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걸그룹, 비슷한 오락 프로그램이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쏟아진다. 하지만 가장 지루한 순간에 가장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된다.
<무한도전>‘WM7’과 <남자의자격>의 ‘하모니’ 모든 프로레슬러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경기를 치른다. 모든 합창단은 끈끈한 팀워크가 생명이다. 하지만 어떤 레슬러나 합창단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WM7’과 ‘하모니’같은 감동을 줄 수는 없다. 부상을 숨긴 채 링 위에서 악역 노릇을 하며 야유를 받는 정준하가 애틋한 느낌을 주는 건 시청자가 지난 몇 년간 <무한도전>의 골칫거리였던 그의 역사를 알기 때문이다. <남자의 자격>에서 ‘넬라 판타지아’를 부르는 단원들의 모습이 감동적인 건 언제나 중년 직장인의 해보지 못한 꿈에 도전하던 <남자의 자격>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레슬러가 구토를 참으며 시합을 하는 건 단지 프로레슬링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장면이지만, 그걸 정형돈이 하면 대중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예능인들의 숙명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WM7’과 ‘하모니’는 예능도 고유의 미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출연자들에게 실제 역사를 부여하는 이 두 개의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같은 소재라도 다큐멘터리와 전혀 다른 맥락을 갖고, 같은 장면이라도 전혀 다른 해석을 낳는다. 이제 예능 프로그램도 영화처럼 컷 단위로 의미를 말할 수 있는 장르가 됐다. 다른 어떤 장르와도 차별적인 정체성도 가지게 됐다.
<슈퍼스타 K>와 리얼리티 쇼의 새로운 편집상금 2억 원을 걸고 벌이는 음악 오디션 리얼리티 쇼인<슈퍼스타K>는 한없이 이기적이다. 시청자에게 주목 받는 캐릭터는 끊임없이 나오고, 그렇지 않은 캐릭터는 오디션 합격 여부에 상관없이 얼굴조차 잘 보여주지 않는다.게다가 특정 출연자는 쇼의 시작부터 합격과 불합격 여부를 알리고, 그가 몰락하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준 뒤 예상못한 반전을 선사한다. 시청자들은 이 무례하고 사악한 프로그램을 비난한다. 하지만 그들은 쇼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미 시청률은 케이블 TV의 꿈의 수치인 10퍼센트를 넘긴 지 오래다. 기존의 한국형 리얼리티 쇼는 실제 시간의 흐름을 지켰고, 출연자들 분량의 비중은 어느 정도 맞춰줬다. 그러나 <슈퍼스타K>는 공들인 편집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캐릭터와 스토리라인을 부각시킨다. <슈퍼스타K>에서 벌어지는 상황 자체는 리얼일지 몰라도, 제작진이 보여주려는 건 캐릭터가 잘 살아 있는 한 편의 드라마다.그래서 <슈퍼스타K>는 리얼리티 쇼의 전제를 뒤집으면서, 역설적으로 리얼리티 쇼가 탄생한 이유에 가장 부합하는 프로그램이다. 사람들은 리얼리티 쇼에서 출연자들이잘되는 걸 보려고 시청하는 게 아니다. <슈퍼스타K>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몰입도가 강한 드라마다.
