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유혹해 오면 못이기는 척 넘어갔다. 때론 밧줄에 묶이기도 했다. 위험한 상상과 위태로운 실제 사이, 한 남자의 이야기.
학생은 탕웨이를 닮았다. 책상에 나란히 앉았는데, 이럴 때 치마가 짧은 건 필연이다. 물론, 브래지어도 입지 않았다. 티셔츠는 얇다. 가슴의 양감, 유두의 경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색감까지. 슬쩍 흘겨보면서 모르는척 하고, 남자가 학생을 다그친다.
“너, 오늘 옷이 이게 뭐야, 학생이? 숙제는 다 했어?”
“아이, 선생님, 우리 오늘은 공부하지 말고 놀아요, 네?”
“안 했지? 어쩌려고 이래? 수능이 장난이야?”
남자는 과외선생님 역할에 충실하게, 학생을 타이른다. 자신의 시선을 겸연쩍어하면서. 학생은 입을 비죽거리다, 다시 콧소릴 낸다. “아잉~ 선생니임~” 그러면서 팔짱을 낀다. 물컹하기도 딱딱하기도 한 감촉이 팔에 닿는다.
한상기 씨(가명)는 입술 끝으로 담배를 빨면서 짙게 내린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우리는 한상기 씨가 어떤 도시, 비밀스런 방에서 여럿이 나눠 즐길 수 있는 예쁜 여자와 지냈던 흡족한 몇 시간에 대해 얘기하던 중이었다. 그의 사례들을 경청하는 동안, 왜 이런 얘기가 나왔는지도 잊었다. 거긴 모두 가면을 쓰고, 익명이 보장되고, 입구에선 ‘피델리오’라고 말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대저택이었을까?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봤던 난교 장면을 상상하다 말았다.
거기선 민망할 일이 없었다. 감출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했다. 손님인 남자와 ‘매니저’라 불리는 여자가, 남자가 요구하는 오만가지 상황에 따라 연기했다. 의외로 몰입이 빨라서 부끄러워할 틈도 없었다고, 그게 욕망에 솔직해지는 길이었다고, 한상기 씨는 말했다.
“그날은 제가 과외선생님이었던 거예요. 여자는 학생이고. 일종의 역할극이죠.”
과외선생님 역할을 자처했던 남자는 올해 서른여섯, 여자는 스물여섯이다. 한 시간짜리 역할극 안에서 남자의 나이는 미상, 여자는 열여덟쯤 됐을까? 시작은 지극히 일반적인 과외선생님과 학생의 관계. 하지만 여학생은 과외선생님을 속으로 좋아하고 있다. 야한 옷을 입은 건 그래서다. 이런 건 남자가 다 설정할 수 있다.
“그러다 가슴이 팔에 닿고, 아주 짧은 치마를 입어서 허벅지 안쪽이 다 보이고. 여자가 물어요. ‘이번 달 모의고사 성적 오르면 선물 줄 거예요?’ 그럼 제가 다시 묻죠. ‘원하는 게 뭐냐?’ 여학생이 ‘뽀뽀해봐도 돼요?’ 다시 물어요. 그런 식이죠.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 이미 제 손은 여자 옷을 벗기고 있고.” “그럼 여자는 가만 있고? 벗기고 나서는?” “…다 아시면서 왜 그래요?”
중요한 건 수위가 아니다. 어디까지 어떻게 벗기고 물고 빠는 얘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 이 역할극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주인집 아저씨와 하숙하는 학생이거나 직장 선후배 사이일 수도 있다. 여자는 남자가 고를 수 있다. 당연히, 이 경우에는 남자가 손님이니까.
“‘학생, 벌써 집세가 3개월치나 밀렸어. 어쩔 거야?’ ‘잠깐 들어오세요, 차 한잔 드릴게요.’ ‘차는 무슨. 됐고, 돈이나 내.’ ‘에이, 그러지 말고 들어오세요. 제가 요즘 힘들어서 그래요. 기분 좋게 해드릴게요.’ ‘그래? 어떻게 해줄 건데?’ 이런 식이죠. 직장 선후배요? 비슷해요. 둘이 야근을 하는데 여자가 짧은 치마를 입고 책상에 걸터앉아요. ‘선배랑 야근하니까 좋아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우리 둘이 야근하는 거….’ 이제 감이 오세요?”
