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면 쫓아가는 게 배우는 아닐텐데, 왜 그리 갔나 싶은 배우들이 방송 3사에서 방영중인 드라마에 있었다.
문재인(한가인), SBS <나쁜남자> 19금 사이의 15금. 한가인이 그렇다. 김남길-오연수-김재욱이 뿜어내는 분위기는 성적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고, 매 순간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를 만큼 위태롭다. 평범하게 산 여자를 연기하는 한가인이 그들 같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가 세 사람 사이에 들어가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았을 때, 그녀는 그들보다 더 욕망에 흔들리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재벌 2세를 유혹하려면 ‘내숭연기’ 가 아니라 시청자도 속일 만큼이어야 하고, 김남길처럼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분위기가 나와야 한다. 전작들에 비해 일상적인 표현은 좋아졌지만, 정석적인 미녀의 분위기는 떨치지 못했다.
김수연(김하늘), MBC <로드 넘버원> 김하늘은 좋은 배우다. SBS <온에어>, 영화 <6년째 연애중>, <7급 공무원> 등 최근작에서 김하늘의 연기는 모두 미모에 가려지지 않았다. 세 작품은 모두 남자 배우와의 조화와 조밀한 에피소드에 강점이 있었다. 하지만 <로드 넘버원>은 시작하자마자 남녀 주인공 사이에 걸쳐 있는 시간을 몇 년씩 건너뛰고, 곧바로 그들을 죽어도 못 잊는 연인으로 만든다. 작품의 허점이긴 하지만, 그때 필요한 건 디테일보다는 시청자를 순간적으로 몰입하게 만들 만큼 신을 장악하는 연기다. 김하늘은 캐릭터를 이해하든 이해 못하든 ‘미친 척’ 하고 세게 나갈 필요가 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비주얼까지 바꾸면 더 효과적일 거고.
이성모(박상민), SBS <자이언트> <자이언트>는 ‘자이언트’ 가 되려다 괴물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모두 시대의 거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는 괴물이 된다. 그중 이성모(박상민)는 가장 큰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헤어진 가족만 생각하면 눈물이 맺히지만, 그 가족을 찾으려고 국정원 요원이 돼 온갖 폭력을 저지른다. 그러나 박상민에게는 그런 균열이 없다. 민간인에게 총을 쏠 때도 폭력에 대한 고민 대신 강렬한 눈빛만 보일 뿐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협객 같은 무거운 분위기가 아니라 섬세한 감성이다. 그의 아역 김수현이 자신의 원수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순간 흔들리는 눈빛으로 캐릭터를 단번에 잡아낸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강명석( 기자)
이강모(이범수), SBS <자이언트> 60∼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히어로 사극의 남자 주인공은 대체로 고전적 스타일의 미남이었다. <영웅시대>의 차인표라거나 <야망과 세월> 의 유인촌, <에덴의 동쪽>의 송승헌 등등. 왜 안 그렇겠는가? 격동기에 극빈층으로 몰락했지만 타고난 머리와 용기로 이겨내고 결국엔 재계 거물로 성장해야 하는 주인공. 인생 대부분이 죽도록 고생하는 얘기라 칙칙한 세트에 초라한 패션은 필수이므로, 번듯한 외모와 젊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이언트>는 <유머 일번지>스러운 SBS의 사극 세트를 배경으로 이범수의 ‘리얼리티 있는’ 주름이 어우러지면서, 마치 개그 같다. 물론 2004년 <영웅시대>에서 정한용이 이등병으로 나와 사단장을 주름으로 제압하던 개그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정견비(배종옥), MBC <김수로> 담백한 말투에 단정하다 못해 단단한 연기 톤으로 일가를 이룬 배우라서 그런지, 아무리 사악한 포스를 발산해도 남에겐 폐 안 끼칠 것 같은 쿨함이 배종옥에겐 있다. 그녀가 누군가? 90년대에는 김수현 선생의 ‘아바타’ 로, 대시하는 남자에게 왜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지 ‘첫째, 둘째, 셋째…’ 로 일목요연 일갈하던 캐릭터다. 이후에는 노희경 작가의 페르소나로 인간은 절대 쿨해질 수 없다고 대사를 칠 정도의 쿨함을 성취했다. 아무리 화를 내고 있어도, 문득 “내가, 왜 이러지” 라고 자조하며 일상으로 돌아갈 것 같은 그녀에게, 조선까지는 몰라도 원초적 에너지로 들끓는 철기시대 악녀는 좀 과했다.
