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겨우 10년

2011.02.25이충걸

E.L.
공항에서 지연되는 시간을 견디는 것만큼 애매하게 지치는 일도 없습니다. 공항이란, 촉박하게 시계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위한 성지聖地라서, 자칫하면 시계를 사고 마는 아주 위험한 곳이기도 하지만요. 한편, 비행기를 타고 날짜변경선을 넘나들 때마다 시간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제멋대로인지 허파꽈리까지 파고듭니다. 정해진 시간 속에서 하루를 빼먹거나, 똑같은 날을 두 번 겪을 수 있다니.

우리는 대체로 전형적인 속도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빠르건 느리건, 일생 동안 허용된 에너지와 운동 상태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시간은 개인에겐 전혀 다른 감각으로 육박해갑니다. 각자 직관적으로 느끼는 존속 기간과, 그 기간을 채우는 미세한 사건에 대한 감각은 무시무시하게 차이가 납니다. 누구에겐 시간이 난폭하고 빠르지만, 다른 이에겐 얼어붙어 미동도 없는 듯 느껴집니다. 시간에 대한 각자의 판단과 인지 속도는, 주어진 시간 단위 안에 얼마나 많은 사건을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 초에 만 개나 되는 각각 다른 사건을 겪는다 칩시다. 그처럼 여러 장면을 동시에 그러쥘 수 있다면, 유기체의 움직임은 감각으로 인지하기엔 너무 느려서 육안으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가정을 뒤집어서, 제한된 시간 안에 감각의 천분의 일만 사용한다고 해봅시다. 그럼 천 배의 시간을 더 살게 되겠지만, 겨울과 여름의 변화는 30분도 안 돼 일어날 것입니다. 해마다 자라는 떨기나무는 쉬지 않고 끓어오르는 샘처럼 땅 위로 자라나고 떨어지길 반복하겠지요. 태양은 하늘을 가로지르며 지나간 자리에 유성처럼 길게 불타는 꼬리를 남길 테고요.

어떤 때, <GQ KOREA>의 10년 또한 시간이 천 배 정도 짧아져 휙, 발진처럼 지나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땐 주어진 시간 동안 감각의 천분의 일만 쓴 듯 초포화 상태로 육박해옵니다. 어쨌든, 쇳덩이가 매달린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공항 검색대를 통과해온 기분이군요. 가해자인 채 법정에 앉아, 싸구려 향수 냄새 작살인 고지혈증 변호사 아저씨가 나를 째려보고, 머리를 뒤로 바짝 묶은 여검사가 심문을 하는 듯한 강박도 익숙합니다. 배심원으로서의 독자는 내 의도와 가까울 수도 멀 수도 있고, 내 진실과 부합되기도 아니기도 하니까요.

확실히, 현대 남성성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과 그것에 관한 저널리즘은 시간이 걸리고 더 연구해야 할 주제입니다. 다양성이 늘 삶의 양념은 아니지만,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에 스스로의 남성성을 정립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왕년엔 긍정적이었던 빡센 남성적 캐릭터는 여전히 공존하기도 하고요. 그 소요 사이에서, 제 자신에게 네가 지큐냐고 물어봐도, 방금 그 질문을 뺀 나머지 답만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디어 하나가 당신의 경험을 바꿀 순 없습니다. 잡지 ‘따위’가 과학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땅을 보는 농부의 관심이 부동산 업자와 다르듯이, 우리는 세상을 보는 관점의 매개체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정체성이, 누군가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특성의 집합적인 면모라면, 지큐의 정체성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남자 됨을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발견과 같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챕터로 나뉜 채 순차적으로 기록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터닝 포인트로 새날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건 이룬 것이 적은 지큐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흐름이 어떻게 느껴지건 정해진 날은 변함이 없고, 항상 그랬듯 매 분, 매 시간 똑같은 간격으로 시간이 지날 것입니다. 약속하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 지금이 창간 때 마음과 같듯이, 창간 100주년 기념호 때도 여일하리라는 것뿐입니다. 고맙습니다.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