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만의 인문 사회과학 분야 베스트셀러,<정의란 무엇인가> 신드롬이다. 그러나 판매 차트는 이 신드롬이 긍정적인지 어쩐진 말해주지 않았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골치 아픈 제목의 인문서가 출간 이후 하루 평균 1만 권씩 팔려나가고 있다. 인문서가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은 모처럼의 이변이다. 더구나 국내 인문시장에서 능동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20~30대 청년층과 여성들까지 대거 합세하고 있다니 또한 이변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책의 내용만큼이나 그 외연에 대한 분석들도 우후죽순이다.
광장을 서성이며 장대비깨나 맞아봤던 이들은 “시대가정의를 갈구하고 있다는 반증”이라 말하고, 출판가에서는 ‘하버드 브랜드’를 앞세운 출판사 마케팅이 주효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한편, 냉소적인 이들은 ‘편승효과bandwagon’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출판가의 사재기 악습이 증명하듯, ‘닥치고 돌파’하는 베스트셀러족의 실존 또한 엄연하니까.
시대의 반증이든 방증이든, 분명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미덕은 많다. 다분히 철학적이면서도 충분히 현실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콘텐츠일뿐더러, 인문서답지 않게 무엇보다 쉽고 친절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적절한 시점’에 ‘좋은’ 책이 ‘영민한마케팅’으로 성공했다. 그런데 정작 재미있는 건 이 책이 점하고 있는 ‘이념적 좌표’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공동체주의’를 내세워 이름을 얻은 인물이고, <정의란 무엇인가> 역시 그러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에 따르면, 행복과 자유의 주체라는 ‘독립된 개인’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산물일 뿐이고, 모든 인간은 ‘서사적 개인’이므로 저마다 공동체를 위해 미덕을 발휘해야만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마이클 샌델은 종종 집단주의자, 국가주의자라고 비난 받기도 한다. 일국(一國)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건강한 미국’만을 위한 철학이라는 뜻이다. 거미줄 같은 SNS를 타고 ‘진보’가 패션이 되는가 하면, ‘개인의 연대’가 더 이상 형용모순이 아닌 아우토노미아 Autonomia의 시대에, 아무리 정치적으로 올바르다손 ‘공동체주의’란 보수이자 퇴보가 아닐 수 없건만 이 땅의 독자들은 마이클 샌델을 기꺼이 진보의 텍스트로 읽으며 열광한다.
대통령의 휴가용 독서목록에 올랐느니 안 올랐느니, 재벌기업 경제 연구소들이 추천하는 ‘휴가철에 CEO가 읽어야 할 필독서’ 목록에 올랐느니 안 올랐느니 하는 논란이 그래서 생긴다. 말하자면 ‘이념적 점유권’의 문제다. 한국사회를 자가비판할 때 흔히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개념이 차용된다. 순차적으로 있어야 할 것들이, 동시대에 존재하면 어색할 가치들이 한데 뒤섞여 난립한다는 뜻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나라에서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수꼴과 좌빨이란 말들의 의미는 쓰는 사람 마음대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이색적인 베스트셀러가 그 외연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 책의 저자 같은 건강한 보수주의자를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이 사회의 가치 혼란이다. 한정수(칼럼니스트)
이 책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이 책의 인기가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인문서가 많이 팔리는 자체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지나친 것’은 뭔가 이상하다. 둘째는 그렇다면 이 책이 이토록 많이 팔리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나와 있는데, 대부분 엇비슷하다. 먼저 현 정치상황(구체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이 일반 독자로 하여금 ‘정의’에 관심을 갖도록 부추겼다는 견해다. 이는 책이 소비되는 쪽의 ‘외적 환경’에 무게를 둔다. 그런데 그와는 달리 어려운 주제를 쉽게 풀어내고 있는 이 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미덕인 ‘내적 요소’를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 둘의 중간적인 형태로 뛰어난 마케팅 (‘하버드’를 타이틀로 내건)을 문제 삼기도 한다.인기의 ‘과도함’에는 우연성이 개입되었을 수도 있다. 쉽게 말하면,<정의란 무엇인가>의 성공이 정의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금보다 더 불의가 행해지던 시절에도 정의에 관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이는 외적 환경과 베스트셀러 사이에 어떤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베스트셀러의 원인을 추적하다 보면, 결과론이라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뜻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사회 정의에 대한 일반적 논의를 하고 있는 책이라기 보다는 개별 사례들이 가진 문제점을 다루는 실용윤리학에 가까운 책이다. 불의를 저지르는 정부에 대한 비판과는 꽤 거리가 있다. 