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가정환경에서, 건강하게,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럼에도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비참과 우수를 연기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알겠어서, 한번 불러본다.
당신을 규정하는 말 중에 ‘베이글녀’가 있죠. 이 말 어때요? 동안이 아니라서 베이글녀는 아니에요. 콕 찍어 신체를 말하든 뭐든, 칭찬이죠. 그 칭찬을 되게 좋아하는 편이고요.
베이글녀는 남자들이 바라는 성적인 매력을 압축한 말이에요. 당신은 압도적으로 여자보다 남자들이 더 좋아할 것 같은데, 어때요? 원래 그랬죠. 이미지가 그러니까, 근데 절 알고 나면 여자들이 더 좋아해요. 실제로 활발한 팬 분들은 다 언니고요. 신기하죠?
의외네요. 가까이서 잘 지내는 사람들도 거의 여자들이에요. 약간, 아니 많이 그래요. 남자 분들이 상상하는 저와 실제의 저는 좀 다른 것 같아요.하하.
남자들이 몸매가 어떠니 하는 게, 민망하진 않나요? 아니요. 제가 뭐 황금 비율의 완벽한 바디가 아니잖아요. 제 입으로 아, 몸매 끝내줍니다, 한 적도 없으니까. 하하.
성적인 매력이 있는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일까요? 트위터 팔로워 가운데 ‘최승자’ ‘황인숙’ 같은 이름을 발견하고 좀 놀랐어요. 잘 모르지만, 제 눈과 마음에 쉽게 읽히는 걸 좋아해요. 최승자 시인은 <푸른 소금>할 때 이현승 감독이 시집을 선물로 줘서 알았고요.
어떤 시집이었는데요? <이 시대의 사랑>이요. 사실 좀 충격이었어요. 처음 봤을 때는 무슨 영화 <쏘우> 본 느낌이었어요. 시라면, 되게 곱고 아름답고 그런 걸 생각했는데, 언어가 너무 거칠고 날것이어서요. 처음엔 이상했지만 보다 보니 빠져들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전에 서점 갔다가 한 권 샀는데, 김승일이라는 젊은 시인이에요.
<에듀케이션>이요? 전 되도록 그 책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골라요. 편견으로 보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끌리는 대로 샀다가 사람들도 좋아한다는 걸 알면 기쁨이 굉장히 커요. 근데 김승일 시인은 사실 나이를 보고 충격 먹었어요.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런 걸 쓰나 싶었거든요. 아, 맞다, 근데 지금 좋아하는 건 진은영 시인이에요.
누가 가르쳐준 것처럼 잘 골라서 보네요. 최승자 시인이 시작이었어요? 네. 최승자 시인을 시작으로 관심을 가졌어요. 아, 근데 너무 신기한 건요, 고등학교 때 문학시간에 배웠던 시들 있잖아요. 그때는 공부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지루하고 따분했는데, 지금 제 의지로 다시 찾아보니까 좋은 게 너무 많더라고요. 최근에 가장 놀라웠던 건 초등학교 필독 도서였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요.
애벌레 얘기요? 네. 그 책 어렸을 때는 정말 말도 안 되고, 무슨 애벌레 나오고, 이게 뭐야 하면서 팍 덮었거든요. 근데 그 책을 얼마 전에 다시 봤는데요, 이미지 중에 애벌레들이 탑을 쌓은 게 있어요. 그걸 보고, 아, 나도 이 탑에서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아, 탑 안에 살고 있다고요? 네. 제가 이 탑에 속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늘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정말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애벌레가 밟고, 밝히면서 쌓아가잖아요. 근데 한 애벌레가 자기 스스로 누에고치를 감고 나비가 되겠다고, 그 탑에 속하지 않을 거라고 자기 길을 가고요. 중간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그 탑에 속해 있는 애벌레들끼리 하는 얘긴데, “저기 올라가봤자 아무것도 없대, 우리 지금 내려갈까.” 그랬더니 대답이 지금 내려가면 한꺼번에 무너져서 다 죽는다고, 하지만 가봤자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아, 필독 도서는 괜히 필독 도서가 아니구나, 했어요.
