람을 만났다거나 너무 야망이 큰 사람을 만난 젊은이들에게는 아름답게 살 수 있는 희망이 없는 걸까요? 쉽지 않겠죠. 아, 아니에요. 희망이 있어요! 내가 좀 편안하게 살게 됐다는 거죠. 왜요, 사랑하면 다 바뀌어요.
당신도 바뀌셨어요? 근데, 솔직히 말하면 바뀐 건 없어요. 제가 고집이 좀 세거든요.
- 에디터
- 정우영
- 포토그래퍼
- 김종민
- 스탭
- 스타일리스트 / 이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