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못 자도 해야만 하네. 나 못 자서 해야만 하네.
머리맡에 양말을 놓지는 않았다. 산타클로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처칠은 우울증을 일컬어 ‘나의 검둥개’라고 했다. 짖거나 물지만 않지 불면증도 검은색이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빛을 잃었고, 특별히 이 증세에서는 빛을 되찾으면 지는 것이었다. 잠들기 위해 필요한 근육이 있다면 매일 땀을 흘릴 수도 있었다. 바람에 커튼 흔들리는 소리만 나도 여자 원피스 어깨끈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신경 쓰이고, 소변 기미를 느끼면 가스 불을 꺼야 하는 것처럼 급했다. 애인과의 이별은 늘 친구들에게로 돌아가는 입구였다. 이번에는 불행과 닮은 친구가 홀로 마중 나왔다. 이별이 아니라 불면증이라는 친구 때문에 술을 마셨다. 술만 있으면 절교는 간단했다. 양말을 신고 술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던 날들.
술집은 지천이었지만, 아무 데나 앉아서 시시덕거리지는 않았다. 술집을 고르는 엄격함은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아무 데나 술만 있으면 되지, 라는 말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모인 술집. 한밤중이 되어서야 퇴근해 그곳에 들렀을 땐, 여자 두 명과 함께 A가 바에 있었다. 여자 가운데 한 명은 벌써 만취해서 삭발한 A의 머리를 쓰다듬는 중이었고, 또 한 명은 그런 여자를 걱정스레 지켜보거나 조금 웃거나 했다.
A는 식물을 키우는 자세로 자신에게 술을 퍼붓곤 했다. 그러니까 그건 규칙적이었고, 의무감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머리가 자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덴 여자들은 조금 성장하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B는 드물게도 A와 여전히 친구로 만나는, 예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였다. 다른 여자는 그녀의 후배로 월레스의 그로밋처럼, 유명한의 코난처럼, 현명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사이에 두고 A와 B가 실랑이를 벌이는 구도인데도, 딱히 한쪽에 날을 세우기보단 모두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A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딴 데 보기 바빴다. B는 A의 관심에 관심이 없었다.
“야, 너 나와. 나가서 나랑 한잔 하자.”
‘한판’으로 듣고 놀랐을 만큼, 크고 우렁찬 목소리였다. A는 여기에서 한판 할 모양이었다. 나를 가리켰다.
“얘 어때. 얘랑 나가.”
말했듯이, 술로 절교하기는 참 쉽다. 그의 말을 웃어넘기고 맥주와 스카치 위스키를 한 잔씩 시켰다. 옆에서 그녀가 “저도 똑같이 주세요” 했다.
“폭탄주 마시려는 거 아니에요.”
“폭탄주를 마셔야 할 때도 있는 거잖아요.”
섞는 걸 싫어하는데, 섞었다. 그녀와 내가 섞자, 다들 섞었다. A가 ‘원샷’이라고 외쳤다. 그녀를 빼고, 다 그렇게 했다. 아무리 단골이라지만, 바에서 폭탄주를 제조하고 있는 게 좀 미안하긴 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서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삶에서 배울 수 있는 건 품위 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음악가 C가 도착했다. 앉아도 되냐고 묻지도 않았다. 배워먹지 못한 태도.
“이거 폭탄주 분위기면 곤란한데.”
그의 손에는 파란색 라벨의 위스키가 들려 있었다. 이것 때문에 건방지게 “어디”냐고 문자 보냈군.
“형, 여기 말고, 어디 딴 데서 이거나 마셔요. 공연 페이 대신 이거 받았어.”
여기서 가장 가까운 집은 내 집이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만큼 만만한 것도 없지만, 취객들의 요구에 휩쓸릴 만큼 자유의지가 없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눈이 갔다. 그녀를 좀 더 곁에 두고 싶었다. 참한 여자라고 웅변하는 말투와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저 볼에 있는 점의 위치를 바꿀 만한 여자라는 예감. 그녀가 따로 모시는 주인이 있거나, 그녀의 친구 아버지가 형사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주인 행세를 하기도, 형사처럼 굴기도 한다. 그때, 그녀는 어떨까?
술집 바깥은 얼어 있었다. 빙판길에 미끄러질 뻔한 걸 그녀가 붙잡아주었다. 택시를 잡으러 걸어가던 중 A와 B는 술집에 두고 온 쇼핑백을 찾으러 되돌아갔다. 셋이서 길 한복판에 멈춰서 있었다. C를 등지고 그녀 쪽으로 다가섰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언니는 아직도 저 오빠가 좋은가 봐요.”
“응원해드릴 수는 없는 일을 하시네요.”
“그죠? 저 오빠는 저한테도 연락하던데.”