임바니(바니), MBC <볼수록 애교만점> 그래도 예상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귀여운 구석도 있고 일반인 특유의 서툰 연기에서 나오는 풋풋함도 있다. 하지만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에 집 나간 아버지 대신 딸 셋을 키운 어머니 슬하에서 된장녀가 될 만큼의 망나니 역할을 소화하기엔 2퍼센트 부족하다. 이런 캐릭터는 재수 없을 땐 가차없이 재수 없어야 하지만, 무너졌을 때는 모두의 동정을 살 만큼 불쌍해야 한다. 된장녀의 로맨스는 늘 이 무너지는 지점에서 시작되는데, 바니의 중산층 포스가 너무 강해서 동정심이 일어날 여지가 없는게 흠. 김성수, 예지원, 이규한, 최여진, 임하룡 등 다른 캐스팅이 발군이라 더욱 거슬린다.
박현정(전 <드라마틱> 편집장)
이현중(최수종), KBS <전우> <전우>는 문화적 다양성에 기여한다. <배달의 기수>의 향수에 젖어 있는 할아버지들의 여가를 책임진다. 주인공인 이현중 중사 역은 최수종이다. 그것이 이 드라마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한다면 지나칠까? 언젠가부터 ‘절대선’ 의 이미지로 고착된 그에게 자기 객관화가 결여된 ‘무조건적인 호소’ 의 역할은 좀처럼 피해가지도 않는다. 이번에도 그는 절대선 구현에 여념이 없지만, 카리스마가 필요하다는 지시가 따로 있었거나, 그 자신이 ‘카리스마 콘셉트’ 를 잡은 것 같다. 대사 전달이 어색할 정도로 한껏 목소리를 깔고 혼자만 짙은 눈 화장을 한다. 그렇게 카리스마는 겉치레로 탈바꿈한다. 혹은 비이성의 ‘불도저’ 가 카리스마라고 설득한다.
조민우(주상욱), SBS <자이언트> 중앙정보부 감찰부장 조필연의 아들이자 만보건설의 기획실장으로 출연한다. 조민우를 <그저 바라 보다가>의 김강모, <선덕여왕>의 월야로 바꾸어도 괜찮을 것이다. 미남 배우의 ‘영원한 2인자’ 계보를 이을 생각인지는 몰라도, <자이언트>를 보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 로 시작하는 이형기의 시라도 읽어주고 싶다. 극중, 아역에서 성인 연기자로 등장한 주상욱을 본 순간 조민우의 인물됨이 이미 나온다. 기시감을 익숙함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어디에서나 기대 수준이 정해진 ‘주인공과 대척하는 2인자’ 를 벗어나볼 필요가 있겠다. <국가가 부른다>에서 류진이 택한 차선책을 눈여겨볼 만하다.
구미호(한은정), KBS <구미호 여우누이뎐> 첫 방영 후 구미호 역의 배우가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구미호는 한은정이다. ‘파인 듯 빳빳한’ 볼과 바뀐 눈매 때문에, ‘건강 미인’ 한은정은 어딘가 희미해져 있었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에 나오는 뛰어난 두 아역 배우, 신신애와 김유정의 자연스러움과 생기가 한은정을 더욱 그렇게 보이게 했다. 이례적으로 ‘글래머’ 이미지의 배우가 구미호에 캐스팅됐으나, 딱히 새로운 구미호도, 딱한 운명을 감싸 안아주고픈 전통적인 여성상의 구미호도 아니었다. 그런 채, 구미호가 인간이 되려하는 것만큼 인간이 아름다워지고픈 욕구 또한 환기해 안쓰러웠다. 구미호가 아닌 한은정을 보게 된다. 그것이 한은정을 기용한 패착일지 모른다.
에디터/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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