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의 거짓말>에서, KBS 기자 최경영은 초자본가 워렌버핏의 상식보다 못한 한국 언론의 상식에 대해 물었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프레임’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부시 대통령은 ‘세금 구제’라는 말을 써서 세금은 고통이며 그걸 없애는 사람은 영웅이라는 프레임을 가졌고, 성공적으로 대중을 기만할 수 있었다. 최경영 기자는‘노동자’라는 단어에 대해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시위대 때문에 교통이 정체되면 시민들은 노동자를 떠올리지 근로자나 직장인을 떠올리지 않는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정치인의 대중 기만을 문제 삼았다면, <9시의 거짓말>은 언론의 대중 기만에 주목한다. 최경영이 이미 파헤친 객관성, 사명감, 권력감시 기능 등 언론을 수식하는 당연한 말들을 한번 더 곱씹어봤다. 격려와 박수는 의심으로 대신했다.
당신의 지난 경력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언론 내부 고발에 대한 책으로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치부를 드러내는 게 이 책의 목적으로 읽히진 않았다. 어떻게 수식되길 바라나?
책을 낸 뒤 독자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구글을 통해서 가끔 트위터를 본다. 김두식 경북대 교수(<불편해도 괜찮아>의 저자)가 내 책을 읽고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평했다. “최경영<9시의 거짓말>의 미덕. 언론 비판하는 책은 대개 비분강 개형이 많은데, 이 책은 주식, 워렌 버핏하고 한국 언론의 현실을 절묘하게 엮었기 때문에 자기계발서적 좋아하는 분들도 친근하게 읽을 수 있어요.”언론 비판은 책의 내용이고, 워렌 버핏은 책의 형식이다. 그런데 가끔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버핏의 상징은 ‘돈’이고 언론은 일종의 ‘문화’다. 하버마스의 책 <공론장의 구조변동>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제레미 벤담은 애덤 스미스를 빼고는 생각 할 수 없었다.” 언론이라는 공적인 영역과 자본주의를 통한 개인의 부 축적은 따로 국밥이 아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비빔밥과 같은 것이다. 특히 현대 언론의 모습은 이 둘을 함께 우려낸 곰탕 같은 것이다. 내 책은 이질적 요소들의 짬뽕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둘의 운명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론인들은 사람들이 건강과 재테크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이 ‘개인적’건강과 ‘개인적’재테크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게 과연 태생적인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문화적으로 공고화된 것인가? 나는 그것이 역사적-문화적으로 공고화된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고칠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버핏을 끌어들인 것은 ‘개인적 재테크’를 공익적 방향으로 풀어보려고 한 나의 실험이었다.
<9시의 거짓말>에서 일부 언론의 사명감 충실한 기자들의 이야기는 배제했다고 밝혔다. 왜였을까?
이건 마치 내가 탐사 보도를 하면서 정부나 기업을 비판할 때 관계자들이 ‘왜 우리의 좋은 이야기는 실리지 않는 겁니까? 우리 이런 좋은 일도 했어요!’라고 강변하는 것 같다. 항상 50대 50이어야 객관인가? 자유 민주 언론의 기본 개념은 ‘자유로운 사고들의 시장 Market Place of Idea’이다. 한 그릇에 모든 것을 담을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 자칫하다간 권위주의로 흐르기 십상이다.
사실과 의견의 혼재는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의식이다. 이는 취재가 부족하다거나 특정한 목적으로 쓰여짐으로써 드러날 수도 있지만, 문장력 자체의 문제도 있다. 사명감이나 주체성과는 별도로 언론인의 자질이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언론인의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과거, 속보나 사실 전달의 역할자에서 언론인의 기능은 해석과 관점의 안내자로 점차 바뀌어간다. 글쓰기 방식도 전통적인 역피라미드 방식에서 구술식으로 변하고 있다. 기능과 전달 방식이 바뀌면 그에 따른 자질도 바뀌기 마련이다. 이는 시장의 요구다. 거역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를테면, 트위터에서 이름을 날리는 <시사인> 고재열 기자의 장점을 같은 맥락에서 주목한다.
버핏과 한국 언론의 대비가 효과적이기는 하나, 속성상 다른 점도 있다. 버핏이 이윤 추구를 말하면 결점이 되지 않지만, 언론이 그렇게 하는 건 직무유기 같다. 언론이 신뢰재이면서 동시에 이윤 추구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보나?
찾고 있다. 1800년대 신문의 역사에서, 1920년대 라디오의 역사에서, 1930년대 텔레비전의 역사에서 찾고 있다. 각기 다른 길을 선택한 유럽과 미국의 역사가 그렇게 흐르게 된 ‘결정적 시기 Constitutive Phase’에 영향을 미친 여러 요소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냉소주의를 거둬들이면 길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가치의 우선순위를 ‘우리 회사’에 두는 것으로, 기자를 ‘회사원’이라 정의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지나칠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회사원이 아닌 장인이 얼마나 되느냐는 말이다. 이러한 변명을 감안해도, 언론인의 사명은 회사원보다 더 막중하다고 볼 수 있을까?
