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꿈꾸던 사람들이 시나리오에 목메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면 감독이든, 작가든 뭐라도 됐으니까. 하지만 이젠 시나리오를 써도 무엇도 될 수 없다.
“시나리오 쓸 건데요.” 졸업하면 뭐 할 거냐는 질문에 영화과 졸업생 중 절반은 그렇게 대답했다. 영화 한두 편 정도에 연출부로 참여해 현장 경험을 쌓은 뒤 시나리오를 써서 그걸로 감독 데뷔를 하겠다는 얘기다. 정말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는 뜻으로 말한 이도 더러 있긴 했다. 그만큼 끝내주는 시나리오를 내놓는 일은 학연과 지연을 무색하게 하는 ‘감독 데뷔 보증수표’였다. 많은 청춘이 너도나도 책상 앞에 앉았다. 연간 100편이 넘는 한국영화가 제작되던 2005, 2006년 충무로의 작은 풍경이다. 그때는 시나리오만 잘 쓰면 작가가 됐든, 감독이 됐든 영화판에서 뭐라도 될 확률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봉준호, 김지운, 장준환, 윤종찬 등 2000년대 초에 등장해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를 이끈 선배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책상 앞에 앉아 글만 쓰면 되는 낭만의 시절은 이제 지났다. 2006년부터 시작된 불황의 터널을 지나면서 한국영화 산업은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롯데엔터테인먼트 등 대기업 투자배급사 3사 중심으로 재편됐다. ‘하이 리스크, 로 리턴’이라는 산업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대기업은 영화의 모든 공정을 ‘합리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산업의 형태로 갖춤으로써 수익률을 높이겠다는 게 그들의 계산이었다. 시스템을 필요로 했던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러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중 하나가 산업과 예술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시나리오 개발이었다. 사실 개발 방식만 놓고 보면 대기업이나 과거 제작자나 크게 다르지 않다. 원작이 있다면 (잘 각색해낼 수 있다고 판단되는) 시나리오 작가를 고용하고, 호흡이 잘 맞을 것 같은 작가를 감독 옆에 붙이기도 한다.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와 함께 개발하는 경우도 많다. 개발 과정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의 수정을 작가에 요구하기도 한다. 시나리오에 대한 제작자나 투자자의 간섭은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고 문제라 할 만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능력 있는 작가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연출까지 맡기도 한다. 다만, 과거의 제작자에 비해 현재의 대기업은 시나리오를 지나치게 통계화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그게 일반 관객이 참여하는 대기업의 시나리오 모니터링 시스템이다.
만점은 5.0점. 커트라인은 3.5점. ‘안전빵’은 4.0점. 제작사나 프로듀서가 투자배급사에 건넨 시나리오는 10대 후반에서 30대에 이르는 갑을남녀 적게는 20~30명, 많게는 40~50명에 전달된다.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서명한 뒤 이들은 시나리오를 읽는다. 신별 5분씩 읽고 점수를 매긴다. 채점 기준은 ‘너무 재미없다’ ‘재미없다’ ‘보통이다’ ‘재미있다’ ‘매우 재미있다’ 등 5단계다. 모니터링 결과로 나온 점수를 모두 더한 뒤, 그렇게 나온 총합을 신 수로 나누면 신별 평균 점수가 나온다. 점수가 4.0점 이상 나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미리 정해진 감독이나 배우가 좋다면 3.5점 이상 나와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여러 편을 흥행시킨 감독의 시나리오에 한해 모니터링 심사를 거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CJ의 경우 3.5점에서 3.8점 정도를 높은 점수로 친다. 시나리오가 ‘재미있다’와 ‘매우 재미있다’ 정도가 되어야 CJ로부터 투자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역시 투자심사 과정에서 ‘초록 불’이 켜져야 투자를 결정한다. 그러나 일반 관객의 모니터링 심사 결과는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으로만 활용할 뿐이지, 그걸 가지고 작가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진 않는다.
이 채점은 시나리오를 평가하는 데만 쓰이는 게 아니다. 신별 점수가 그래프로 그려지고, 이 그래프를 유사한 장르의 과거 흥행 영화 그래프와 나란히 배치한다. 두 시나리오의 구조를 한눈에 비교하기 위한 목적이다. 두 그래프를 비교함으로써 제작자와 투자사는 수정해야 할 부분을 확인하고, 시나리오 작가에 전달한다. 가령, 재난영화의 경우 다음과 같다. 영화 시작 10분 안에 캐릭터가 소개되어야 하고, 20분 안에 사건이 터져야 한다. 중반쯤엔 장르의 하이라이트인 재난 스펙터클을 선보여야 하며, 마지막 장면 10분 전 관객의 눈물을 쏙 빼놓아야 한다. 코미디 영화의 경우, 영화의 초반부에 유머가 많으면 뒷부분에 감동을 줄 만한 요소를 반드시 집어넣어야 한다. 영화가 관객의 감정을 과학적으로 재단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임이 분명하다.
