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세경이 3

2012.08.14정우영

좋은 가정환경에서, 건강하게,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럼에도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비참과 우수를 연기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알겠어서, 한번 불러본다.

데님셔츠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팬츠는 시위데님, 흰색 톱은 헬무트랭, 오버롤은 체사레파쵸티.

데님셔츠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팬츠는 시위데님, 흰색 톱은 헬무트랭, 오버롤은 체사레파쵸티.

당신을 규정하는 말 중에 ‘베이글녀’가 있죠. 이 말 어때요? 동안이 아니라서 베이글녀는 아니에요. 콕 찍어 신체를 말하든 뭐든, 칭찬이죠. 그 칭찬을 되게 좋아하는 편이고요.

베이글녀는 남자들이 바라는 성적인 매력을 압축한 말이에요. 당신은 압도적으로 여자보다 남자들이 더 좋아할 것 같은데, 어때요? 원래 그랬죠. 이미지가 그러니까, 근데 절 알고 나면 여자들이 더 좋아해요. 실제로 활발한 팬 분들은 다 언니고요. 신기하죠?

의외네요. 가까이서 잘 지내는 사람들도 거의 여자들이에요. 약간, 아니 많이 그래요. 남자 분들이 상상하는 저와 실제의 저는 좀 다른 것 같아요.하하.

남자들이 몸매가 어떠니 하는 게, 민망하진 않나요? 아니요. 제가 뭐 황금 비율의 완벽한 바디가 아니잖아요. 제 입으로 아, 몸매 끝내줍니다, 한 적도 없으니까. 하하.

성적인 매력이 있는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일까요? 트위터 팔로워 가운데 ‘최승자’ ‘황인숙’ 같은 이름을 발견하고 좀 놀랐어요. 잘 모르지만, 제 눈과 마음에 쉽게 읽히는 걸 좋아해요. 최승자 시인은 <푸른 소금>할 때 이현승 감독이 시집을 선물로 줘서 알았고요.

어떤 시집이었는데요? <이 시대의 사랑>이요. 사실 좀 충격이었어요. 처음 봤을 때는 무슨 영화 <쏘우> 본 느낌이었어요. 시라면, 되게 곱고 아름답고 그런 걸 생각했는데, 언어가 너무 거칠고 날것이어서요. 처음엔 이상했지만 보다 보니 빠져들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전에 서점 갔다가 한 권 샀는데, 김승일이라는 젊은 시인이에요.

<에듀케이션>이요? 전 되도록 그 책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골라요. 편견으로 보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끌리는 대로 샀다가 사람들도 좋아한다는 걸 알면 기쁨이 굉장히 커요. 근데 김승일 시인은 사실 나이를 보고 충격 먹었어요.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런 걸 쓰나 싶었거든요. 아, 맞다, 근데 지금 좋아하는 건 진은영 시인이에요.

누가 가르쳐준 것처럼 잘 골라서 보네요. 최승자 시인이 시작이었어요? 네. 최승자 시인을 시작으로 관심을 가졌어요. 아, 근데 너무 신기한 건요, 고등학교 때 문학시간에 배웠던 시들 있잖아요. 그때는 공부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지루하고 따분했는데, 지금 제 의지로 다시 찾아보니까 좋은 게 너무 많더라고요. 최근에 가장 놀라웠던 건 초등학교 필독 도서였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요.

애벌레 얘기요? 네. 그 책 어렸을 때는 정말 말도 안 되고, 무슨 애벌레 나오고, 이게 뭐야 하면서 팍 덮었거든요. 근데 그 책을 얼마 전에 다시 봤는데요, 이미지 중에 애벌레들이 탑을 쌓은 게 있어요. 그걸 보고, 아, 나도 이 탑에서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아, 탑 안에 살고 있다고요? 네. 제가 이 탑에 속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늘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정말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애벌레가 밟고, 밝히면서 쌓아가잖아요. 근데 한 애벌레가 자기 스스로 누에고치를 감고 나비가 되겠다고, 그 탑에 속하지 않을 거라고 자기 길을 가고요. 중간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그 탑에 속해 있는 애벌레들끼리 하는 얘긴데, “저기 올라가봤자 아무것도 없대, 우리 지금 내려갈까.” 그랬더니 대답이 지금 내려가면 한꺼번에 무너져서 다 죽는다고, 하지만 가봤자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아, 필독 도서는 괜히 필독 도서가 아니구나, 했어요.