수십 개나 되는 케이블 TV 채널을 돌리다가 멈출 때는 결국 란제리 홈쇼핑이거나 <완전한 사육>, <마법의 성> 같은 ‘19금’ 영화라는 통계가 있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에선 누군가의 페이스북을 훔쳐보는 이유의 근원이 결국 섹스라고 한다. 어떤 예쁜 여자의 미니홈피나 트위터엔 이런 말로 인사를 건네는 남자가 있다. “참 예쁘게 생기셨어요. 친구해주실 거죠?” 그냥 외로움이라고 치부하기엔 좀 무책임하고,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했을 상황.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을 가질 땐 결국 (한 번 정도) 섹스하고 싶을 뿐이라고 자조하는 30대 여자의 말…. 거기서, 한상기 씨의 욕구는 아주 자연스럽고, 심지어 ‘젠틀한’ 수준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한 번 만나고 나서는 계속 걔만 만나러 가요. 꽤 좋은 옷을 입고, 가끔은 조각 케이크 같은 걸 사가서 같이 먹기도 하죠. 데이트하듯이. 그러다 보면 어떤 관계가 만들어져요. 거기도, 결국 사람을 만나는 곳이니까.”
그가 커피잔을 들고 휘휘 돌렸다. 어떤 날은 서로 옷을 벗기지도 않고 얘기만 하면서 할당된 시간을 다 쓰기도 했다. “다른 남자가 1백만원을 준다 해도 내가 나갈 것 같아? 오빠는 좀 달라. 오빠가 밖에서 만나자고 하면 만나고 싶어요.” 여자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그녀가 경험한 ‘다양한’ 손님들 사이에서….
어떤 날, 한상기 씨가 복도에서 만난 남자는 손, 발에 여자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입에는 누군가 재갈을 물린 것처럼 스타킹을 물고 있었다. 그걸 ‘전신 타이츠 페티시’라고 부르며, 꽤 흔한 축에 속한다고 했다. 다른 남자는 지퍼를 내리고 페니스를 스타킹으로 묶은 후, 다른 한쪽을 여자 손에 쥐어줬다고도 했다. 목줄을 단 개를 끌고 산책하듯 그곳 복도를 활보하다 인근 편의점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이건 ‘수치플(레이)’라고 한다던가?
“제가 만나는 여자 이름을 밝히지는 않을게요. 걔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어요. 제한된 시간 안에 술집에 다녀오는 경우도 있는데, 바에 나란히 앉아서 내내 욕을 해달라고 한대요. 그러다 따귀를 때려달라고 하기도 하고. 저도 고고한 척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그런 생각은 하게 돼요.”
단정한 머리, 정중한 말투, 안정적인 직장, 가족. 한상기 씨가 겉으로 갖춘 것들. 관계없이, 아내와는 할 수 없는 것들이 자꾸 생각난다고 그가 수줍게 말했다. 내가 물었다. “어차피 돈 내고 하는 거, 내내 허탈하지 않아요? 좋은 것도 잠깐이지.”
“허무하죠. 그래서 판타지는 거기서 머물게 두는 게 좋아요. 이뤄지면 안 돼요. 이뤄지고 나면 다른 걸 찾을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면, 자기가 섹시하다는 걸 과시하면 성기능이 증가한다고 해요. 거기 있는 여자들이 그걸 하죠. 남자가 어떻게 해도 그들은 흥분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섹시함으로 남자를 사정하게 만들어요. 나는 걔를 절대 이길 수가 없어요. 이 지점에서 SM이 성립하는 거죠. 내가 매저키스트. 다 포기하고, 걔가 하자는 대로 즐기는 거죠. 그게 편하거든요.”