하하. 필독 도서에 대한 깨달음보다 인상적인 건 지금 표현이 굉장히 시적이라는 거예요. 어떤 거요?
“애벌레 중 하나가 나”라는 거요. 사회가 그렇잖아요. 쉼 없이 돌아가고, 그 사이에서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나태하다고, 도태됐다고 그러고. 나는 저기 속하지 않아, 혼자 누에고치 감고 알아서 나비 될 거야, 하면 미쳤다고 할걸요? 근데, 제 말이 시적이라니요?
애벌레에 대한 어떤 인식을 했고, 그걸 바탕으로 애벌레와 당신 사이의 거리를 결정했어요. 그런 게 시작詩作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런가요? 요즘 너무 좋은 게, 대입 앞두고 읽었던 연극 스크립트도 다시 읽으니까 재밌는 거예요. 그때는 정말 지루하고 싫었는데, 지금은 너무 재미있어요. <인형의 집>, <실형>, <갈매기>, 이런 작품들이요.
혹시 당신이 했던 대사 중에 좋아하는 대사가 있나요? 뭐가 있을까. 이번에 개봉하는 <알투비: 리턴 투 베이스>에서 정지훈 오빠한테 하는 대사요. “넌 네가 혼자 잘나서 나는 줄 알지? 우리 모두가 널 날게 해주는 거야.” 살짝 오그라드는데, 극중 캐릭터의 상황과 잘 맞아서 인상적이었어요. 게다가 열 번 넘게 테이크를 갔거든요. 감독님이 미웠어요.
오글거리는 걸 계속 시켜서요? 아니요. 제 경우에 정말 순수한 감정은 두 번째 테이크에 잘 나와요. 게다가 감정이 좀 복받치는 장면은 두세 번 이상은 해봤자 잘 안 나오고요. 그걸 앵글을 다양하게 한다고 열 번을 넘게 하니까, 감독님이 되게 밉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좋은 시나리오를 많이 만났어요. <뿌리 깊은 나무>, <선덕여왕>, <지붕 뚫고 하이킥>.
맞아요. 개인적으로도 너무 좋아하는 작품들이에요. 특히 <선덕여왕>은 힘들게 찍긴 했지만, 진짜 대단한 작품 같아요. 대사 너무 좋고. <뿌리 깊은 나무>에서 되게 좋았던 점은 특별한 악역이 없다는 거고요.
그렇죠. 각자의 ‘대의’가 있죠. 그니까요. 정기준 말을 들으면 이도가 이상한 것 같고, 이도 말 들으면 정기준이 이상한 것 같고. 각각의 캐릭터가 설득력을 갖게 쓴다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잘 알아요. 너무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믿음이 있나요? 기독교예요. 모태신앙. 집안이 전부 다 기독교. 종교 있으세요?
없는데, 말을 듣다가 당신이 어디에 기대서 말하는 건가, 아니 아무것도 없나, 궁금해졌어요. 무신론자요?
그런 뉘앙스도 있었고요. 솔직하고, 충분히 열려 있지만 그래도 옳다고 믿는 게 있는. 맞아요. 사실 주변 사람들한테 한 번도 종교에 대해 말한 적이 없어요. 그게 옳은 건진 잘 모르겠지만, 제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는 해요, 자기 전에. 어느 정도의 순수한 믿음이 좋지, 그걸 억지로 강요하는 건 좀 그래요. 사실 요즘 종교에 대해서도 되게 많은 의문이 생기는 때예요. 모태신앙이다 보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서 생기는 것 같아요. 그게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의문을 갖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지 좀 더 바른 신앙인이 되는 거 아닐까요? 맹목적인 믿음은 싫으니까.
사격이든 바이크든 배우로서 이것저것 경험하고 판단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죠? 이번엔 정비사라는 직업이었고요. 해보니까, 이건 나랑 어울린다 싶었던 게 있나요? 아직 그렇게 많이 안 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제 삶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하하.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란 시가 있어요. 그런 걸 느껴요. 한 사람의 직업에는 다른 사람이 보면, 감히 쉽게 알 수 없는 깊고 심오한 세계가 있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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