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 동안 이강모로 살았다. 이제, 이범수에겐 자신만의 세리머니를 즐길 수 있는 짧은 시간이 생겼다.
<자이언트>에서 당신의 연기에 스스로 A+를 주고 싶다는 말이 그래서 좋게 들렸다. 다들 겸손하기 바쁘니까. 그래서, 스스로에게 선물은 줬나?
마지막 촬영이 일산 세트장이었는데,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점심때 끝났다. 나는 끝까지 있었다. 난 여기 지킴이니까, 혼자 남았을 때의 희열도 있었다. 감독님이 “자, 이 신이 우리 <자이언트> 3만 8천 컷 중에 마지막이다!” 우스개로 그럴 때 눈물이 핑 돌았다. 모두와 작별한 다음에 방송국을 한 바퀴 돌았다.
무슨 생각을 했나?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조연이 못해서 망하는 경우는 없다. 주연은 입장이 다르다. 사명감이 있다. <자이언트>, ‘원톱’ 주인공. 한 사람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다. 김명민 씨가 거절했던 역할이라는 얘기가 언론에 이미 나왔다. 그럼 ‘김명민이 해야 하는 건데, 이범수가 해가지고 그럴 줄 알았어’ 그런 얘기를 누가 듣고 싶겠나. 부담이 왜 없었겠나. 막 승부욕이 나는 거다. 그만큼 꼼꼼하게 하자 없이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는 거다. 다른 역할들, 죽자 사자 한 놈만 물고 늘어지면 된다. 조필연은 악독한 인물이니까 뭔지 모를 때는 그냥 지랄 맞은 거 하나만 찍으면 된다. 높은 도만 치는 건 쉽다. 장조, 단조, 반음 올리고 내리고 막 이러는 게 들어가면 계산이 복잡해진다. 강모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족들끼리의 따뜻함을 보일 때, “이범수는 힘있게 휘몰아치는 걸 왜 안해? 못하나 봐” 그건 합당치 않다는 거다.
그 감상들이, 당신이 스스로에게 준 선물이었나?
아까 처음에 ‘이범수는 까탈 맞을 거다’라는 말은 나도 종종 듣는다. 듣기 싫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시는 분들은 이유가 있을 거다. 그럼 그분들은 나를 언제 겪어봤다고 그러시는 거지? 라고 반문했다. 늘 일할 때 겪은 거 아닌가? 일하지 않는 이범수는 겪어본 적이 없는 거다. 일할 때는 오차 없는 베스트를 끌어 올려야 하니까 그런 행동들이 나오는 거고. 일하지 않을 때는 가야금 풀어놓듯이 빈둥거리는 걸 좋아한다. 여기서 빈둥이라는 건 상당히 ‘릴렉스’한 순간이다.
2009년엔 영화만 세 편, 2008년엔 영화 두 편과 드라마 한 편을 찍었다. 당신이 빈둥댈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었나?
어느 작품 마치고 집에 있다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편의점에 갔다. 스무 개를 샀다. 하나를 까서 이렇게 깨물면서, 비닐봉투 빙빙 돌리면서 어기적 어기적 걸을 때. 오늘 뭐 하지? 아!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럴 수 있다는 거.
페라리를 탄단 얘기를 듣고, 뻑적지근하게 쇼핑하는 타입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 웃긴다. 그런 면이 있고 저런 면이 있다.
이미 페라리가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닌가? 진짜 수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그게 여유가 아닐 거다.
재밌는 말이다. 이런 생각도 해봤다. 정말 지존은, 저 사람이 롤렉스를 차서 멋진 게 아니라, 플라스틱 장난감을 차고 있어도 시계가 멋지고 뭐 그렇다는 거. 내가 추구하는 건 물질적인 게 아니다. 확신이 있다. 목사님, 스님이 카르티에를 차고 있어서 존경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분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이유는 나 같지 않아서다. 내가 지향하고 있는 것을 한 단계 뛰어넘어 있다는 거다. 그래서 박수 받는 거다. 배우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배우가 좋은 옷을 입고 페라리를 타고 프라다를 입어서 박수 받는 게 아니다. 그건 재벌 3세만 돼도 할 수 있다.
속도를 즐기나?
한… 시속 180킬로미터까지 밟아봤나?
아, 그건 페라리가 아깝다.