모니터링 시스템은 시나리오 작가를 무척 피곤하게 한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한 중견 작가는 “장편영화의 경우, 100개에서 120개의 신이 모여 한 편의 이야기가 구성된다”며 “신과 신이 만나면서 캐릭터가 발전되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건데, 개별적인 신이 재미없다고 그걸 고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그는 “경력이 많은 내게도 그런 수정 요청이 들어오는데 이제 막 데뷔를 한 신인 작가들은 얼마나 고생할지 불 보듯 뻔하다”고 신인 작가의 처우를 걱정했다.
지난해 데뷔한 한 신인 작가는 “같은 장르라도 이야기마다 소재, 사건, 캐릭터가 제각기 다르다”며, “그 이야기에 맞는 서사 전개 방식이 있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과거 흥행 영화와 비슷한 구조를 취하게 되면 그 이야기만의 생명력은 확실히 없어지게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지훈 감독의 <타워>를 보고 30여 년 전 할리우드의 재난영화 <타워링>을 떠올린 건 비단 제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모니터링 결과에 따라 작가는 시나리오를 수정하지만 그때마다 각색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것도 문제다. 보통 시나리오 계약은 작업 전 계약금이 지급되고 초고 혹은 2고가 나오면 중도금, 그리고 영화가 촬영에 들어가거나 극장에 걸리게 되면 잔금이 지급된다. 제작자가 핑계대기 딱 좋은 계약 방식이다. 별도의 각색료 없이 예닐곱 번씩 수정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혹여나 영화가 중간에 엎어지기라도 하면 잔금은 영영 받을 수 없게 된다. 잔금 지급과 관련한 조항이 계약서에 따로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을’인 시나리오 작가는 억울해도 별수 없다.
그래서 시나리오 작가들이 지난해 5월 한자리에 모였다. 영화진흥위원회가 공청회를 열어 지난 1년 간 준비한 5종의 시나리오표준계약서를 발표한 것이다. 시나리오표준계약서는 시나리오 작가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크레딧은 각본 ‘아무개’로 명시하고, 전체 및 단계별 시나리오 집필 기간을 명시할 것 등 작가의 저작권을 보호할 수 있는 조항이 들어가 있다. 단계별(트리트먼트, 초고, 2고, 3고 등) 집필료를 선지급하고, 캐릭터의 사용, 속편, 전편, 리메이크 등 2차 저작물 작성과 타 매체권의 행사는 작가와 협의해 별도 지급할 것 등 수익배분 및 인센티브 적용도 구체화했다. 다소 늦은 감이 있긴 하나 그날 자리에 참석한 시나리오 작가들은 “시나리오표준계약서가 하루빨리 영화계에 도입되길 원한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공청회 당일,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제작한 리얼라이즈 픽쳐스 원동연 대표가 <신과 함께 : 저승편>(원작 주호민, 감독 김태용)의 시나리오를 쓰게 될 작가와 시나리오 표준계약서로 계약했다.
그로부터 1년 가까이 지났지만 시나리오표준계약서는 아직 영화계에 완전히 착륙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것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업에 안착되지 못하고 있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강제성이 없어서? 굳이 먼저 손해 보기 싫어서? 무명 시절부터 요구사항이 많아 제작자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은 박훈정 작가[<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 각본, <혈투> <신세계>연출]의 말이 씁쓸하지만 맞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굳이 요구를 안 하니까 제작사도 먼저 챙겨주려 하지 않는다. 작가 입장에서 세게 나가라는 게 아니라 괜히 저자세일 필요가 없다. 결국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야 할 것 같다.” 맞다. 시나리오 작가는 글도 잘 써야 하고, 계약도 잘해야 한다. 소심하더라도 요구할 건 다 요구해야 한다. 그래서 다음 작품 때 제작자가 찾지 않아도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일반 관객의 모니터링 심사도 통과해야 한다. 고치라는 거 다 고쳐야 한다. 개봉한 뒤 잔금이 제대로 들어오는지 눈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쓰며 살아가는 건 이래저래 피곤한 일이다.
하필, 밴 애플렉이 연출한 <아르고>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란 테헤란에 억류된 인질을 구하기 위해 협상 전문가 토니 멘데즈(밴 애플렉)는 가상의 영화 ‘아르고’를 만들 생각을 한다. 그는 스튜디오의 중역, 특수분장 전문가와 함께 누군가를 첫 번째로 찾아간다. 바로 시나리오 작가다. 할리우드에선 가짜 영화를 만들 때도 시나리오 작가에게 제일 먼저 허락받아야 했다.
- 아트 디자이너
- ILLUSTRATION / LEE EUN HO
- 기타
- 글/ 김성훈( 기자)