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도 있는 남자의 시선은 그대로 박혀서 흔들리지 않는다. 영화 [북촌방향] 개봉을 앞두고 배우 유준상을 만나서 나눈 엄격한 얘기.
처음부터 아내 얘길 해서 미안한데, 라디오에서 홍은희 씨 목소리를 들으면 아주 가까운 여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알 수 없는 죄책감이라니.
하하하, 그런가? 지금 나는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30대보다는 오히려 40대에 더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면이 있다. 아내가 옆에서 그렇게 동의해주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거다. 엄청나게 고맙다.
아내에 대한 남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처리할 건가?
그냥 두는 게 아내한테도 좋은 거고….
결혼이 당신을 성장시켰나?
많이. 하지만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내가 막 혼자 노래 연습을 한다. 다른 사람은 감당 못한다, 한 번 들어도 힘든 걸 365일 옆에서 듣는다 생각해봐라. 피아노 칠 때도 “에이 거기 틀렸잖아, 거기” 자기 일 하다가도 그런다. “어우, 그만해 좀. 됐어, 이제” 그러면 난 “어, 미안해” 그러곤 또 하고 있는 거다. 계속.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오른손 따로 왼손 따로 연습해서 쇼팽을 완성했고, 2010년에 어떤 인터뷰에선 7분 30초 정도로 목표하고 있는 교향곡을 4분 33초까지 완성했다 말했다.
영화 <북촌방향>에 그 피아노 연주가 나온다. 쇼팽의 C단조. 따라 라라라~ 띠리 디리리리. 이런 곡이다. 교향곡은 일단 거기서 머물러 있다. 대신 가요를 많이 만들었다.
지금까지 쓴 그림일기도 열 권이 넘는다 들었다.
데뷔부터 일 년에 한 권씩이다. 옛날에 원고지부터 시작했다가 이제 한 권씩 묶어서 열 대여섯 권 정도 되는 것 같다.
집요함이랄까….
좋으면 계속 한다. 글쓰기, 음악은 너무 좋아서 계속하게 됐다. 피아노도 악보 보고 하다가 어느 순간 혼자 쳐봤다. 더 잘됐다. 모든 게, 자연스럽게 습관이 됐다.
당신의 그 집요함이 홍상수 감독과 통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도 어떤 신을 30번, 40번 찍으니까. 배우가 머리를 비우고, 그게 몸에 익을 때까지.
투수들이 생각 안 하고 던져도 정확히 들어가는 거랑 똑같은 것 같다. 한 100개 던질 때까지는 ‘자, 요번엔 내가 왼쪽으로 던져야지, 오른쪽으로 던져야지’ 혹은 ‘커브? 변화구?’ 하고 생각하게 된다. 어느 순간 그 생각조차 지워진다. 이번에 <북촌방향> 찍으면서는 어느 순간 공 던지는 게, 이게 너무 힘들어서, 어깨가 빠질 것 같아서 처음으로 도망칠 생각을 해봤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 때는 안 그랬나?
그때도 뭐, 꿈틀댔을 거다. ‘이게 대체 뭐야? 어후, 한두 신 촬영하는 건데 내 에너지가 우와!’ 정말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소진됐다. 하지만 끝난 다음엔 “감독님, 몸은 너무 힘든데 꼭 다시 하고 싶습니다” 그랬다. 이번에 찍을 땐 그냥, “어… 일단 어떻게 도망칠 수 없을까?” 그러다 나와 보면 스태프 동생들이 추운데 쭈그리고 앉아서 사람들 막고 있는 거 보고, “내가 널 봐서 다시 들어간다” 그랬다.
<북촌방향>이 유난한 이유가 뭔가?
평론가 정성일 선생이 홍상수 감독에 대해 쓴 글과 어떤 외국 평론가가 쓴 글에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마법을 부렸다”는 대목. 나는 정말 감독님의 마법에 푹 빠졌던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 홍상수 감독 영화 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여러 번 얘기하지 않았나? 당신이 가면 잘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게 아니었나?
<해변의 여인> 오디션을 본 적 있다. 감독님이 불러주셨다. 다섯 시간 넘게 낮술을 마셨다. 술도 못 먹는데 백세주를 네 병도 넘게 마셨다. 그때 나에 대한 모든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거기 있던 많은 분이 그랬다. “이번에 유준상 씨 무조건 (출연)하시겠네요. 감독님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야기하신 분은 없었습니다.” “아이, 감사합니다” 하고 왔는데, 캐스팅이 딴 사람으로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를 되게, 욱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화가 났나?
“이게 도대체 뭐지?” 그런 심정이었다. 너무 신기한 거다. ‘나는 내 걸 다 줬는데? 그게 그런 게 아니었나? 난 뭘 한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바보같이 모든 것을… 왜 다 얘기했어? 응?” 혼자 그러면서 감독님과 꼭 해보고 싶어졌다. 원래 욕심 없었다. 지금도 그런 건 잘 못한다. 감독과 배우는 같이 합의점을 찾는 게 이상적이지, “이건 무조건 저한테 어울리니깐 하게 해주십쇼” 하는 성격 자체가 못 된다. 그때도 다시 찾아가서 “저, 꼭 나중에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는데 안 찾아갔다. ‘언젠가는 불러주시겠지. 안 불러주시면 어쩔 수 없고’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딱 불러주셨고, 그때부터 그냥 열심히 해야지 생각이 든 거다. 그런 과정 때문에 욕심들이 한번 쓸려 내려갔다. 사실 그런 일들은 많이 겪었다. 확정됐다가 다음 날 신문에 다른 사람 이름으로 발표되는 경우를 여러 번 당했기 때문에. 홍 감독님은 내가 정말 다 줬기 때문에 좀 다른 경우인 셈이다. 지금도 그때 얘기를 감독님이랑 웃으면서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에서 당신은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묘한 수위에서 느껴지는 어떤 합이 있었다.