맞다. 이건 뭐 달리려고 태어난 차라서, 달리려고 들면 달리는데…. 그럴 때 제임스 딘 생각도 나고 그런다.
그러다 죽을까 봐 두려운 건가?
호사다마라는 말을 자주 한다. 목마른 사람한테 물컵에 나뭇잎 띄워 주듯이. 항상 한 템포 쉬어간다. 걸음마 배울 때, 한 번도 넘어져본 적 없다.
대학에서 받았던 환호와 TV에서 스타가 됐을 때의 환호가, 규모를 제외하면 어떻게 다른가?
무명 때,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탯줄을 끊자.’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나왔으니까, 그 언저리에서 돌지 말자는 거였다. 나약해 보이니까. 자꾸 뭐 좀 얻어먹으려고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럼 너는 산골짜기 도공이 되고 싶은 거냐, 마이클 잭슨 같은 화려함이 갖고 싶은 거냐를 생각했다. 그럴 때 솔직해야 한다. 솔직하지 않는 순간, 삐그덕거리게 돼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거다. 연극하면서 연극의 순수를 알았다. 동경했다. 훌륭한 건 맞는데, 전부는 아니다. 내가 지향하는 건 이쪽의 화려함이다. 스포트라이트, 선글라스, 환호 그런 거. 아니, 배우는 그런 거 있어야 한다. 없다면 바보다. 그거 사기다. 배우는 주목받고 튀고 싶어 하고 멋을 내고 싶은 동물이다. 그걸 다 초월한 것처럼 얘기하는 것도 나는 분명히 예술적인 사치라고 생각한다.
이강모가 말했다. “모든 걸 다 가졌지만 결국 가진 게 없었다.” 공감하나?
못한다.
뭐가 더 갖고 싶나? 굉장히 세속적인 것부터, 세간에서 숭고하다고 하는 것들까지.
참 포괄적인다. 일단은…. 건물을 하나 갖고 싶다. 지어 올리든 사든. 건물이라는 것엔 상징이 있다. 물론 안정적인 생활도 가능하겠지. 차는 이거 가지면 더 이상은 없을 것 같은데, 또 안 그렇더라. 최신 차를 사도 몇 년 지나면 ‘뉴’가 나온다. 그걸 사면 또 다른 ‘뉴’가 나온다. 그건 그렇고. 궁극적인 것은, 폴 뉴먼인가 로버트 레드포드가 포도 농장을 사서 거기서 생산되는 포도로 주스든 뭐든 만들어서 좋은 일에 쓴다는 얘기를 들었다. 감명 깊었다. 목돈을 기부하는 것도 좋지만. 그건 끊임없이 회전하는 거니까.
뭘 기를 건가? 포도 하면 영동 포도다.
구체적으로 생각 안 해봤다. 이 세상은 분명 더불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내 직업이 화려하다는 생각도 한다. 그걸 즐기는 거고. 하지만 영원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원할 필요도 없다. 골 세리머니는 10초에 끝나니까 빛을 발한다. 그걸 한 20시간 하면 그게 빛나겠나? 길에 나가면 사람들이 “우와!” 막 그런다. 3개월 지나면 좀 시들해진다. 그러다 6개월 지나면 ‘아… 뭐. 아, 그… 이범수 씨?’ 그 정도다. <외과의사 봉달희> <온에어> 두 번 다 그랬다. 이번도 그럴 거다. 그것도 세리머니를 즐기는 순간이지만…. 진짜인 줄 알고 ‘오버’하면 정신 못 차리는 사람 되는 거지.
내일, 신혼여행을 간다 들었다.
태국으로 간다. 멀리, 정말 멀리멀리 한 달쯤 가고 싶은데. 아직 그렇게는 안 된다. 아직은 휴식이 아니다. 인터뷰, 행사, 연말 시상식이 촘촘히 있다. 1월쫌 돼야 완전히 자유로울 것 같다.
계획은 있나?
나는 태국이라는 것만 안다. 나머지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정했다. 여행갈 땐 항상 만화책을 몇십 권 가져간다. 헌책방에서 노끈으로 묶인 걸 한 질 사뒀다. 책도 몇 권 가져간다. 요즘은 <조선왕조실록>이 무척 재밌다. 연산군까지 읽었다.
- 에디터
- 정우성
- 포토그래퍼
- 김보성
- 스탭
- 메이크업/ 이가빈(포레스타), 헤어/ 영석(포레스타), 스타일리스트/ 김봉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