하하. 필독 도서에 대한 깨달음보다 인상적인 건 지금 표현이 굉장히 시적이라는 거예요. 어떤 거요?

“애벌레 중 하나가 나”라는 거요. 사회가 그렇잖아요. 쉼 없이 돌아가고, 그 사이에서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나태하다고, 도태됐다고 그러고. 나는 저기 속하지 않아, 혼자 누에고치 감고 알아서 나비 될 거야, 하면 미쳤다고 할걸요? 근데, 제 말이 시적이라니요?

애벌레에 대한 어떤 인식을 했고, 그걸 바탕으로 애벌레와 당신 사이의 거리를 결정했어요. 그런 게 시작詩作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런가요? 요즘 너무 좋은 게, 대입 앞두고 읽었던 연극 스크립트도 다시 읽으니까 재밌는 거예요. 그때는 정말 지루하고 싫었는데, 지금은 너무 재미있어요. <인형의 집>, <실형>, <갈매기>, 이런 작품들이요.

혹시 당신이 했던 대사 중에 좋아하는 대사가 있나요? 뭐가 있을까. 이번에 개봉하는 <알투비: 리턴 투 베이스>에서 정지훈 오빠한테 하는 대사요. “넌 네가 혼자 잘나서 나는 줄 알지? 우리 모두가 널 날게 해주는 거야.” 살짝 오그라드는데, 극중 캐릭터의 상황과 잘 맞아서 인상적이었어요. 게다가 열 번 넘게 테이크를 갔거든요. 감독님이 미웠어요.

오글거리는 걸 계속 시켜서요? 아니요. 제 경우에 정말 순수한 감정은 두 번째 테이크에 잘 나와요. 게다가 감정이 좀 복받치는 장면은 두세 번 이상은 해봤자 잘 안 나오고요. 그걸 앵글을 다양하게 한다고 열 번을 넘게 하니까, 감독님이 되게 밉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좋은 시나리오를 많이 만났어요. <뿌리 깊은 나무>, <선덕여왕>, <지붕 뚫고 하이킥>.
맞아요. 개인적으로도 너무 좋아하는 작품들이에요. 특히 <선덕여왕>은 힘들게 찍긴 했지만, 진짜 대단한 작품 같아요. 대사 너무 좋고. <뿌리 깊은 나무>에서 되게 좋았던 점은 특별한 악역이 없다는 거고요.

그렇죠. 각자의 ‘대의’가 있죠. 그니까요. 정기준 말을 들으면 이도가 이상한 것 같고, 이도 말 들으면 정기준이 이상한 것 같고. 각각의 캐릭터가 설득력을 갖게 쓴다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잘 알아요. 너무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믿음이 있나요? 기독교예요. 모태신앙. 집안이 전부 다 기독교. 종교 있으세요?

없는데, 말을 듣다가 당신이 어디에 기대서 말하는 건가, 아니 아무것도 없나, 궁금해졌어요. 무신론자요?

그런 뉘앙스도 있었고요. 솔직하고, 충분히 열려 있지만 그래도 옳다고 믿는 게 있는. 맞아요. 사실 주변 사람들한테 한 번도 종교에 대해 말한 적이 없어요. 그게 옳은 건진 잘 모르겠지만, 제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는 해요, 자기 전에. 어느 정도의 순수한 믿음이 좋지, 그걸 억지로 강요하는 건 좀 그래요. 사실 요즘 종교에 대해서도 되게 많은 의문이 생기는 때예요. 모태신앙이다 보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서 생기는 것 같아요. 그게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의문을 갖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지 좀 더 바른 신앙인이 되는 거 아닐까요? 맹목적인 믿음은 싫으니까.

사격이든 바이크든 배우로서 이것저것 경험하고 판단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죠? 이번엔 정비사라는 직업이었고요. 해보니까, 이건 나랑 어울린다 싶었던 게 있나요? 아직 그렇게 많이 안 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제 삶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하하.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란 시가 있어요. 그런 걸 느껴요. 한 사람의 직업에는 다른 사람이 보면, 감히 쉽게 알 수 없는 깊고 심오한 세계가 있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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