도발적인 질문이다. “당연히 언론인의 사명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회사원보다 막중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은 꼭 그런 모습이 아니다. 가령 제약회사의 연구원이 일을 잘못하거나, 의사가 환자를 잘못 다루면 그 사회적 해악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사명은 현실이 아니라 도덕이다. 규범이다. 또한 그건 그들(나를 포함한)의 자부심이다. 직업에 대한 긍지다. 중앙대에서 취재보도론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한국의 많은 ‘구악 기자’들처럼 기자 생활을 할 것이라면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 이만큼 돈 주는 직장 많다. 왜 하려 하는가? 폼나 보이나? 멋있어 보이나? 그 폼이 뭔가? 멋이 뭔가? 언론인으로서의 진정한 멋을 원한다면 그만큼 책임과 의무도 감당해야 한다. 그 책임과 의무는 여러분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삼켜라. 그게 멋이다. 그게 폼이다. 어쩌면 그건 혼자만의 마스터베이션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쩌나? 언론인은 그 맛에 사는 것이다. 조직에 충성해서 돈 많이 버는 것이 자신이 꿈꾸는 삶이라면 굳이 언론인을 택할 필요가 없다.
시민이 주체인 언론, 인터넷 매체가 구매체의 대안일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가 미국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고 했지만, 한국의 경우 소위 ‘낚는다’고 표현하는 ‘찌라시’뉴스는 인터넷 매체에서 가장 만연하다.
나는 대안이 아니라 이들이 곧 주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이 언제일지는 모르겠다. 한국의 경우 반동의 힘이 강할 수도 있다. 인터넷의 부작용은 기존 매체들이 갖는 부작용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라디오가 처음 생겨날 때, 텔레비전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부작용에 관한 걱정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주류다. 왜?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종국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이, 즉 소비자가 원했기 때문이다. 다만 경계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항상 자본 집중화 현상이 나타났고, 이 집중화 현상에 따라 민주주의가 오히려 역행하는 부작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게 가장 큰 부작용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항상 두 손을 함께 잡고 나란히 걸어가지 않는다. 이들을 함께 걸어가게 하고픈 것이 많은 사람의 바람 아니겠는가?
기사의 질 이전에 대중이 정치 경제 뉴스를 아예 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당신이 문제제기를 한 부분보다 더 근본적일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매우 타당한 지적이다. 이게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다. 저널리즘의 기본요소를 쓴 빌 코박에 따르면, 언론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대중에게 의미 있는 사안을 흥미롭게 포장하는 것이다. 내가 언론 비판(의미 있는 사안)을 하면서 워렌 버핏을 끌어들인(흥미롭게 포장) 것도 이 때문이다. 성공이었는지 실패였는지는 시장이 판단할 것이다.
당신은 이 책에서 객관의 불가능을 살핀다. 그러나 망령일지언정 기자가 ‘객관성’에 기대지 않고 버핏처럼 주관적 의견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자가 버핏처럼 독립적인 개인으로 발언할 수는 없지 않을까? 또한 투자자 가운데서도 버핏 같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은 그처럼 주체적인 판단력을 성취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일이라는 걸 반증하는 건 아닐까?
객관이 무엇이냐고 되묻지는 않겠다.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렇게 물어보자? 편견은 무엇인가? 우리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아무도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편견이라는 단어대신 관점을 선호한다. 관점은 객관이라는 절대적 개념에 비해 상대적이다. 일견 너그러워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관점이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객관이 정이라면 주관적 관점은 반이다. 언론인은 정과 반을 넘어 합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과연 합에 이를 수 있을까? 없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그들은 욕을 먹게 될 운명이다. 모든 가치판단을 하는 직업들이 다 그렇다. 판사가 그렇고, 정치인들이 그렇다. 그러나 욕먹는 것이 두려워 판단을 하지 않겠다면(즉, 받아쓰기 저널리즘만 고수하겠다면) 역시 기자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버핏 같은 투자자가 극히 드문 것처럼 제대로 된 언론인도 극히 드물다. 하지만 버핏처럼 되고 싶어 하는 투자자들은 세상에 많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언론인이 되고 싶어 하는 기자도 아직 한국에는 많다. 역설이고 모순이다. 하지만 이 또한 사실이다.
전체적인 개선 가능성이 희박한 지적이라는 점이 걸린다. 당신은 기자들의 취재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문제점을 언급한다. 그러나 시행착오와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 환경이 있고, 그에 따라 전화통화 등의 취재 방식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당신은 그렇게 변명하는 기자에게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
일상으로부터의 모순이라고 한다. 참 고치기 힘들다. 그런데 고치려는 시도들이 없는 건 아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있어 왔고 지금도 개혁적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짧게 보면 정말 성취하기 힘든 지리한 일상의 연장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우린 60년 만에 법적 민주화를 쟁취해냈고 기적 같은 경제성장도 이뤘다. 수백 년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역사를 향유하는 미국, 영국 등 선진국도 나름의 모순에서 고민한다. 꼭 안 된다고 생각할 것 없다. 냉소만 했다면 우린 여전히 조선왕조의 상놈일지 모른다.
- 에디터
- 정우영, 아트에디터/이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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