“뭐라고요?”
“술 마시자고요.”
“그래서, 따로 만난 적 있어요?”
“아니요. 술 못한다고 그랬는데, 오늘 들켰죠.”
“들켰다고 둘이 마실 필요는 없어요.”
“하하.”
다섯 명이 택시 한 대에 타는 걸로 택시 기사와 합의하고, 편의점에 들러 담배와 맥주와 얼음과 아이스크림, 과자 같은 잡동사니를 사고, B를 부축해서 집으로 갔다. 비도 없이, 눈도 없이, 걸어가는 것보다도 오래 걸렸다. 그들이 각각 방 안의 침대와 책상과 책장에 기대 있는 동안 술상을 봤다. B는 그새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잠이 들었다. 언니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충만했던 그녀는 일과가 끝나자 금세 지쳤다. 그 자리에서 졸다가 쓰러지기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B를 깨우던 A도 침대 위에 함께 뻗었다. 기어이 C와 나는 파란색 라벨의 술 한 병을 다 비웠다. 폭탄주 같은 건 만들지 않았다. 다음 날 억울하게 만들려고, 이를 악물고 마셨다. 마지막 잔을 마시기가 무섭게, C가 비행기 출입구에 줄을 서는 속도로 물었다.
“자고 가도 되죠?”
침대 아래로 그녀가 누워 있었다. 그 옆에 내가 눕고, 하나 남은 이불로 C와 같이 덮었다. 이불 따위로는 가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정신은 이불 아래 놓이자 항복하고 없었다. 그러나 불면증 환자의, 항복이 승리라는 역설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면증은 백기를 든 친구에게도 굳이 찾아와 억지를 쓰는 친구였다. 30분이나 지났을까. 저절로 눈이 떠졌다. 이런 식이라면, 아침까지 잠들지 못할 것이다. 물이나 마시려고 이불을 걷고 일어나는데, 그녀가 인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언니는 자요?”
“네. A가 옆에 있긴 한데,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요.”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키는데, 머리가 한쪽으로 쏠려 누가 보면 유혹하는 줄 알 것 같은 자세였다.
“저, 언니랑 지금 갈까 봐요.”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자고 출근해요”
“가져올 게 있어서 집에 들렀다 회사 가야 돼요.”
“그럼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가요. 알람 맞춰줄게요.”
“다른 데서 자는 게 좀 불편하고 그래서요.”
“그래도 지금 가면 너무 애매하잖아요.”
“아니에요. 언니 깨워서 지금 갈게요.”
그녀를 잡고 싶었는지, 그녀에게 고백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안음으로써 그 두 가지를 다 했다. 그녀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가슴을 더듬었다. 순순히 서로를 맡겼다. 하지만 남자가 최악을 향해 도약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는 평화를 망치는 비밀을 안다. 그녀의 바지를 벗기려고 했다. 반면에 여자는, 사랑과 평화를 지나치게 동일시한다. 바지를 스치는 손의 음량으로, 그녀가 말했다.
“미쳤어요?”
“미쳤나 봐요. 정말.”
부모님의 섹스를 상상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경험을 친구들에게 보태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싱글을 한 장 두 장 모으다 보면, 마지막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싱글만 남더라도 사는 법이다. 그걸 ‘완성’이라고 부른다. 남자는 완성을 좋아한다. 투수가 되어 로진백을 더듬듯이, 그녀의 몸을 만졌다. 아직 발을 차올릴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 그녀는 던지기 싫은 공을 주문하는 포수가 되어 말했다.
“싫다는 게 아니라, 아시잖아요? 근데 지금은….”
결코 폭탄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폭탄주를 마셔야 할 때도 있는 거잖아요.”
그날 밤 우리 다섯 명이 낸 것 중에 가장 큰소리는 그때 그녀가 웃는 소리였다. 그녀가 얼굴을 내밀어 키스했다. 각자의 바지와 속옷을 알아서 척척 벗었다. 서로의 것을 만지다가 그녀의 몸을 침대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넣었다. 그래, 오늘밤도 잠들긴 글렀다.
그녀는 종종 자신의 입을 막았다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데, 그녀의 얼굴이 마라톤을 뛰기 전처럼 비장하게 보이는 순간도 있었다. 문득 생각이 나서, 뒤를 돌아봤다. C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C와 눈이 마주쳤다. 재빨리 눈을 감고, 반대쪽으로 돌아눕는 C의 웃는 얼굴을 본 것도 같다. 그는 비웃었을까? 나는 잘못하고 있는 걸까? 그녀의 몸을 내 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눈을 봤다. 적어도 그녀의 눈을 보고 있는 한, 오늘 밤은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없었다.
- 에디터
- 정우성
- 아트 디자이너
- Illustration/ Finger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