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비빔밥

팔도비빔밥

2015-11-09T11:31:03+00:00 |TRAVEL & EATS|

팔도에 퍼진 수백 가지 비빔밥 중 다섯 가지를 골랐다. 매운 고추장이나 화려한 고명 없이도 맛이 우뚝하다.

헛제사밥
안동은 경상도에 있지만 섬처럼 세월을 거쳐왔다. 안동 국수나 안동 비빔밥도 그저 안동식일 뿐이다. 제사를 안 지내도 먹을 수 있는 헛제사밥은 자극적인 맛이 침범하기 전의 비빔밥이다. 고사리나물, 콩나물, 무 나물, 얼갈이를 넣고 고추장 대신 간장으로 간을 맞춰 먹는다. 삼삼하고 개운한 나물 맛을 하나하나 느끼기 위해선 고추장이 없는 게 맞다. 제사상을 차리면서 꼬치나 전을 잔뜩 주워먹고는, 느끼함에 해장국을 찾는 주정뱅이가 된 것처럼 나물 비빔밥을 찾은 적 모두 있지 않나? 헛제사밥을 집에서 직접 만들고 싶다면 부엌이 전쟁터가 되는 걸 감안해야 한다. 나물을 하나씩 다듬고 삶고 볶고 무쳐야만 나물 맛이 파르르 사니까 말이다.

미나리 비빔밥
전북 남원이나 경북 청도처럼 미나리로 유명한 마을에선 꼭 이렇게 밥을 비빈다. 크레파스로 그린 듯 선명한 생미나리를 볼 때마다 양껏 먹어 치우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데, 그 마음도 함께 넣고 비빈다. 맛있는 생미나리는 향긋함은 은은하고, 아삭한 맛은 박력이 넘치기 때문에 익혀 먹기엔 좀 아까운 게 사실이다. 이 비빔밥을 만들 땐 다른 나물이나 고추장이 필요 없다. 시골 할머니들 방식대로 하자면, 국간장을 넣고 자박하게 졸인 멸치로 간을 맞춘다. 미나리는 듬성듬성하게 썰어 고춧가루와 참기름, 다진 마늘을 아끼듯이 살짝만넣고 무쳐서 비빔밥에 넣는다. 이걸 머리통보다 큰 대접에 비비면 먹기도 전에 힘이 불끈 솟는다.

닭 비빔밥
이북에선 비빔밥에 닭고기를 올렸다. 요즘은 통조림 닭 가슴살이 슈퍼마켓 한 쪽에 가득이라 닭 비빔밥이 ‘웰빙’이나 ‘퓨전’처럼 느껴지겠지만, 이북 사람들은 보신용으로 닭고기를 삶아 밥에 넣었다. 황해도식 해주 비빔밥에는 각종 나물과 함께 얇게 찢은 삶은 닭고기가 들어가고 평안도에선 칼칼하게 양념한 닭을 넣고 밥을 비빈다. 닭 비빔밥은 고추장을 넣지 않아도 참기름, 간장, 깨소금, 다진 마늘에 고춧가루를 개서 만든 닭고기 양념 덕에 입 안이 심심할 새가 없다. 나물류는 콩나물과 호박 정도로 간단히 준비하는데, 양만큼은 잔칫날인 것처럼 듬뿍 넣는다. 좀 퍽퍽하다 싶을 땐 닭을 삶은 육수를 소금으로 간한 뒤 비빔밥 위에 조금씩 부어 먹는다.

해초 비빔밥
최근 몇 년 사이 여기저기로 퍼진 비빔밥이다. 남해 어느 식당 주인이 개발했다는 말도 있고, 톳이나 해초를 넣고 비벼 먹던 통영 비빔밥이 발전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다 식용 해초가 마트에까지 깔릴 정도로 보편화되면서 바닷가 식당에서도, 가정집에서도 우루루 비벼 먹기 시작했다. 해초 비빔밥은 파래, 톳, 청각, 한천, 세모가사리 등 계절에 맞는 해초를 입맛에 맞게 골라 넣고 꼬들꼬들, 까슬까슬 씹히는 맛으로 먹는다. 여기에 성게알이나 자숙문어를 별사탕처럼 넣고 비벼도 좋다. 흔히 넣는 초고추장 대신 간장, 식초, 설탕을 섞은 양념장으로 비벼보면 산나물 비빔밥이 표현 못할 바다의 기운이 물씬 느껴진다.

멍게 비빔밥
에스프레소가 구수하다 느껴지기 시작할 때부터 어른이 된 듯한 기분에 젖는다. 멍게 향이 그윽하다 느끼기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다. 멍게 비빔밥은 거제도와 통영 부근에서 먹기 시작한 바닷가의 비빔밥이다. 식당에서 멍게 비빔밥을 판 지 몇 년 되지 않았으니, 짧은 시간에 유행처럼 번졌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비빔밥은 소금에 절인 멍게젓을 다진 대파나 부추, 김, 깨소금, 참기름과 함께 밥에 넣고 비벼 먹는다. 어떤 이들은 멍게 향을 채 즐겨보기도 전에 김, 고추장, 참기름을 잔뜩 넣어 그 향을 누르는데, 그보단 멍게젓갈 맛이 치고 올라올 수 있도록 밥그릇 속을 최대한 단출하게 해야 훨씬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