2NE1의 복귀 무대와 걸 그룹의 시즌2나인뮤지스는 키가 170센티미터 이상인 멤버만 모았고, GP베이직은 초등학생 멤버들을 포함시켜 평균연령이가장 어린 걸그룹을 콘셉트로 정했다. 한마디로 걸그룹은 지금 끝물이다. 대형 기획사의 걸그룹은 일본에서 업그레이드 기회를 노리고, 나머지는 그들의 전략을 반복할 뿐이다. 새로운 노래가 나올 때마다 (의상으로만 전달되는) 나름의 콘셉트를 만들고, 오락 프로그램에서 재롱잔치를 연다. 지난 9월 12일 SBS <인기가요>에서 보여준 2NE1의 복귀무대는 이런 상황에 대한 영민한 해답이다. 그들은 노출도, 특정 신체 부위를 강조하는 춤도 추지 않았다. 대신 댄서들을 클러버로 설정한‘Go away’는 잘 나가는 클럽의 분위기를 연출했고 ‘, 박수쳐’는 멤버 네 명과 댄서가하나의 큰 그림을 만들어냈다. ‘Can’t nobody’는 블랙을 배경으로 한 강한 원색 의상으로 압도한다. 2NE1은 대중에게 웃으며 쉽고 단순하게 다가서는 대신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그들의 스타일을 제시했다. 그건 걸그룹이 거리의 트렌드를 제시하고, 10~20대 여성의 시장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의 최신 버전이다. 2NE1의 (음원이 아닌) 무대가받아들여진다면, 걸그룹은 빅뱅 이후 남자 아이돌처럼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제빵왕 김탁구>와 시대가 제거된 시대극 <제빵왕 김탁구>는 시대를 알 수 없는 시대극이다. 정확한 시대를 묘사하는 아이템 없이 학생운동, 구형 자동차,고전적인 분위기의 저택 등‘복고’의 이미지만 차용한다.<제빵왕 김탁구>의 목적은 특정 시대의 묘사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 전체를 한 가지 관점으로 바라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김탁구(윤시윤)는 개발 시대의 이상적인 리더다. 아버지(전광렬)의 대를 이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빵을 만들고 싶어 하고, 정상적인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노력과 재능, 직원들과 같이 쪼그려 앉아 식사를 하는 친서민적인 품성을 가졌다. <제빵왕 김탁구>의 엄청나게 빠른 전개와 극단적인 스토리가 그럭저럭 납득되는 건 이런 형식 자체가 개발 시대의 정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가진 것 없는 고아도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판타지가 지배하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그래서 몇 년씩 시간을 건너뛰어 김탁구가 제빵 실력을 ‘쌓았다 치고’ 드라마가 전개될 수 있다. <제빵왕 김탁구>는 복고가 된 줄 알았던 개발 시대논리를 그에 어울리는 형식과 함께 되살렸다. 그리고 시청자들의 50퍼센트가 <제빵왕 김탁구>를 시청했다. 시대가 제거된 시대극, 또는 과거의 시대관을 판타지로 바꾼 시대극 같은 오락물. 우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던 시대극의 종말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유세윤의 세상을 상대로 한 상황극유세윤은 더 이상 <개그콘서트>에 출연하지 않는다.하지만 그는 <개그콘서트>의 어떤 개그맨보다 개그의 역사를 바꿔 나가고 있다. 그가 결성한 듀오 UV의 ‘쿨하지 못해 미안해’는 재미있는 헤프닝이었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페이크 다큐 <UV 신드롬>과 그와 관련된 일련의 활동은 더 이상 장난이 아니다. 유세윤은 UV라는 이름 아래 홈쇼핑에서 그들의 CD를 팔고, 고등학교 방송반에 찾아가 토크쇼를 진행했다. 그들의 행동은 1차적으로 뮤지션들의 면면을 패러디하는 콩트지만, 실제 현실을 상대로 개그가 진행되면서 현실에도 영향을 준다. 누가 뭐라 하든 유세윤은 실제로 법원 앞에서 ‘아이돌 자유연애법’을 주장했고, 한 시상식에서 은퇴선언을 하는 헤프닝을 일으켰다. <뜨거운 형제들>이 제작진이 정해놓은 울타리 안에서만 상황극을 펼친다면, 유세윤은 세상을 상대로 상황극을 한다.결국 그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바꾸고 개그의 정의 자체를 바꿨다. 개그맨은 더 이상 <개그콘서트>만을 바라보거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버라이어티쇼에 진출하지 않아도 된다. 개그맨은 다시 거리의 광대가 되어 자신만의 개그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유세윤은 최고의 예능인은 아니다. 하지만 유세윤은 예능의 패러다임을 바꾼 천재일지도 모른다.
- 에디터
- 강명석(기자)
- 포토그래퍼
- GETTY IMAGE/MULTIBI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