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생존자들

2012.03.03GQ

마약, 알코올, 돈, 명예. 수많은 음악가의 커리어를 망치거나 끝낸 주범들. 이것을 이기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음악가들의 노래는 10년, 20년 혹은 심지어 5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들은 시간으로서 음악가이자 예술가를 뛰어넘었다. 생존자라는 호명은 시절이 첨단을 향할수록, 어떤 새로움이 득세할수록 소중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죽지도 관두지도 무너지지도 않았다는 것에 감사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여전히 노래를 멈추지 않고 있으니.

키스 리처즈 (더 롤링 스톤스) 90년대 이후에 출생한 어린이라면 그에게 (< 캐리비안의 해적 >에서) 조니 뎁 아버지 아니냐며 낄낄댈 수도 있겠다. 키스 리처즈가 아버지였으면 학교에 안 가고 실컷 놀 수 있단 것도 모르고. 키스 리처즈는 조니 뎁의 아버지 역할 이전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불량아의 아이콘이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철들지 않았고 내내 불량했으나, 여전히 건강하다. 지난해 발표한 그의 자서전 제목은 거두절미하고‘ Life’다

 

에미넴 눈이 움푹 들어간 백인 래퍼가 빌보드를 정복했을 때, 대중은 힙합을 팝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록스타가 된 에미넴은 의미심장한 이름의 와 이후 다시 살찌고 수면제에 절은 문제아가 되었다. 돌아오는 데는 4년이 걸렸다. 는 모범적인 복귀작의 좋은 사례로 남았다. 그는 두 곡의 빌보드 1위를 배출한 를 연이어 발표했고, 랩 게임의 중심에 스스로의 힘으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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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클리프 그의 1973년도 음반 은, 그가 가수로 변신한 깡패를 연기한 동명 영화의 사운드 트랙이다. 이 영화와 음반은 미국에 레게를 소개하는 중추 역할을 했다. 클리프가 만약‘ Many Rivers to Cross’를 작곡하는 일에만 매진했다면, 레게는 결코 지금까지 ‘흘러’오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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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 웨인 ‘캐시 머니 레코드’는 힙합이 아니야‘, 캐시 머니 레코드’는 돈만 밝히지, 같은 말이 유효하던 남부 힙합의 개척시대에 릴 웨인은 열다섯 살이었다. 1997년 핫보이즈로 데뷔한 이래, 몸에 문신이 느는 속도만큼 그의 랩은 다른 래퍼들과 완전히 다른 형태로 진화했다. 첫 주에 약 100만 장을 팔아치운 와 호화로운 , 끊임없는 믹스 테이프 발매와 피처링, 그가 진두지휘하는‘ 영 머니 레코드’ 소속 뮤지션들의 선전까지, 릴웨인은 괴짜 래퍼도 누구보다 부지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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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해리 탁월한 뉴웨이브 그룹 블론디를 이끈 그녀는 뉴욕 다운타운의 예술 신과 업타운의 뱅뱅 부기 음악을 연결했다. 오늘날의 어린 팬들이 그녀의 80년대 사진을 텀블러에 붙이고 다니는 사이, 해리는 어느 때보다도 뛰어난 실력으로 여전히 거리에서 노래한다“. 지금까지 연명할 수 있었던 이유가 제가 똑똑해서인지 멍청해서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둘 다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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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블랙 키스 (단 아우어바흐 / 패트릭 카니) 지난 10년간의 실험은 브론토사우루스의 거대한 족적처럼 남아 있다. 모스 데프와 함께 힙합을 연구하거나, 머슬 쇼올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 Brothers >를 작업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지하 창고에서 탈공업화 시대의 블루스를 울부짖는 형제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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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모닝 자켓 (짐 제임스/ 톰 블란켄십 / 패트릭 할라한 / 칼 보로에멜 / 보 코스터) 이들은 처음에 켄터키 출신의 수염 난 시인들로 시작했다. 그리고 모던 록계의 가장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다. 최근 10년 사이에는 라이브를 가장 잘하는 밴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열정적인 펑크에서 댄스, 스페이스 록, 컨트리까지. 미국이라는 나라만큼이나 다양하고 이상한 음악을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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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제이 하비 새로운 안목과 대담함을 드러낸 오랜 경력 동안 그녀는 음산한 잡음에 실린 록과 더불어 괴기스러운 블루스, 영국식 포크를 들려줬다. 그녀는 2011년 머큐리 뮤직 프라이즈를 또 한 번 거머쥐면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반복’이라는 걸 했다.“ 저는 한 번 한 일을 또 하고 싶지 않아요. 하더라도 살짝 다르게 하고 싶어요.”