쾌락은 봄처럼 풍만한 안락이기도, 칼끝 같은 극단이기도 하니까…. 상대를 완벽하게 장악하거나 상대에게 완전히 압도됐을 때, 자기 의지 같은 건 마지막 한 올까지 포기했을 때 느껴지는 쾌락도 있다. 낮에, 그가 품위를 유지하려고 소비하는 에너지는 과연 상당한 것이었다. 회사에선 조용한 축이었다. 그러면서 업무엔 실수가 적었다. 여러모로 촉망을 받기도 했고, 술은 맥주 500cc 이상 마실 줄 모르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능숙하게 다루는 드문 남자였다. 동성 친구는 물론 이성 친구와도 금세 허물없는 사이가 될 수 있는 남자. 지난 36년 동안, 모범의 범주를 벗어난 적도 없었다. 그가 말했다. “얼마 전에는 하이힐이 좋았어요. 발가락, 허벅지 안쪽으로 이어지는 아찔함. 긴장된 종아리 근육. 이해하시겠어요? 그래서 걔한테 부탁했죠. 치마는 입지 말고,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고, 한 시간 내내 내 앞에서 걸어달라고.”
그가 마지막 한 모금을 삼킬 때, 내 잔에 있는 커피는 그대로 실온으로 식어 있었다. 커피 위엔 뭐가 둥둥 떠 있었다. 대면할 기회는 없지만 거리에서 만나면 뒤돌아볼 것 같은 예쁜 여자가 또각또각, 눈길도 주지 않고 앞에서 걸어다니는 걸 한 시간 동안 지켜만 보는 남자의 심리는 뭘까? 그러다 마음이 바뀌기도 하겠지? “이제 치마 들추고 걸어!” 라거나, 그 방을 지하철로 ‘세팅’하고 치한처럼 굴어보거나, 여자가 완전히 술에 취해서 쓰러져 있는 걸로 설정하고 몰래 치마를 들춰 만지기도 했다고 그는 말했다. 지금은 새벽 세 시. 우린 두 시에 만났다. 그가 야근을 마치고 신사동으로 나오는 시간이 그 쯤 될 거라 해서 맞춘 시간이었다. 잠은 다 깼고, 그가 말했다. “실은 지금도 걔를 만나고 왔어요. 야근은 아까 끝났고.”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요?” “걔가 나를 밧줄로 묶었어요. 그런 게 있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죠.”
탕웨이를 닮은 어린 여자가 벌거벗은 그를 밧줄로 묶었다. 그러곤 제 멋대로 애무당하다가, 여자가 오른손만 풀어줬을 때 그도 여자를 만졌다. 여자도 속옷이 젖을 만큼 흥분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었다. 여자에겐 수치였다. 여러 손님을 맞아야 하는 입장에서, 흥분하면 지는 거였다. “짜증을 내더라고요. ‘오빠가 너무 잘 만져서 그래’ 그러면서. 그럼 지도 좋은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걔는 또 다른 손님을 받아야 하는데 흥분하면 몸이 힘드니까 그랬겠죠? 그래서 말했어요. 짜증이 나면 나를 때려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따귀 한 대를 대차게 맞았다. 몸엔 아직 밧줄이 엉켜 있는 채. 여자는 ‘깔깔깔’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는 “내 따귀를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다” 말하면서 따라 웃었다고 했다. 이건 순정만화 아니었나? “나한테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매력적인걸…?”
거리는 완벽에 가깝게 비어 있었다. 근처에 있는 애프터 클럽은 지금부터 호황일 것이다. 딱 붙는 청바지를 입은 마른 남자애가 택시를 잡으려는 여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맨다리에 빨간 구두. 한상기 씨가 위험하게 말했다. “저런 여자애들, 거기 가면 다 만날 수 있어요. 쓸데없이 술값 버릴 필요도 없고, 이것저것 잴 필요도 없고. 딱 한 시간.”
내일 새벽, 근처 골목에는 한 번 쓴 콘돔이 전단처럼 버려져 있을 것이다. 신사역 사거리의 어느 한 점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는데, 그 명도가 흡수하지 못할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만 알고 계세요. 더 이상 알아서 좋을 것도 없어요.” 택시를 타면서, 그가 사람 좋게 웃었다. 나는 인도 끝에 서 있었다. 계절은 다 끝났고 불면은 시작됐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을 땐, 폐까지 서늘했다.
- 에디터
- 정우성
- 아트 디자이너
- Illustration/ Finger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