즉,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과 이 책을 연결시키는 사람은 결국 이 책을 읽지 않았거나, 그 의미를 과장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 책은 확실히 다른 철학서와 비교했을 때 읽기 어려운 책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읽기 쉬운 책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벤담, 밀과 칸트, 롤즈의 견해에 대한 검증이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하는 이 책은 어떻게 보면 매우 따분한 책이기도 하다. 유머가 전혀 없으며, 시종 심각한 어조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성공은 순전히 우연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는 것 같다. 성공 요인으로 두 가지를 들고 싶다. 첫째는 ‘시각적인’ 하버드 마케팅의 적중이다. 한국어판은 표지에 스펙터클한 강의사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사진은 다시 매 장마다 삽입되었다. 둘째는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사례들이다. 저자 마이클 샌델은 쉽게 판단하기 힘든 사례를 계속해서 끌어들여, 그것을 둘러싼 양쪽의 대립적 판단을하나하나 깨뜨린다. 여기서 발생하는 논리적 격파는 확실히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충분한 쾌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논리적 경쾌함에 지나치게 심취하다 보면, 그런 시원함이 많은 경우 도식적인 단순화에서 유래한다는 것과 저자 자신이 슬쩍 제시하는 공동체주의 역시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잊을 위험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례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매우 잘 보여주는 책이다. 조영일(문학평론가)
이등병 한 명이 적진에 고립되어 있다. 문제는 그의 형제들이 모두 전사자라는것. 사령부는 심각한 논의끝에 결론을 내린다. “가서 라이언을 구하라!”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줄거리다. 영화는 한 명을 구하기 위한 다수의 ‘고결한 희생’을 말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도 사회적 이익 차원에서 한 명의 죽음보다는 여러명의 죽음이 손실이 더 크지 않은가, 하는 의문은 끝나지 않는다. 이 난제를 해명하는 데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적절한 가이드북이다.
이 책의 미덕은 생생한 사례 중심이라는 점이다. 도무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딜레마가 자주 제시된다. 저자는 특유의 유머러스한 문체로 윤리적 난제의 혈맥을 잡아낸다.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작으로 칸트, 벤담, 밀, 롤스에 이르는 정치철학의 주요 개념과 맥락을 짚어준다.
그러나 그 설명이 결코 금석학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샌델은 고전 사상가를 인용하기보다는 미국의 보통시민들이라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매체들도 참고한다. 신문 칼럼, 텔레비전 뉴스, 정부 발표문 등을 통해 마이클 샌델은 정치철학의 핵심과제, 즉 ‘정의란 무엇인가’를 풀어낸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국과는 사뭇 양상이 다른 우리 사회에서 이 책의 어떤 주장들은 현실 타당성이 없다.
우리의 사회 정의, 복지, 인권 등은 미국의 상황에 미치지 못한다. 샌델은 이 책의 8장에서 고교 응원단에 속한 어느 장애인의 ‘차별’을 논한다. 이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는 장애인이 평범한 학교를 무난히 다니기도 어렵다. 이 책이 낙양의 지가를 올린 배경에는, 흡사 리오넬 메시와 같은 저자의 능란한 ‘드리블’과 더불어 결국 ‘정의’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우리 사회가 있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란 기본적으로 ‘유연한 우파 자유주의’에 해당하는 것이겠으나, 이 정도의 주장만으로도 우리 사회에서는 ‘좌빨’ 소리 들을수 있다. “우선 파이부터 키우자, 그리고 말이야…. 그걸 키운 사람부터 식탁에 앉기로 하지? ”하는 처절한 약육강식의 경쟁이 경제, 교육,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결핍이 이 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특히 교보문고를 비롯한 대형 서점의 판매 흐름 분석에 따르면, 우선 30대독자들이 이 책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 세대는 ‘정의’라는 관점에서 예민한 정치적 감각을 지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고용 불안, 취업 위기, 주식 및 부동산 시장의 혼란 등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더욱이 그 부분들의 경제 정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세대다.
마치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정의’에 대해 무지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여야의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휴가지에서 읽기로 작정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일부 정치 지도자들의 쇼맨십과 불안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에 온 가족의 삶을 건사해야 하는 젊은 ‘가장’들의 절박한 관심이 합쳐져 사상 유례 없는 인문 사회과학 서적의 베스트셀러 행진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정윤수(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