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는 시인이다. 또 건축가다. < 철학으로 읽는 옛집 >을 내고 만났을 땐, 기획자이자 계몽주의자로서 얘기했다.
“건축과 시는 무슨 관계가 있나요?”란 질문을 자주 받는 곤란함을 말했는데, < 철학으로 읽는 옛집 >을 통해 더 어려운 질문이 생겼다. 건축과 시와 철학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초등학교 교과서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 이란 글이 있었다. 여름 한낮에 애들이 나무 아래 앉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냐는 주제로 이야기하는 건데, 귀신이다, 호랑이다, 곶감이다, 이런 식으로 막 나온다. 그러다 느티나무 저 편의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망각이라고 한다. 갑자기 노인이 나타나서 망각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내놓는 거다. 인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경험이었다. 시는 그렇다. 말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뭘 하는 게 아니라 말을 사건으로 만든다. 건축도 똑같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다. 철학은 그런 사건을 연결시킨다. 인식을 통해 시가 말의 사건을 펼치고 건축의 사건을 일으키고, 철학이 그걸 또 인식한다.
건축이든 시든, 철학을 담는 그릇이라는 기계적인 해석으로 오해되곤 한다. 철학을 어떻게 담나? 철학을 담는 게 아니라 철학을 투사한다. 옛날 사람들이 특히 그랬다. 예를 들면 남명 조식 같은 경우, 정자는 지 쪽으로, 행랑채는 수 쪽으로, 이렇게 배치하면서 지수화풍의 우주를 만들었다. 철학자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건축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건축에선 철학보다 생활이라는 현실적인 조건이 전제된다. 현실적인 조건 안에서 자기의 철학을 건축의 어디에 심는 건데, 그런 건축가조차도 현대엔 드물다.
이 책을 보면 당신에게 한국의 옛집은 단순히 소재가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신이 건축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옛집을 빌려서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학문적 스승을 인용해서 말하듯이. 맞다. 이 책에서 다룬 집들은 한국 건축의 고전이다. 고전이라는 게 단순히 만들어진 당시에 그치면 그건 고전이 아니지 않나. 현재에서 되살아나야 한다. 내가 가진 건축의 주제로 그 고전들을 호출해서 그것들이 현재 어떻게 살아 있는가를 밝힌 글이다. 그 말은 틀림없다. 내 건축에 대해 옛 집을 빌려서 얘기했다.
가장 주요한 가설이 있었나? 딱 하나였다. 대학에서 건축을 배울 때 공포가 어떠니, 입공이 어떠니, 만날 이런 걸 배웠다. 그래서 배운 걸 가지고 한국 건축 답사를 갔는데, 그게 의미가 없었다. 서양처럼 양식이 그 시대를 설명해주지 않으니까. 이게 대체 뭔가 혼자 연구를 해보니 한국 건축에서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양식이 아니라 집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가 중요했던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웠다. 거시적인 맥락에서 집을 봐야지, 집 자체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집만 봐서는 모르겠어서, 그들의 철학적 체계를 살펴봤다.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풍수도 공부하고 한문도 공부하고….
책에서, “우리는 과거의 문자에 의해서 격리되었다”고 썼다. 우리가 우리 고전에 접근하지 못하고, 우리가 우리 할아버지의 글을 읽지 못한다. 이건 좀 심각하다. 하지만 워낙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스승을 모시고 < 주자 집주 >를 공부했는데, 이게 거의 개미지옥이었다. 주자가 하나의 주장을 펼치면 자기 말을 입증하기 위해 온갖 주석을 단다.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왕이 얘기한 내용, 왕필이 얘기한 내용이 줄줄이 붙는다. 그걸 다 찾아서 봐야 한다. 3년을 공부했는데, 삼 분의 일밖에 못했다. 그 정도까지 하고, 누가 번역해놓은 것도 참조해가면서, 성리학자들의 저서를 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문에서 빠져나왔다는 것. 자칫 잘못했으면 책은 안 나오고 한문 연구자가 될 뻔했다. 한문이라는 게 글자 자체가 고고학이라서, 그걸 파고 들어가니까 너무 재미있었다. 그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내가 한문까지 이러면 안 된다, 하고 빠져나왔다.