 

알렉스 터너 (악틱 몽키즈) 악틱 몽키즈와 함께이든 혼자이든 터너는 영국 팝 전통의 두 가지 자랑스러운 면모를 보여준다. 아직 면도도 시작하지 않은 나이에 록 송가를 만들어내는 영특함, 송가에 비범한 열정과 세심함이 느껴지는 짧은 이야기를 담는 총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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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패밀리 (슬리피 브라운 / 빅 보이 / 빅 루브 / 리코 웨이드 / 레이 머레이 / 안드레 3000 / 티-모 / 쿠조 / 빅 깁 / 씨 로) 애틀랜타에서 음악을 하던 친구들이 모여 1990년대 초 뉴욕과 LA로 갈라진 힙합의 틈새에‘ 더티 사우스’를 심었다. 그로 인해 세상은 씨 로와 아웃캐스트 그리고 구디 몹을 얻었다. 말투가 느린 MC들도 희망을 보았다. 빅 보이가 말한다“. 우리는 차고에서 음악을 하면서, 진솔함이 뭔지 알았죠.”

 

닉 로우 그는 정확히 두 개의 히트곡을 냈다.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로는 단 한 개의 히트곡도 없다. 그러나‘ Cruel to be Kind’를 공동 작곡한 이 남자는 다행히도 순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가‘ 우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몇 개의 초기작들은 살짝 미숙해요. 왜 그거 있잖아요. 벌레눈 같이 생긴 식욕 감퇴제.” 그는 자니 캐시와 폴 스미스 그리고 그레이엄 그린을 합쳐놓은 것 같은 쿨하고도 변덕스러운 인물이다.

 

뉴욕 돌스 (실베인 실베인 / 데이비드 요한센) 1971년, 그들은 록 음악에 제트 연료를 뿌렸다. 꽉 끼는 스판덱스와 야한 구두를 신고, 많은 이들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글램 록과 펑크, 뉴 웨이브, 헤어 메탈 그리고 심지어 케샤(Ke$sha)까지 영향을 받았다. 데이비드 요한센의 말이다. “시시한 음악에 반감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저 상관하지 않았죠. 우리는 쇼 비즈니스에 대한 열정이 있었어요. 그 시대에 팽배해 있던 얌전한 이미지와는 다른 걸 보여주고 싶었죠.” 게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술에 취해 립스틱을 바른 경험이 있는 남성이라면 그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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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 존스 (더 클래시/ 빅 오디오 다이너마이트 ) 펑크 록 송가‘ Complete Control’에서 조 스트러머가 부른 가사의 한 부분“ 나의 기타 영웅”은 존스를 두고 쓰여졌을 것이다. 스트러머가 더 클래시에서 분노를 담당했다면, 존스는 야망을 담당했다. 밴드가 와해 위기에 놓였을 때도 그는 분발했다. 빅 오디오 다이너마이트와 고릴라즈를 거치며 작업한 모든 음악가들과 함께 레게, 댄스 음악 그리고 힙합을 파고들었다“. 제 최고의 걸작요?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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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바두 동료인 디안젤로, 로린 힐과 함께, 그녀는 90년대 네오 소울에 그윽한 향내를 풍기는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자로 정의됐다‘. On & On’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노래를 초월했다“. 저는 전사예요. 고독한 타입의 영계죠.” 그녀의 괴짜 성향은, 격정적이고 대담한 ‘Tyrone’ 으로 시작해서, 그 후 더욱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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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리드와 메탈리카 (루 리드 / 커크 해밋 / 로버트 트루히요 / 제임스 헷필드 / 라스 울리히) 루 리드가 학교에 잘 안 나갈 것 같은 쪽이라면, 메탈리카는 그 반의 모든 아이들이 숭배하게 만들 것 같은, 좀 껄렁한 쪽이다. 그들이 함께 앨범을 낸다고 했을 땐, 교장조차도 상관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위험할 게 분명할 테니까.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건 죽을 때까지 위험한 존재로 남는 것이고. 지금까지 록의 역사 또한, 그러는 게 좋을 거라고 가르친다.