순전히 감독님이 만들어주신 거다. 나에 대한 관찰이, 감독님은 이미 엄청나게 돼 있는 거다. 감독님이랑 찍을 때는 생각 자체가 일단 ‘스톱’이다. 그래서 내가 그 동안 해왔던 것과 감독님의 방향이 일치하는 지점이 많을 수 있는 거다. 스스로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그거 아나? 지금까지 얘기하는 동안 당신 검은자위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보통은 칼 쓰는 사람들 눈빛이 그렇다. 역시, 집요함인가?
그 일기들. 힘들 때 다시 그 글들을 보면, ‘그래, 내가 이렇게 훌륭한 생각을 했는데 지금 이렇게 나약해?’ 하고 다잡게 된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형성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부끄러움 없이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한텐 제일 중요하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때마다 ‘왜 그래, 왜? 실망을 주면 안 되지. 너 지각했어? 이노무시키, 왜 그래. 다시 열심히 해.’ 이렇게 되는 거다.
한편, 당신은 엄격한 남자이기도 하다. 아들을 90도로 인사하도록 교육한다고 했는데.
잘못됐으면 일단 잘못됐다고 다 얘기하는 스타일이다. 옛날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확실한 기준이 있나?
누가 봐도 아닌 건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들. 기본적인 것들이 안 지켜졌을 때 정확히 얘기해 줘야 한다. 그러려면 같이 하는 동료들에게 내가 계속 약속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 내가 안 지키고 남을 혼내는 건 거짓말이다. 항상 공연 세 시간 전에 가 있고, 무대 뒤나 옆에서는 절대 누워 있으면 안되고. 안 그럼 흐트러진다.
이번 영화에서 유난히 기대하는 바가 있나?
내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인물이다. 나도 모르게 마술에 걸린 이야기? 기묘하다. 찍는 동안에도 이야기가 이렇게 펴질 줄 아무도 몰랐다. 난 영화감독 역할이다. 대구에 있다가 잠시 서울에 올라온 한 3일 동안의 이야기다. 계속 같은 사람 만나고 같은 곳을 간다. 어떤 땐 오싹했다. 감독님께 물었다. “근데, 여긴 왜 왔어요?” 감독님이 그랬다. “여긴 오늘 온 걸 수도 있고 어저께… 온 걸 수도 있고.” “어? 그럼 저는 그때 거기 왜 안 가고 여길 왜… 아 그게 이렇게? 히익… 어후, 그런 거예요?” 그랬다. 나중에 알았다. 찍으면서는 “어휴, 이거 모르겠네요. 어휴.” 막 그러면서 미쳐버리다가 액션! 하면 내가 아닌 게 되고. 마지막에, 고현정 씨 만나는 장면이 있다. 정말 고현정 씨한테 홀린 것 같았다. 그 인물이 그렇다. 뭔가에 홀렸다. 마지막 신에 고현정 씨가 카메라로 찍어주고 나는 그걸 보는데, 그게 정말 기묘하다. 보는 분들마다 느끼는 건 다르겠지만, 그래도 비슷한 부분들이 있을 거다. 예고편도 황당하지 않았나?
뭔가 돌이킨다는 건 쓸모없구나, 과거고 뭐고 소용없구나. 그런 걸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보는 순간만큼은 홀릴 수밖에 없다. 그거 하는 동안, 나는 약간 다른 사람이었다.
이 길이 아닌가 의심한 적 없나?
없다.
그런 거 있잖나. “오, 나 음악 이렇게 잘하는데?”
하하. ‘나 아직 멀었구나. 아직 멀었어’ 생각은 한다. 누군가에게 “모자란다. 그게 아니다”라는 얘기를 듣는 게 좋다. 우리 연출님이 “선배님, 죄송하지만 이런 부분은 좀 이렇게…” 하면 “저, 이런 얘기를 제가 육십 됐을 때도 좀 해주세요” 그런다. 하물며 홍상수, 강우석 감독님이 나한테 그런 얘기들을 해주시니까 뭐, 너무 행복한 거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내가 말하지 않나? “더 해.”
아내는 웬만해선 칭찬 안 한다.
여자 홍은희는 언제 느닷없이 매력적인가?
시도 때도 없다.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나?
소년이다. 이제 소년이 될 수 없는 소년이다. 삼십 대 중반에 써놓은 글 중에, “소년, 이제 너를 떠난다” 뭐 그런 게 있다. 그랬던 소년이 아홉 살 된 아들 보면서 “소년, 널 그냥 떠나지 말아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한다. 애들 눈높이를 맞추다 보면, 떠날 틈이 없다.
유준상은, 어딜 보고 가는 건가?
지금. 앞으로의 지금. 나는 항상 오프닝이다. 시작 직전.
당신도 트위터 같은 걸 하나?
일단 싫어한다. 뭔가 복잡하다. 뭘 막 올려야 되고. 얼마 전에 미니홈피도 없앴다. 혼자 하는 블로그는 있다. 가끔 한 번씩 올린다. 그러곤 나만 본다.
- 에디터
- 정우성
- 스탭
- 정주연, 헤어 / 이순철, 메이크업/ 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