이 책에서 다루는 개념이라든지, 단어 선택이라든지, 추론 방식이라든지, 대중을 겨냥한 것 같지 않다. 당신이 생각한 독자는 누구였나? 책 쓸 때 독자 생각 안 한다. 독자 생각 안하고 쓰는데, 많은 사람이 읽어줬으면 하는 기대는 있다. 그 사람들이 딱 한 가지만 알아줬으면 했다. 아까 얘기한 그 가설과 이어지는 얘기다. 우리는 서양식 교육을 받았고, 건축도 서양식 사고에 묶여 있다. 그 폐해가 너무 큰데, 서양은 건축이라는 게 오브제다. 집이 하나의 오브제라서 표현 방식에 따라 바로크, 로코코 하는 양식 구분이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의 옛집은 다 똑같다. 한국의 옛집은 집이 아니라 어디에 자리하고 있느냐가 문제다. 이런 생각이 알려지면서 서양처럼 모든 걸 객관적으로 대상화하는, 서양식의 합리적 사고에서 벗어나자는 큰 바람이 있다. 나는 ‘우리’가 너무 좋다. 법에 호소 안 하고, 운전하고 가다가 단속에 걸리면 인정에 호소하는 것 말이다. 물론 부패로 연결될 수 있는 여지가 큰데, 나는 이게 너무 재밌다. 지리적 관념도 다르다. 안국동에서 보자, 홍대 앞에서 보자, 하면 외국 사람들은 미친다. 홍대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냐고 묻는다. 우리의 지리적 관념은 선이 아니라 점이다. 그러고도 잘만 만난다. 근데, 그걸 서양처럼 만들겠다고 길에다 이름 붙이고 한다. 강남에선 성공할 지도 모른다. 격자형 체계에서는. 근데 강북은 길이 막 꼬불꼬불 이렇게 돼 있다. 아무 소용없다. 서양처럼 만들겠다는 시각으로는 절대 바꿀 수 없다. 우측통행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우리 것을 잘못 보고 있다.
이언적으로 시작해서 송시열과 윤증이 연이어 나오면서 끝맺는 이 책의 배치에도 어떤 의도가 있을 것 같다. 없을 수가 없었는데, 조선에서 성리학 전반에 대한 내용을 저서로 정리한 인물이 이언적이다. 이언적을 숭앙한 사람이 퇴계고, 퇴계와 남명은 라이벌이었다. 그 남인들의 족적에서 한발 빗겨나간 사람이 서인인 송시열이다. 조선이 아주 불행한 시기였는데, 그때 조선의 예학이 성립되면서 사실은 오늘날과 같은 부정적인 면들이 고착된다. 거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윤증이고, 윤증이 새롭게 양명학을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그게 오래 못 갔다. 그러한 흐름에 따른 순서다.
조선 중기라는 한 연대를 잡은 건데,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18세기가 아니라, 그때여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 18세기도 찾았다. 18세기, 19세기 다 찾았는데, 당시에는 경제구조가 달랐다. 18세기부터 중인 계급들이 부상하면서 돈을 번다. 상업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한 거고, 이전처럼 대대로 주거지를 꾸리는 사람이 줄고 이동이 잦아진다. 집을 자기 손으로 짓는 예도 드물어진다. 점점 바빠지면서, 자기 시간이 줄어든 거다. 그때도 성리학자들은 많았다. 최한기라든지 박지원이라든지. 근데 그들은 가난했다. 최한기는 부자였지만 집이 남아 있지 않고, 박지원은 가난했고, 홍대용 같은 사람도 부자였지만 임지를 옮겨 다니느라 집 지을 새가 없었다. 주자 성리학이 가장 왕성했던 때, 집을 지을 수 있는 조건이 됐다.
