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걔랑 하지 말고 나랑 해

2011.08.24유지성

나랑 해. 걔랑 하지 말고 나랑 해.

선풍기가 돌 때마다 감자칩이 담긴 은색 접시가 날개를 털 듯 탈탈거렸다. 이 집에 사람들이 모이게 된 건 지난 크리스마스 파티부터였던가? 파티의 주인인 A는 일러스트레이터다. 여기는 그의 작업실이자 집. 벽엔 그림이 가득했고, 정밀하기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종류였다. 천장엔 형광등 대신 어두운 백열등을 달았다. 방을 쪼개 침대를 놓은 곳엔 커튼을 쳐놓았는데, 요란한 페이즐리 패턴이었다. 좀 있으면 오늘 만난 남녀가 손잡고 커튼 안으로 들어가기도 할 테지. 낙타가 걸어 나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 이 방으로, 매달 마지막 토요일이면 누가 부르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였다. 오늘은 남자들이 먼저 도착했다. 저녁 9시. 남자만 일곱, 여자는 아직 없다. 플라스틱 술잔과 구겨진 에너지 드링크가 바닥에 뒹굴었다. 태권도부나 역도부 MT에 온 것 같은 광경. 눈치 보거나 잘 보일 여자도 없으니, 못할 말도 없었다.

“이거, 맥주랑 섞어 마시면 세 번 해도 안 죽는다는데?”

“그럼 난 두 잔.”

“일없다. 집에나 가라.”

왁자지껄하게 떠들다가도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모두 침묵했다. 이번엔 여자인가? 쳐다보는 건 모두였으니, 말이 끊겨도 누구 하나 기분나빠할 사람은 없었다. 남자들끼리, 방 안에서, 술만 마시며, 동그랗게 둘러앉아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열두 시. 이제 일요일. 남자 둘이 조용히 짐을 챙겨 빠져나갔다. 길만 건너면 홍대다. 그 쪽은 좀 더 토요일에 가까울 것이다.

여자들이 오긴 올까? 누가, 언제? 발톱도 단정히 자르고 왔는데…. A는 느긋하다. 홀로 사는 프리랜서에겐 별로 아쉬울 게 없었다. 평일도 주말이고, 주말도 평일 같겠지. 나머지 셋은 모두 월요일에 출근한다. 몸이 달았다. 상상력은 알코올의 양과 비례했다. 클럽에라도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주말 밤을 이렇게 날릴 순 없다.

“땡!”

엘리베이터 종 소리가 자동차 경적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발걸음은 말발굽 소리 같았다. 문이 열렸다. 드디어, 여자가 들어왔다. 그것도 혼자. A의 친구라고 했다. 여자는 A의 옆에 앉았다. 그 옆엔, 오늘 처음 본 B가 있었다. 한 살 어린, 대기업에 다니는 뮤지션이라고 했다. A가 모두에게 여자를 소개했다.

“인사해. 동갑이고, 이 근처 살아.”

근처와 살아 사이엔 ‘혼자’가 생략되어 있을까? 짧은 반바지에 좀 끈끈한 머리. 바로 침대에 누워도 이상할 게 없는 옷차림. 모두가 가고 나면, A와 여자가 저 커튼 뒤로 들어가는 상상. 어쩌면 어젯밤에 이미 그랬을지도 모른다.

앉은 자리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반쯤 돌리면 가까스로 여자의 무릎이 보였다. 멀다. 가제트가 아닌 이상 손도 못 잡을 거리. 반면 여자의 몸은 자기장 역할을 하는 건지, 여자를 사이에 두고 A와 B는 점점 가까워졌다. 지금 자리에선 승산이 없다. 누가 더 올 것 같지도 않다. 에너지 드링크는 왜 마신 걸까. 집에 갈까? 휴대전화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며 남은 맥주를 비웠다. 근처에 사는 여자 몇 명쯤은 알고 있다.

B는 적극적이었다. 모기 소리가 선명히 들릴 정도로 조용했지만, 굳이 귓속말을 건넸다. 얼마나 작게 말하는지 여자의 무릎이 점점 B가 앉은 방향으로 콤파스처럼 회전했다. B가 입을 열 때마다 여자의 어깨가 내려갔다. 목이 넓은 티셔츠 사이로 쇄골이 보였다. 그만, 그만 기울여. 이제 저 녀석은 눈동자만 내리면 가슴골을 보겠지.

“형, 담배 피우고 올래요?”

실컷 여자와 얘기하던 B가 말했다. 안 나갈 이유가 없었다. 들어갈 땐 자리를 바꿔 앉는다는 계획. 문 쪽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 누나 진짜 괜찮지 않아요?”