 

로버트 플랜트 멋들어진 루츠 록이 담긴 최근작의 이름은 그가 1960년대에 처음 속했던 밴드 이름 ‘Band of Joy’다. 레드 제플린은 지금까지 2억만 장의 레코드를 팔았고, 예순한 살이었던 2009년에는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 부문을 수상했다. 그러니까, 그 앞에서 나이나 경력을 앞세워 ‘열외’하려는 건 소용없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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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화이트 그의 방식은 정통이 아니다. 하지만 개러지 록을 그만의 방식으로 부를 때(더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매주 새로운 밴드를 결성했을 때(더 래콘터스와 더 데드 웨더), 잊힌 음악가를 부활시켰을 때(로리타 린, 완다 잭슨)마다, 그는 언제나 가공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방 안에 신을 들이고, 사람들과 협력하면서, 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죠.” 그는 여전히 기타로, 지옥을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린 개 짖는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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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스크래치 페리 “광기는 현대적이다. 미쳐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리 스크래치 페리는 자메이카의 대중음악이 스카로, 록스테디로, 루츠 레게로, 덥으로,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는 내내 미쳐 있었다. 그는 올해 일흔 다섯 살이다. 그가 발표한 수백 장의 음반 앞에 붙는 여러 가지 장르적인 수식어가 있겠지만, 여전히‘ 매드’만큼 적절한 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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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팝 그와 그의 밴드 더 스투지스가 1969년 미시간 주에서 공연할 당시, 팝은 괴짜들이나 하는 나쁜 것이었다. 그는 무대에서 뛰어내리는 행위를 퍼포먼스 예술로 승화시켰다“. 60년대와 70년대에는 많은 사람이 저희를 똥 취급했어요. 저도 그런 사람들을 똑같이 취급했죠.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엉터리가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졌잖아요? 반면, 그들은 여전하죠, 항상 그랬듯이.”1969년의 우드스톡부터 지금까지 그는 무대 위에서 웃옷을 입은 적이 없다. 그는 심지어 여전히 당신보다 울퉁불퉁한 근육을 가졌을 것이다. 그의 나이 반도 안 되는 청년들도 그렇게 격렬하게 록을 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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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과 스티븐 말크머스 이들은 한 세대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한 세대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들이 되었다. 이들의 합작이 90년대 노스탤지어의 함정에 빠졌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말크머스의 앨범 에서 보여준 벡의 프로덕션은 노회한 인디 록에 새로 지어준 이름 같다. 스티븐 말크머스의 말이다. “저는 대기만성형 인간이에요. 모든 슈퍼모델이 스스로 볼품없다고 말하잖아요? 그때는 아무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죠. 제가 바로 그랬어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요. 폴리나 포리즈코바 라는 모델이 떠오르네요. 구글을 창업한 사람들도요. 우리의 공통점은 아직도 발전하고 있다는 거예요.”

    에디터
    글/ 미국 < GQ > 편집부, 정우영, 유지성
    포토그래퍼
    Mark Seli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