18세기에 시작된 상업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나날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 사이 우리는 서구의 세계관으로 생각하고 생활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백 년 전 옛집과 지금 한국의 주택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보나?분명히 있다고 본다. 땅이 있지 않나. 관념이 아니라 한반도가 가진 지형적 특색이 있다. 산지가 많고 계곡이 깊고 강으로 구분된다. 사람들의 유전자 깊숙이 그런 영향이 있다고 본다. 만약 한참 후에 어떤 고고학자가 19세기, 20세기 한반도 지층을 조사하면 깜짝 놀랄 거다. 불과 1백 년 전 사람들과 유전자는 똑같은데 문물이 완전히 달라져서. 아마 그 고고학자는 이렇게 결론 내릴 거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 그렇다. 정신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어머니만 해도 뜨거운 물을 바로 마당에 버리지 않았다. 미물들 죽는다고 식혀서 버렸다. 부엌에서도 수채 구멍에 항상 채를 놓고 걸러서 버렸다. 수채 구멍 밑에 괴로워한다고 했다. 자연이라는 두려움의 대상이 있었다. 이제 마당이고 뭐고 다 포장해버렸지만, 살다보면 우리는 변하지 않은 걸 안다.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면, 다들 점점 내려오다가 결국엔 바닥에 앉는다. 소파에서는 누우려고 한다. 소파랑 우리가 안 맞는 거다. 우리 방에는 용도도 없다. 거실, 공부방, 침실, 이렇게 서양식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우리는 거실에서 애들 공부도 가르치고, 손님도 맞고, 밥도 먹는다. 우리의 생활습관이 서양식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거지, 사라진 게 아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했는데, 한편으로 풍수에 대한 신화화는 여전한 것 같다. 최창조 교수 때문에 풍수에 관심을 가졌다. 예전에 풍수지리 관련 연구로 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지원 심사를 받은 적도 있다. 그때 심사위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얘기가 미신 아니냐는 거였다. 나중에 그 사람들 약력을 봤더니 다 개신교였다. 하나님 이외의 신이라고 본 거다. 그 괴리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최창조 교수와 나는 미신으로서의 풍수를 술법 풍수라고 부르고, 명당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술법 풍수가들이 집안에 안 좋은 일 없냐고 조상 묘를 파보라고 하는데, 파보면 관이 없어졌거나 돌아갔거나 그렇다. ‘소일크릭’ 이라는 게 있다. 그건 과학이다. 땅 밑으로 물이 흘러서 관이 떠내려간 거다. 과학이 아니라 식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 지역의 나무를 보면 된다. 나무가 물 흐르는 방향으로 휘어 있다. 얼마나 좋은 과학인가. 서양 애들은 지층 알아보기 위해 시추를 하는데, 우리 풍수지리는 안 파 봐도 안다. 땅을 보고 식생을 보고 지형을 유추한다. 식물들이 자라는 조건은 엄정하니까. 그래서 연구하려는 게 풍수학, 지리학, 식생학, 인문지리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다음 작업이 되기엔 모자라고, 최종적으로는 이걸 할 것 같다.
사람들이 주택에 대해 나른하게 이해하는 것 중 하나가 ‘전원주택’인 것 같다. 꼭 그렇게 전원에 살아야 하나?우리 옛집에 감탄했던 게 집안을 경영하지 않고, 그 밖을 경영한다. 인식적 확장이 한국 건축의 특색이다. 전원주택이라는 건 주택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집 밖이 중요하다. 집은 황금 몰딩을 하든 뭘 하든 3백년이 가도 뻔하다. 처음에 좋고 마는 거다. 그런데 집 밖은 다르다. 나무들이 흔들리고 계절마다 또 변한다. 나도 일산에 집 짓고 보니까, 일하면서도 집 생각을 한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집에 심은 자작나무가 어떻게 될까 봐 걱정한다. 어느 날 봄에 민들레가 정원에 핀 걸 봤는데, 민들레 뿌리 좋다니까 사람들이 금세 다 캐가고 없었다. 그 다음 해에 인도에 레지던시를 갔다가 봄이 되니까 우리 마당에 민들레가 폈는지 궁금했다. 집사람한테 물었더니 민들레가 폈다고 해서, 사진 찍어 보내라고 했다. 전원주택뿐만이 아니라 집에 산다는 건 바깥과 맺는 좋은 관계를 찾는 거다.
이 책을 쓰면서 한 당신의 공부는 건축가로서의 입장에 가까운가?, 시인으로서의 입장에 가까운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건 분명해 보이지만. 기획자 정도일까? 많은 사람이 우리 전통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어쩌면 계몽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배흘림기둥이 어떻고 처마가 어떻고 아무 소용없다. 배흘림기둥은 서양에도, 파르테논 신전에도 있다. 그 시각으로 똑같이 한국을 보면 안 된다. 물론 더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학자는 아름답다고 얘기하면 안 된다. 그건 문학하는 사람이나 일반인의 말이다. 아름답다는 건 대상이 있다는 거고, 집을 대상화하지 않는 우리 건축에는 적용하기도 어렵다. 우리 전통은 너무 어렵다. 너무 쉬워서 어렵다. 정원만 해도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앞산 뒷산을 정원으로 끌어 들인다. 중국에서 강의할 때, 한국의 정원과 중국의 정원이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이 있어서 이렇게 보여줬다. 한자로 원圓자를 쓰고, 이게 중국정원이라면, 이 입구 자를 지우고, 이게 한국정원이라고. 사람들은 계몽주의가 지나간 시대의 사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계몽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 에디터
- 정우영
- 포토그래퍼
-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