선수를 빼앗겼다. 친한 친구라면 ‘퍽이나’ 쯤으로 맞섰겠지만, 아직 그 정도로 막역한 사이는 아니다.

“맘에 들어?”

“도와줘요, 형.”

문은 먼저 열었지만 B의 자리를 빼앗진 않았다. 대신 좀 더 가까이 앉았다. 도와달라고 했으니까. 여전히 여자의 왼쪽엔 A, 오른쪽엔 B가 있었다. 여럿이 둘러앉았던 원이 부채꼴 모양으로 쪼개졌다.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 걸까. 딱 할증 풀릴 때까지만이다.

“이 친구 코가 잘생겼죠? 음악도 한대요.”

맘에도 없는 소리. 여자의 태도는 평등했다. B가 말할 때도, 내가 이야기할 때도, 부채꼴 밖의 누가 끼어들 때도 똑같이 웃었다. 여자의 엉덩이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면으로 된 짧은 반바지가 말려 올라갔다. B의 손이 A의 넓적한 허벅지 밑으로 들어갔을 때, 여자의 눈이 게슴츠레해지는 게 보였다. 여자는 굳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B는 갈수록 과감해졌다. 저건 귓속말인지, 키스인지.

“파하하하하.”

무슨 말인지 들을 순 없었지만, 여자가 웃으며 B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물컹한 B의 팔이 세로로 넓적해졌다. 차라리 두부를 주무르지. B와 여자의 사이엔 더 이상 거리가 없었다. 이 여자, 취했나?

“이거 먹어도 돼요?”

내 앞에 하나 남은 과자를 두고 여자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엉덩이로 바닥을 밀고 앞으로 나왔다. 여자의 무릎이 접혔다. 종아리가 긴 다리. 코 위엔 점이 있다. 귀는 오른쪽 두 개, 왼쪽 하나, 합해서 세 개 뚫었다. 가까이 보니 양보하기 싫은 얼굴.

“건배.”

뾰족하게 접어 앉은 다리를 인어처럼 펴며 여자가 몸을 틀었다. 이쪽으로 오나? B의 손은 여전히 여자의 종아리 위에 있었지만, 버티고 있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했다. 손가락 세 마디, 두 마디, 한 마디, 미끄덩. 이젠 손끝만 간신히 남았다. 엉거주춤해진 B는 여자를 따라 움직이는 대신 기타를 잡았다. 승부수다. C코드, G코드, Am코드, F코드. 그러니까, ‘Let It Be?’ 저 정도는 나도 친다.

“아, 손톱을 안 잘랐더니 안 쳐지네.”

이런, 난 발톱까지 잘랐는데. 대머리독수리처럼 멀리서 기회를 노리던 또 다른 남자가 기타를 받는다. 주변 ‘중창단’들의 목소리가 질세라 커졌다. 어느 새 옆으로 옮겨 앉은 여자가 귓속말을 했다.

“기타 칠 줄 알아요?”

“네?”

“기타 칠 줄 아냐고요.”

여자의 입술이 내 귓불에 닿았다. 귓속말엔 귓속말로.

“오늘 저 중에 누구랑 잘 거예요?”

“미쳤어요?”

“지겹지 않아요?”

“뭐가?”

“남자들.”

“당신은 뭐가 다른데요?”

여자의 어깨가 내 어깨에 닿았다. 허벅지엔 손이 올라왔다. 맥주 캔처럼 찬 검지가 종아리 근육을 따라 천천히 발목으로 내려왔다.

“어머, 운동해요? 자전거?”

대답하는 대신 손을 치웠다.

“두고 봐요.”

“두고 보면 어쩔 건데요?”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 여자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라운드를 마치고 돌아온 권투선수를 맞는 코치처럼, B가 여자의 손에 맥주를 쥐어주었다. 4시 30분. 맞춰놓은 알람이 울렸다. B에게 별 도움은 되지 못했지만 방해하진 않았다. 마지막에 남을 A든, 몸이 제일 가까운 B든, 아니면 혼자 집에 가든 여자의 선택만 남았다. B의 장딴지는 이제 아예 A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었다. 옷과 가방을 챙겼다.

“나 이제 갈 거야. 집 멀다며? 가는 길에 내려줄게 가자.”

B가 내 팔을 끌고 문 밖으로 나왔다.

“형, 아시잖아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택시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여름은 다 좋은데 해가 너무 길어. 한남대교 남단에 있는 애프터 클럽 생각을 잠시 하다 그만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B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저 누나 데려다주고 집에 가요.”

“왜, 같이 안 자고.”

“뭐, 집이 지저분하대요.”

간단한 위로를 건네고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앞머리 사이로 들이쳤다. 가을이군. 종합운동장을 지날 무렵, 손에 쥔 전화기가 바르르 떨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에디터
    유지성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Finger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